베겐스바흐 대공 (2)
“만나서 반가웠네, 남작.”
“저 역시 영광이었습니다, 변경백 각하.”
“그래, 가는 길 또한 보나탈 경이 안내할 것이니 조심해서 귀가하시게.”
“좋은 자리에서 또 뵙겠습니다, 그럼.”
처음 창고에 들어섰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닐렌츠 남작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떠나갔다.
예의 바르지만, 결코 비굴함이 느껴지지 않는 태도.
그 담백하고도 당당한 모습은 자신의 앞에서 잘 보이려 안달이 난 다른 귀족들과 확실한 차이를 보였다.
‘... 남작의 나이가 올해 스물셋이라고 했던가?’
자신과 40년 가까이 차이가 나는 그의 어린 나이를 떠올려보니 더욱 기가 막힌 루덴도르프 백작이었다.
‘나는 그 나이 때 무얼 했지?’
물론, 루덴도르프 백작 역시 시대를 대표하는 걸물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이.
그의 이십 대 초반 역시 보통 사람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비범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왕국 최강의, 아니 대륙 최강의 기사단을 논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그 이름.
설원기사단(雪原騎士團).
펠리노어 왕국보다도 더욱 오래된 역사를 지녔으며, 무려 7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저 겨울 장벽을 지키며 대륙 북부 야만족들의 침략을 막아온 전설적인 기사들.
루덴도르프 백작은 스물셋의 나이에 바로 그 설원기사단의 일원으로 겨울 장벽을 수호했었다.
보통 설원기사단에 소속된 평범한 단원의 실력이 어지간한 중소 기사단의 단장을 압도하는 수준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루덴도르프 백작의 젊은 시절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다닐렌츠 남작은 아예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
완성된 기사로서 풍기는 막강한 기세 외에도, 다닐렌츠 남작에게선 도저히 그 나이에서 나올 수가 없는 어마어마한 연륜이 묻어났다.
스물세 살의 청년이 아니라 족히 나이 오십은 먹은 중년의 사내에게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
실제 나이와 느껴지는 분위기의 간극이 너무나 커서, 루덴도르프 백작은 연신 침음을 삼켜야 했다.
하지만 그를 수행해 오늘 가문의 안가(安家)까지 따라온 그의 아들, 고트프리트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아버지, 다닐렌츠 남작의 태도가 너무 방자합니다.”
루덴도르프 백작 본인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판단이었지만, 그는 장성한 아들을 다그치기보단 어째서 그런 결론을 내렸는지 들어보기로 했다.
“어찌하여 그렇게 생각했느냐?”
“이렇게 직접 아버지께서 험한 곳에 발걸음을 하시고, 먼저 손을 내미시는데도 저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들리는 소문에 다닐렌츠 남작이 대단하다 어쩌다 하여도 결국은 나이가 어려 천지 분간을 못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치 숲속의 곰을 연상하게 하는 커다란 덩치를 지닌 백작의 둘째 아들이 불편한 감정을 숨김없이 토해내자 마치 사람이 아닌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라 생각하는 아버지의 청을 물리친 저 ‘어린 놈’의 행동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고트프리트였다.
“하하하, 너는 남작을 그리 보았느냐? 아직 천지 분간 못 하는 어린놈이라?”
“예, 저는... 그리 생각했습니다.”
웃음 섞인 아버지의 말에서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은 것인지, 고트프리트의 목소리에 아까와 달리 조금 주눅 든 기색이 섞인다.
“뭐, 네 눈에는 그리 보일 수도 있겠구나.”
“허면, 아버님은 다닐렌츠 남작을 달리 보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미 저 친구는...”
이 느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일신에 품은 용력만 놓고 본다면 능히 자랑할만하나, 아직 사람을 보는 능력만큼은 부족한 자신의 둘째 아들에게 가르침이 될 단어의 선택을 고심하던 백작이 마침내 꺼내 놓은 표현은...
“보아하니, 누군가의 깃발 아래 설 인물이 아니구나.”
