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겐스바흐 대공 (3)
나에게 보고했던 다닐렌츠 군 정보 장교의 예측대로, 베겐스바흐 대공은 정확히 3일 후 왕도 카를리온에 도착했다.
“대공이 정문을 막 통과하여 시내로 들어섰다는 보고입니다!”
“... 그래?”
병사 하나가 잽싸게 달려와 대공의 도착 소식을 전했다.
나는 그 즉시 하던 일을 멈추고 아드리안과 함께 정문에서 왕성으로 향하는 대로변으로 향했다.
혹시 모를 소란을 우려해 모자가 달린 로브를 뒤집어썼기 때문에 내가 누군지 알아보는 이는 없으리라.
“저기 옵니다.”
“음...”
살짝 긴장한 아드리안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 떼의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는 정문 방향을 바라보았다.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압도하는, 새카만 인(人)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었다.
“저놈들이 그거 아닙니까? ‘동부 전선의 악마’라고 불리는...”
“... 그래 맞다.”
못다 한 아드리안의 말을 받아, 내가 마무리 지었다.
“저놈들이 바로, 암흑 기사단이다.”
암흑기사단(暗黑騎士團).
베겐스바흐 대공의 친위 기사단이자 북부 전선의 설원기사단, 왕도의 사자기사단과 함께 왕국 3대 기사단으로 꼽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이 싸우는 곳은 다름 아닌 동부 전선.
대륙 최강이라 불리는 제국을 상대해야 하는 무대였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제국군은 종교에 대한 광신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전장에 나서는 이들.
전장에서 흘린 피가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영광을 더해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눈이 뒤집혀 덤벼드는 제국의 병사들과 싸워야 하니, 자연스럽게 동부 전선을 지키는 베겐스바흐 대공령의 장병들 역시 독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암흑기사단의 단원들은 그 독한 대공령의 장병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독종(毒種)들로 유명했다.
“암흑기사단 놈들, 듣자 하니 완전히 미친놈들이라던데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카만 칠흑의 갑옷으로 무장한 암흑기사단의 모습을 보며 아드리안이 속삭이듯 말했다.
“어, 아예 뽑을 때부터 그런 놈들만 뽑는다더라. 싸움만 잘하면 인성이 어쨌건 과거가 어쨌건 상관 안 한다는데?”
“... 대공도 어지간한 양반이군요.”
암흑기사단은 베겐스바흐 대공이 제국의 광신도들을 제압하기 위해 공들여 만든 일종의 특수목적부대였다.
그들은 적을 상대할 때 어마어마하게 잔혹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진 상대를 난도질하여 시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게 훼손하거나 자신이 죽인 제국군 병사의 코와 귀를 잘라 허리춤에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등 온갖 기행들을 저질렀다.
적들은 물론이고 같은 편조차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행동들.
전장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모습은 분명 문제의 소지가 있었지만, 효과만큼은 확실했다.
암흑기사단과 맞붙었던 제국의 병사 중 상당수가 종교적 믿음을 저버리고 도망칠 정도였으니까.
기사도(騎士道)는 개나 줘버리고 오로지 살육만을 위해 길러진 전쟁 병기들.
그것이 바로 베겐스바흐 대공의 친위대, 암흑기사단의 실체였다.
“영주님. 저기...”
“그래, 보인다.”
암흑기사단이 만들어낸 새카만 칠흑의 물결 속, 홀로 고고히 빛나는 한 사람.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암흑기사단의 부하들과 달리 화려하게 치장된 황금빛 갑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그 갑옷은 때마침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한낮의 태양을 받아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황금빛을 뿌리는 신의 사자가 지상에 강림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러서라!!! 동부 전선의 수호자이시자 왕실의 큰 어른이신 베겐스바흐 대공 전하의 행차이시다!!!”
이미 암흑기사단의 등장만으로 겁에 질린 사람들이 옆으로 물러선 터라 왕성까지 가는 길은 훤히 트여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행렬의 앞뒤에 선 병사들은 쉬지 않고 대공의 이름을 외쳤다.
마치 이 이름을 기억하라는 듯이.
이토록 건장한 기사단의 한 가운데 서서,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던 저 사내의 위엄 어린 순간을 잊지 말라는 듯이.
“소리 엄청 지르네요. 시끄럽게.”
그런 병사들의 행동이 못마땅하다는 듯 아드리안이 한마디를 내뱉었는데, 그 목소리가 그리 작지 않았는지 주변의 몇몇 사람들이 우리를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야, 목소리 죽여라. 괜히 소란피우지 말고.”
