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자들 (1)
왕도(王都) 카를리온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세상을 떠난 선왕 하인리히 4세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뒤를 이은 새로운 군주 요제프 3세를 굳건히 떠받치리라 맹세했던 왕국의 봉신(封臣)들.
하지만 아직은 어리고 미숙한 국왕 요제프 3세의 숙부이자 동부 전선의 전쟁영웅인 베겐스바흐 대공이 왕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일전의 맹세는 잊힌 옛일이 되고 말았다.
“대공 전하께서야 말로 진정한 왕의 기상을 타고 나신 분입니다!”
“왕좌의 주인이 잘못 정해진 것이 아닙니까?! 저 악랄한 제국 이교도 놈들의 침략으로부터 몇 번이고 왕국을 구해낸 영웅께서 계신데... 허어!”
“인품으로 보나 가진 바 능력으로 보나, 대공 전하께서 선왕의 뒤를 이어 왕국을 이끄시는 것이 옳은 이치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매일 같이 대공이 머무는 왕성 밖의 저택을 찾아와 아부의 말을 늘어놓는 봉신들.
같은 목적으로 찾아오는 이들이 워낙 많다 보니, 몇몇 이들은 대공의 눈에 들기 위해서 위험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국왕 폐하의 성산(聖算, 왕의 나이)이 올해 몇입니까? 이제 겨우 열하나가 되셨습니다. 위로는 야만족 놈들이 호시탐탐 장벽을 넘으려 들고, 악마 같은 제국 놈들이 하얀 산맥 너머 왕국의 옥토를 노리고 있는데, 세상 경험 없는 어린 소년이 옥좌 올라 있으니... 이미 왕국은 위기입니다!”
“전하, 왕국의 가엾은 신민들을 위해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전하께서 가시는 길 가장 앞쪽에 제가 있을 것입니다!”
“저 또한 미력하게나마 뒤를 받치겠습니다! 전하의 깃발 아래에서 종군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전하, 부디 결단을!!!”
근왕파의 충신들이 듣는다면 피가 거꾸로 솟을 만한 참람된 발언들이 연이어 흘러나온다.
봉신의 맹세를 저버리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변절자들의 향연(饗宴).
새로운 왕이 보위에 오른 지금, 가장 단단해야 할 왕도의 심장부에서 균열의 전조가 나타나고 있었다.
***
“그대, 하인리히의 아들 요제프는 위로는 주신 아르닌을 섬기고 아래로는 왕국의 신민들을 보살피며...”
왕도에 자리한 카를리온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열린 요제프 3세의 대관식.
계단 위, 진홍빛 수단을 차려입은 추기경이 엄숙한 목소리로 준비했던 발언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그 아래 무릎을 꿇고 얌전히 앉아 있는 어린 소년,
펠리노어 왕국의 39대 국왕, 요제프 레나투스 피오 카를 폰 펠린느(Joseph Renatus Pius Karl von Felline).
안 그래도 하얗던 피부가 긴장으로 인해 더욱 창백해 보였다.
“... 주 아르닌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펠리노어 왕국의 왕관을 허락한다.”
마침내, 추기경의 손을 떠난 왕관이 어린 소년왕의 머리에 얹힌다.
아직은 체구가 작은 요제프를 위해 특별히 작게 줄여서 만든 왕관이었다.
“요제프 국왕 폐하 만세! 펠리노어 왕국 만세에에에에!!!”
왕관이 제 자리를 찾기가 무섭게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왕가의 가신들이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왕국의 주인이 누구인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라는 듯한 외침이었다.
한편, 대관식에 참석해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창백한 얼굴로 미리 마련된 옥좌에 오르는 국왕의 모습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툭 감상을 내뱉었다.
“폐하께서... 체구가 많이 작으시군.”
“그러게요. 나이가 아직 어리신 걸 감안해도...”
아드리안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다 주변의 시선을 느끼고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귀족의 신분인 나와 달리 고작 기사 나부랭이(?)였으니, 발언에 조금 더 신경을 쓰는 것이겠지.