“...!”
“장인의 핑계를 대며 내 청을 거절한 것도, 훗날의 대업을 꿈꾸고 있기 때문일테지.”
“허면...”
“다닐렌츠 남작은 능히 자신의 세력을 이룰만한 그릇을 지닌 자다. 그 만만치 않은 야심을 미리 확인했으니, 이 늦은 시간에 허름한 창고까지 발걸음을 한 보람이 있구나. 하하하하!”
***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길.”
숙소까지 나를 안내해준 루덴도르프 백작 휘하의 기사 옌스 보나탈 경이 내게 꾸벅 인사를 건넨 뒤 어두운 골목길로 사라진다.
“... 후우, 목이 타네.”
어둠 속에서 서서히 옅어지는 그의 기운을 느끼며, 나는 참았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워낙 밤늦은 시간이기도 했지만, 시대의 거인(巨人)이라 할 수 있는 파울 루덴도르프 변경백과의 만남 자체가 주는 피로감이 상당했다.
“확실히 대단한 양반이긴 하네. 앞에 서 있기만 해도 압박감이 무슨... 어후!”
긴장감에 뭉친 어깨 근육을 이리저리 풀어내며, 나는 루덴도르프 백작과의 만남을 복기했다.
백작이 내게 건넨 제안은 무척 간단해서 다음의 한마디로 정리할 수가 있었다.
‘왕국의 새로운 군주, 요제프 3세 국왕 폐하에게 충성을 다하라’
사실, 내용 자체만 보자면 굳이 이걸 야심한 밤에 불러내서 따로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싶을 내용이었다.
내가 누군가, 명색이 펠리노어 왕국의 지배 가문인 펠린느 왕가의 봉신(封臣)인 다닐렌츠 남작이다.
봉신이란 봉토를 받는 대가로 주군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를 뜻하는 것.
그러니, 내가 왕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요제프 3세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은 굳이 두 번 세 번 말할 것도 없이 숨 쉬듯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루덴도르프 백작이 이런 당연한 얘기를 굳이 가문의 안가까지 불러다 놓고 내게 전한 이유가 있겠지.
“... 벌써부터 귀족들의 동요가 심한 가 보군.”
그랬다.
세상엔 나처럼 순순히 봉신 계약을 따르는 귀족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과 가문의 이익을 위해 계약의 맹세를 헌신짝 버리듯 내던지는 인간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특히 새로이 왕국의 군주로 등극한 요제프 3세의 경우 고작 열한 살에 불과한 소년이었기에, 제대로 국정 운영을 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봉신들 사이에서 커지고 있는 상황.
더욱이 베겐스바흐 대공이라는, 역시 왕가의 핏줄을 이은 대단히 훌륭한 대안이 존재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동요가 더 커질 수밖에.
펠린느 왕가를 떠받치는 가장 든든한 기둥이자 왕실의 외척이기도 한 루덴도르프 가문의 입장에선 그 혼란이 더 커지기 전에 어떻게든 잠재우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백작의 밑으로 들어갈 순 없지.”
루덴도르프 백작은 나에게 ‘왕국의 새로운 군주, 요제프 3세 국왕 폐하에게 충성을 다하라’는 말을 전하며 ‘나의 깃발 아래서’라는 단서를 달았다.
뭐랄까, 지난 생에 즐겨보던 만화에서 나온 표현을 빌자면 ‘너, 내 동료가 되라’ 정도일까?
‘사실 냉정히 말하면 동료라기보다는 부하에 가깝겠지만...’
여하간,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런 백작의 청을 거절했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아뇨, 싫습니다!’ 한 건 아니었고, 듣기 좋은 말로 적당히 에둘러 표현했지.
‘... 일세의 영웅이시자 왕국 최고의 명문가인 루덴도르프가의 가주이신 변경백 각하에게 이런 제안을 받게 되어 일신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껏 그러했듯 언제나 주군이신 펠린느 왕가의 번영을 위해 저의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하하하, 그리 말해주어 고맙네. 그럼 앞으로...’