“어, 읏! 죄송합니다.”
내 한 마디에 곧바로 쭈그러든 자라목이 된 아드리안이 곧바로 목소리를 내리깐다.
“그나저나, 저 황금 갑옷은 진짜 과하네요. 국왕 폐하도 저런 건 안 입으실 것 같은데...”
“일부러 입고 온 거겠지.”
“일부러... 말입니까?”
“그래. 저 봐라, 얼마나 눈에 띄는 옷차림이냐? 주변은 다 시커먼 놈들밖에 없는데, 혼자 저렇게 번쩍거리는 황금 갑옷을 입고 있잖아.”
“확실히, 눈에 띄긴 하네요.”
“완벽하게 의도된 거다. 아마 머리 위에서 해가 내리쬐는 시간을 계산해서 들어온 거겠지.”
“엇? 그건 몰랐습니다.”
내 설명을 들고 깜짝 놀란 아드리안이 대공의 머리 위에 떠 있는 한낮의 태양을 바라보았다.
“허어, 진짜네요. 완전히 머리 위에 해가 떠 있습니다.”
“그래.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대공을 저 모습으로 기억할 거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서 있는 곳을 지나쳐 멀찌감치 나아가는 대공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말했다.
“... 사람들은 말하겠지. 대공이, 왕의 자리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
아버지의 죽음으로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른 나이 열한 살의 어린 소년과 십수 년간 거칠고 거친 동부 전선을 지키며 제국의 침략을 막아온 올해 나이 마흔한 살의 전쟁영웅.
심지어, 두 사람 모두 왕가의 핏줄을 이은 인물이다.
과연 둘 중에 누가 더 왕국의 옥좌에 어울리는 존재인가?
그동안 풍문으로만 듣던 동부 전선의 수호자, 베겐스바흐 대공이 왕도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그동안 모두가 쉬쉬했던 오랜 의문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보니까 베겐스바흐 대공이 인물은 인물이더만?”
“어어, 자네도 봤어?”
“봤지. 그렇게 떠들썩하게 큰길을 따라 들어오는데 어떻게 못 보나?”
“대단하긴 하더라. 사람 자체가 풍기는 분위기가 있잖아? 확실히 큰 사람이라는 느낌이 와.”
“입고 있는 갑옷도 어마어마하던데? 황금빛이 번쩍번쩍한 게... 어휴!”
베겐스바흐 대공의 노림수는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일된 복색으로 새카맣게 차려입은 암흑기사단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왕도에 들어선 베겐스바흐 대공.
정오의 태양 아래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 갑옷을 걸치고 왕성을 향해 당당하게 행진하는 그의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왕도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홀려버리고 말았다.
“하긴... 대공이 그 빡센 동부 전선에서 벌써 몇 년을 버텼나? 다른 곳도 아니고 그 흉악한 제국 이교도 놈들 상대로 말이야.”
“정말 대단한 거지. 하긴 그런 능력이 있으니 전대 국왕 폐하께서도 동생한테 대공 작위를 줘서 하얀 산맥 너머를 부탁한 게 아니냐, 이 말이야!”
대공에 대한 사람들의 고평가는 자연스럽게 왕위를 이어받은 현 국왕, 요제프 3세에 대한 저평가로 이어졌다.
“크흠, 그거에 비하면 요제프 왕자 저하는...”
“에헤이! 왕자가 아니라 이제 국왕 폐하지! 아직 대관식만 안 치렀을 뿐 엄연히 왕권을 이어받으셨다고!”
“어어, 그래. 요제프 국왕 폐하 말이야. 솔직히 말하면 좀 그, 뭐랄까... 왕좌에 앉으시기엔...”
“부족하다?”
“아니 뭐, 그렇게 말하면 좀 그런데...”
“근데 그거야 뭐 아직 국왕 폐하가 나이가 어리시니, 어쩔 수 없지!”
“참나, 국왕 폐하 나이가 어리면 동쪽 이교도 놈들이랑 북쪽에 야만족 놈들이 쳐들어오려다가 봐주기라도 한다는 소리야?”
“그건 맞지. 나이가 어리다고 봐주는 건 우리처럼 별 볼 일 없는 놈들끼리나 그러는 거고, 한 나라의 국왕 자리에 앉은 사람이 그래서야 쓰나!”