“같은 핏줄이라 그런가, 대공도 그리 덩치가 크진 않던데.”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대관식 내빈석의 가장 앞줄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정면의 어린 조카를 응시하는 베겐스바흐 대공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게요. 저는 실제로 보기 전까진 대공이 막 덩치도 집채만 하고 팔다리 근육도 우람한 장수 체형인 줄 알았습니다.”
“그럴 만하지. 사람들이 대공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이 ‘동부 전선을 지켜낸 영웅’으로서의 명성이니까.”
“예, 맞습니다. 저도 그래서 기골이 장대한 사람인 줄 알았죠.”
아드리안의 경우처럼 사람들은 대공이 지닌 전쟁영웅으로서의 명성을 생각해 그를 으리으리한 체구를 지닌 거구의 사내로 오해하곤 했다.
하지만 베겐스바흐 대공은 그 나이 또래의 평범한 사내들과 비슷한 체구를 지닌 인물이었다.
평범한 키에 덩치도 딱히 크다고 볼 수 없었고, 푸근하고 선한 인상으로 유명했던 형 하인리히 4세와 달리 외모 또한 볼품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섬뜩하리만큼 강렬한 눈빛만큼은 앞선 외모적 부족함을 모두 압도해버릴 수준이었으니...
그것이 태생적으로 타고난 안광(眼光)인지 아니면 그가 살아온 인생이 빚어낸 후천적 결과물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건 그 눈빛 하나만으로도 대공이 비범한 인물로서의 분위기를 풍겨내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아무튼, 이제 대관식도 끝났으니 더 정신없어질 거다.”
“각오 단단히 하겠습니다.”
믿음직스럽게 대답하는 아드리안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옥좌 위의 소년왕을 바라보았다.
“... 주 아르닌이시여, 왕국을 보호하소서...!”
주신 아르닌이 자신의 어린 양에게 어떤 대답을 내어놓을지, 아직은 그 무엇도 알 수가 없었다.
***
“... 여기 있는 이름들이 아직까지 왕도에 남아 있는 귀족들인가?”
“예, 그렇습니다.”
“흐음...”
부하가 전한 보고서의 내용을 진중한 눈빛으로 살피는 왕국의 군무대신 트리틴 알트마이어.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그는 베겐스바흐 대공이 왕위에 오르길 바라는 대공파(大公派)의 인물 중 하나였다.
그가 왕국의 군무대신 자리에 오른 수년 전, 측근을 통해 은밀히 전해진 연락.
그것은 바로 왕실의 그늘을 벗어나 대공의 깃발을 따르라는 제안이었고, 트리틴은 고심 끝에 그 검은 손을 잡기로 마음먹는다.
‘... 우리 알트마이어가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평생토록 왕실에 충성을 바치리라 맹세했던 안스바흐 남작, 트리틴 알트마이어의 마음을 움직인 대공의 결정적 제안.
그것은 바로, 안스바흐 영지를 백작령(伯爵領)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이백여 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는 충성을 바친 우리 가문에게, 대체 왕실은 뭘 해줬단 말인가?’
평소 자신의 가문을 대하는 펠린느 왕가의 태도가 부당하다고 생각한 트리틴.
대공의 제안은 그런 트리틴의 불만스러운 마음을 정확하게 파고든 것이었다.
‘이제 알트마이어의 이름 앞엔 백작가라는 호칭이 붙게 될 것이다.’
상상만 해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은인자중하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요즘이었다.
“... 일단 알았다. 나가보아라.”
“예, 군무대신 각하.”
보고서를 가져온 부하를 자신의 방에서 내보낸 뒤, 트리틴은 긴장으로 바싹 마른 입가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발 담그고 있는 일이 일인만큼 요즘 매일매일을 긴장 속에 사는 그였다.
“거의 다 정리됐는데...”
그가 대공 측에게 받은 명령은 선왕 하인리히 4세의 장례식과 현 국왕 요제프 3세의 대관식 참석을 위해 왕도에 모였던 왕국의 봉신들을 모두 자신들의 영지로 돌려보내라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봉신 귀족 그 자체라기보단 그들이 데려온 휘하 병력을 왕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거사(巨事)의 그 날, 혹시라도 계획에 변수로 작용할지 모를 일체의 가능성을 없애려는 대공 측의 의도였다.