‘허나.’
‘...?’
‘변경백 각하의 깃발 아래 서라는 말씀만은 안타깝게도 따를 수가 없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 어째서인가?’
‘아시겠지만, 저는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딸과 혼인하여 그분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바이펠베르크와 카릴베르크, 두 가문이 혼인이라는 경사로 이어져 하나가 되었는데 제가 어찌 변경백 각하의 휘하에 들어갈 수 있겠나이까.’
‘...’
‘변경백 각하께서 어떤 심정으로 제게 제안을 하신 건지는 짐작하오나, 저는 함부로 그에 대한 가부를 언급할 수가 없겠습니다. 이점을 참작해주시옵소서.’
‘... 알겠네.’
장인어른의 이름을 내세운 것은 다시 생각해도 참 좋은 핑계였다.
그 자신만만했던 루덴도르프 백작이 쓴웃음을 지으며 별말 없이 물러났으니 말이다.
나의 장인인 바이펠베르크 백작이 공작을 지지하는 인물이었다면 모를까, 그분 역시도 대표적인 근왕파(勤王派)의 인물 중 하나.
루덴도르프 백작의 입장에선 이래저래 끼어들 여지가 없었으리라.
“그나저나, 슬슬 동쪽에서 움직임이 있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내가 미리 쳐둔 정보망에 ‘그’의 움직임이 잡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
루덴도르프 변경백과의 만남이 있었던 그 날 이후 며칠이 지났다.
나는 아침 일찍부터 숙소로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장인어른과의 오전 대련을 취소했다.
조금 섭섭해하시겠지만 어쩔 수 없다.
왕국제일검과의 대련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이쪽이 더 급하거든.
“병력이... 3천?”
“예, 현재까지 파악한 규모는 그렇습니다.”
“흐음...”
나를 찾아온 손님은, 다름 아닌 다닐렌츠 영지군 소속의 정보 장교였다.
이곳 카를리온 뿐만 아니라 다닐렌츠 상단 사무소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그게 어디든 최소 한 명 이상의 정보 장교가 파견되어 있었다.
이들은 왕국 전역에서 올라오는 첩보원들의 보고를 모아서 주도 키르헨으로 올려보내는 일을 했다.
현재는 영주인 내가 카를리온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그 정보들이 키르헨을 거쳐 다시 나에게로 전달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전달된 정보는... 좀, 심각한 내용이었다.
“일단... 오스텐할트 요새의 주둔군 사령관은 베겐스바흐 대공 측에 포섭된 것 같습니다. 대공의 병력이 사전 보고 없이 요새를 지나 산맥 너머로 들어섰음에도 왕도에 보고를 올리지 않았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 대공이 사령관에게 자리 하나 내주겠다고 약속했나 보군.”
“저희 쪽에도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병력은 지금 어디에 있나?”
“일단은 오스텐할트 요새를 지나 왕국 중부 외곽 지역으로 들어섰고, 거기서 더는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럴 테지. 더 깊숙이 들어왔다간 곧장 그 움직임이 발각되어 반란군이 될 테니.”
“맞습니다.”
애초에 왕의 허락을 받지 못한 군대는 왕도 카를리온과 그 근방의 왕실직할령, 이른바 ‘카를란트(Karland)’ 안쪽으로 들어올 수 없다.
그 점을 알기에 대공은 병력을 카를란트 경계 근방에 숨겨두려는 것이다.
“우선 왕도에서 일을 벌인 후 그 즉시 병력을 움직여 왕도를 들이칠 생각이겠지.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꼴을 보니, 얼마 멀지는 않은 것 같다.
“... 앞으로 매일 아침 해당 병력의 움직임을 보고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대공은 따로 움직이고 있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저희가 예측한 바에 따르면, 대공은...”
긴장감에 꿀꺽 침을 삼킨 정보 장교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대답한다.
“... 3일 후, 카를리온에 도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