새로운 국왕 요제프 3세를 따르는 근왕파의 입장에선 여러모로 불온하다고 칭할 수 있을 분위기가 왕도의 민심을 흔들고 있던 그때.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 베겐스바흐 대공은 왕국의 새로운 주인과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
“... 신의 축복을 받은 땅, 펠리노어의 온당하신 주인 요제프 3세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왕실 예법에 나와 있는 그대로, 옥좌 위에 앉은 국왕 요제프 3세에게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인사말을 전한 베겐스바흐 대공, 루트비히 베르너 이그나티우스 폰 펠린느(Ludwig Werner Ignatius von Felline).
다른 귀족들이라면 당연히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닿을 듯 고개를 깊이 숙였겠지만, 높디높은 대공(大公)의 지위를 지닌 그는 왕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을 자격이 있었다.
그가 아래로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특유의 오만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숙부! 대체 이게 몇 년 만인지... 실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옥좌 위에 앉아 있던 소년이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말한다.
허나 그의 말을 들은 주변 사람들의 얼굴엔 당황의 빛이 스쳤다.
현재 요제프는 ‘루트비히의 조카’가 아닌 펠리노어 왕국 군주의 신분으로서 이 장소에 나와 있었다.
그러하니, 당연히 루트비히에 대한 첫 호칭은 ‘숙부’가 아니라 ‘베겐스바흐 대공’이라 해야 옳았다.
하지만 아직 국왕이라는 무거운 책임에 대해 확실히 자각하지 못한 이 열한 살의 소년은 그저 오랜만에 본 숙부의 얼굴이 반가울 뿐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아직까진 잔혹한 이교도 제국 놈들의 창검에 찔려 죽지 않고 멀쩡히 살아 있사옵니다.”
“...!”
곧 이어진 루트비히의 대답에, 그 밝았던 소년왕의 얼굴은 놀라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만다.
안부 인사를 전하는 국왕의 앞에서 꺼내놓기엔 너무나 부적절한 대답이었다.
“대공! 국왕 폐하의 앞에서 그 무슨 흉험한 언사이십니까? 말을 가려 하십시오!”
왕의 옥좌 바로 옆, 한 계단 낮은 곳에 앉아 있던 국왕의 어머니 카넬리아 왕비가 호통을 쳤다.
허나 루트비히 대공은 그런 왕비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에 선선한 미소까지 띄워가며 이렇게 답할 뿐이었다.
“아, 그렇습니까? 이게 흉험한 언사였군요. 저 멀리, 하얀 산맥 너머의 땅에선 그다지 험할 것도 없는 표현인지라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노한 왕비가 뭐라 더 말을 꺼내려 했지만, 루트비히의 말이 더 빨랐다.
“간악한 제국 이교도 놈들의 악에 받친 괴성과 칼부림이 먼 나라 얘기처럼 여겨지는 이곳 왕도에선 이 정도 말이 험하게 여겨지는가 봅니다.”
“뭐라고요?”
“하긴, 왕도의 평화가 길긴 길었지요. 돌아가신 하인리히 4세, 우리 존귀하신 형님 폐하께서 워낙 선정(善政)을 베푸신 덕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대공!!!”
자신을 부르는 왕비의 노한 목소리를 못들은 체하며 고개를 돌린 루트비히가 이번엔 자신의 조카, 소년왕 요제프와 눈을 마주쳤다.
“허나 폐하, 이 못 배워먹은 숙부의 말씀을 기억해주십시오. 무릇 한 나라의 군주란, 저 대장간 화로 속의 달궈진 쇳덩이처럼 타오르는 불길을 견뎌내고 수백, 수천 번의 망치질을 버텨낼 강인함을 갖추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연약하게만 자라나서는 왕국민의 어버이가 될 수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며, 명심하겠습니다.”
어느새 루트비히의 기세에 압도되어 버린 옥좌 위의 소년이 입술을 떨며 대답했다.
마치 말 잘 듣는 한 마리의 순한 양을 보는 듯한 그 모습에 루트비히의 입술이 기이하게 뒤틀린다.
그것은 조카를 바라보는 숙부의 인자한 미소 같기도 하고, 왕을 바라보는 찬탈자의 비웃음 같기도 했다.
“... 제가 워낙 먼 길을 달려온 터라, 여독이 풀리지 않아 무척 피곤하군요. 그럼, 이만 물러가 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폐하?”
“어, 으... 그, 그리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폐하. 그럼 저는 이만...”
그렇게, 국왕의 허락 아닌 허락을 받은 루트비히가 고개를 까닥이는 것으로 왕에 대한 인사를 끝마친 채 뒤로 돌아섰다.
터벅, 터벅, 터벅-
죽음 같은 침묵이 내려앉은 대전에 루트비히의 발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