하여 트리틴은 군무대신의 권한을 이용해 왕도에 온 모든 봉신 귀족들에게 요제프 3세의 대관식이 마무리된 후 일주일 내에 왕도를 떠날 것을 통보했다.
대공파에 속한 귀족들이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기한 내에 왕도를 빠져나갔다.
개중에 몇몇 눈치 없는 이들이 남아 있겠다며 어깃장을 부렸으나, 곧 전해진 대공 측의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왕도 밖으로 몸을 빼냈다.
왕도 내에 감도는 불순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소수의 중도파 귀족들은 오래 비워둔 영지의 관리를 위해 서둘러 자신들의 근거지로 돌아갔다.
한편, 근왕파에 속한 귀족들은 최대한 왕도에 오래 머물며 혹시 모를 변고에 대비코자 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로서도 군무대신 트리틴이 내민 ‘왕도의 치안 안정’이란 명분 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왕도에 집결했던 수많은 봉신 귀족들이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군무대신인 트리틴의 영향력을 벗어난 이들뿐이었다.
우선 왕실의 큰 어른이자 국왕의 숙부이기도 한 베겐스바흐 대공.
국왕과 같은 펠린느 왕가의 피가 흐르는 그이기에, 왕도에 남아 있을 명분이 충분했다.
두 번째로 왕실의 외척인 루덴도르프 변경백.
왕국 유일의 변경백이자 현 국왕의 외숙이 되는 그 역시 왕도에 머물 자격이 있었다.
근왕파와 대공파라는, 왕국을 양분하는 두 정치 세력의 수장들이 왕도에 남게 된 것이다.
“근데... 이 새끼는 대체 뭐야?”
앞선 두 사람과 달리 트리틴의 입장에서 영 납득가지 않는 이름이 보고서 위에 올라 있었다.
[다닐렌츠 남작 데미언 카릴베르크가 아직 왕도에 머물고 있음]
이름은 많이 들어봤다.
지난 몇 해 동안 역사에 길이 남을 정도의 무서운 성장을 이뤄낸 왕국 북서부 변방의 영지, 다닐렌츠를 이끄는 젊은 영주.
한 해 전엔 왕국의 주요 대귀족 중 하나인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사위가 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트리틴은 그런 다닐렌츠 남작을 그리 크게 보지 않았다.
그저, 영지 내에서 발견된 소금 광산과 철광산이라는 행운에 힘입어 분에 넘치는 관심을 받게 된 애송이라 여겼다.
“스물셋이라고 했던가? 하, 제 잔에 들어 있는 게 오줌인지 와인인지도 구별 못 할 나이인 것을...”
그런 녀석이 감히 군무 대신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왕도에 머물고 있었다.
그가 대체 뭘 믿고 이렇게 뻗대는 것인지, 대충 알 것 같아서 더욱 노여움이 치미는 트리틴이었다.
“장인의 배경을 믿고 건방을 떠는 것이겠지... 하!”
비단 이번 일 때문이 아니어도 평소 바이펠베르크 백작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트리틴이다.
왕도와 왕실직할령, 이른바 ‘카를란트’의 모든 군사적 업무를 총괄하는 막강한 권한을 지닌 군무 대신 트리틴.
허나 그런 그의 통제를 벗어난 병력이 딱 둘 있었는데, 하나는 사자기사단이었고 다른 하나는 왕실근위대였다.
사자기사단이야 그 성격 자체가 국왕의 명령에 죽고 사는 국왕친위대(國王親衛隊)이기에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왕실근위대는 분명 편제상 군무 대신의 휘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조직이었다.
서로의 의견이 엇갈릴 때마다 왕실근위대장인 바이펠베르크 백작은 국왕 폐하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앞세워 자신의 지휘를 번번이 거부했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쌓여온 백작과의 악감정.
이제는 하다하다 그 사위라는 놈마저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꼴을 보이니, 트리틴의 속이 뒤집어질 수 밖에.
“... 오냐, 그 사위 놈의 목은 얼마나 뻣뻣한지 내 직접 확인해주마.”
마음의 결정을 내린 트리틴이 큰 목소리로 방밖에 대기 중인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기병대를 준비해라. 내 직접 그 건방진 놈을 왕도 바깥으로 쫓아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