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자들 (4)
내가 장인어른의 자리를 이어받기로 했다지만, 사실 왕실근위대장이란 직위가 어디 공사장 막노동꾼도 아니고 마음만 먹었다고 냉큼 차지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이래저래 실무적으로 준비할 것이 많았고, 무엇보다 왕실근위대장의 인사권자인 국왕의 재가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국왕의 재가를 받는다는 건, 이제 막 왕위에 오른 어린 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는 왕의 어머니, 즉 대비(大妃)를 설득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국왕 요제프 3세의 어머니이자 사망한 선왕(先王) 하인리히 4세의 아내, 카넬리아 루덴도르프 폰 펠린느.
그녀는 카를란트 북부를 통칭하는 노르트란트(Nordland)의 맹주이자 ‘왕국의 방패’라 불리는 왕국 최고의 명문 (武家)인 루덴도르프의 핏줄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어야 할 가문은 기본적으로 왕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여 현실적으로 그녀가 가장 의지하는 사람은 남편 하인리히 4세의 둘도 없는 충신이자 오랜 벗이었던 나의 장인어른, 왕실근위대장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인어른이 왕실근위대장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낸다?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물론, 장인어른이 다 필요 없으니 때려치우고 자신의 영지로 내려가겠다고 나오면 그만둘 수야 있겠지.
하지만 장인어른 성품에 그럴 일은 없으니 적어도 몇 달은 대비를 설득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 그러니, 일단 자네는 영지로 돌아가 할 일을 하며 연락을 기다리고 있게나.”
“하지만...”
“어허, 걱정하지 말래도. 왕도의 일은 왕도의 이들에게 맡겨두고, 자네는 자네의 일을 하면 되네.”
“... 알겠습니다. 다닐렌츠로 돌아가서 연락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음, 그리하게. 내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연통을 넣겠네.”
“예, 아버님. 늘 건강 유의하십시오.”
***
내가 떠난 후, 왕도에 거주하는 귀족들을 중심으로 군무대신을 교체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누군가 물밑에서 목적을 지니고 사주한 것이 아니라, 쓰레기통에 파리 떼가 모이듯 자연스럽게 생겨난 흐름이었다.
“예전부터 군무대신이 자신의 권력을 남용한다는 이야기는 줄곧 있었습니다. 이번 다닐렌츠 남작과의 불미스러운 사건 역시 그 연장이겠지요.”
“군무대신이 어떤 자리입니까? 국왕 폐하께서 계신 카를란트의 군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이, 그 권력을 사적으로 휘두른다? 그게 말이나 됩니까?”
“군무대신 안스바흐 남작이 왕실근위대장이신 바이펠베르크 백작과 불편한 관계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군무대신과 충돌했던 다닐렌츠 남작은 왕실근위대장의 사위이지요. 벌써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기다렸다는 듯 몰려들어 군무대신 트리틴 알트마이어를 물어뜯는 승냥이 떼들.
그들의 의도는 명확했다.
‘이번 기회에 안스바흐 남작을 끌어내릴 수 있다면...’
‘군무대신 자리, 거기에 내가 앉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
‘흐흐, 왕국군에서 장장 30년을 복무한 이 몸이시다. 군무대신 자리가 공석이 된다면, 당연히 그건 내 차지가 되겠지!’
‘왕국의 대신이라니, 우리 가문에 그만한 경사가 또 없을 것이다!’
바로, 현 군무대신인 트리틴 알트마이어 남작을 실각시킨 뒤 생겨날 빈자리를 노리는 것이다.
대신(大臣)이란 어떤 자리인가?
그 무수히 많은 왕국의 가신 중 대신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는 이는 단 다섯뿐이었다.
전통적으로 신성교국에서 왕국으로 파견된 추기경이 겸임하는 법무대신(法務大臣).
왕도 카를리온을 포함해 왕실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는 직할령, 이른바 카를란트의 모든 군권을 총괄하는 군무대신(軍務大臣).
군무대신과 마찬가지로 카를란트 내부에서 이뤄지는 모든 경제적 활동을 관리하는 재무대신(財務大臣).
대륙의 자리한 다른 국가들과의 외교적 업무를 책임지는 외무대신(外務大臣).
그리고, 이 대신들을 이끄는 수장이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라 일컬어지는 재상(宰相)까지.
수백, 수천이 넘는 왕국의 가신들을 발아래 둔 관료제의 정점이 바로 대신이었다.
당연히 왕국의 대신에겐 어마어마한 권력이 약속되었고, 그를 이용해 다른 이들은 평생 꿈도 꾸지 못할 부와 명예를 손에 쥘 수도 있었다.
그러니, 왕도의 귀족들이 이토록 군무대신을 끌어내리려 열을 올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인어른께서 내게 말했던 ‘왕도의 일’.
권력에 눈먼 자들이 한데 엉켜 우글거리는 왕도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
“드디어 다음 달이면 완공이네요. 처음엔 저거 언제 다 짓나 했는데...”
“음, 그래. 진짜 다 만들었네.”
다시 돌아온 나의 집, 다닐렌츠의 주도 키르헨의 영주 저택.
나는 아드리안과 함께 집무실 창문 밖, 이제 거의 완성 직전에 이른 영주성의 웅장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장 3년에 걸쳐 천천히 쌓아 올린 다닐렌츠 영주성.
왕국 각지에서 모셔온 각 분야의 장인(匠人)들이 제한 없는 예산을 허락받고 지어낸 건물답게, 미적으로나 실용적으로나 흠잡을 곳이 없는 멋진 성이었다.
“후우... 보기만 해도 배가 부릅니다.”
“응? 내 집인데 왜 네가 배가 불러?”
내가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섭섭해진다.
“아니, 성이 저렇게 큰데... 제 방도 하나쯤 주실 것 아닙니까?”
“응? 네가 왜 저길 들어와? 네가 집이 없냐 돈이 없냐?”
“와... 진짜 섭섭합니다, 영주님!”
늘 반응이 좋아서 놀리는 맛이 있는 아드리안이었다.
“자, 이거.”
“...?”
“뭐해, 받아.”
“이... 이게 뭡니까?”
“뜯어서 확인해 봐.”
“아니... 이거 진짜 뜯습니까?”
“뜯어. 뜯으라고 준 건데 안 뜯냐 그럼?”
“어, 음... 알겠습니다.”
내가 아드리안에게 건넨 것은 두툼한 종이 두루마리였다.
종이 끝부분에 떨어뜨린 붉은색의 촛농으로 봉인(封印)한 두루마리.
아드리안은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영주의 문장이 찍힌 그 봉인을 뜯어 두루마리를 펼쳤다.
“헉!”
그 안에 쓰인 내용을 확인한 아드리안이 깜짝 놀라 헛바람을 집어삼킨다.
“아니... 이, 이게 뭡니까, 영주님?”
“뭘 그렇게 놀라? 이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아니, 이게 대단한 게 아니면 뭡니까?”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나와 달리 연신 격한 반응을 보이는 아드리안이었다.
“다른 사람은 총독에 시장에, 으리으리한 거 시켜주는데 너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일단 그거라도 받아. 나중에 더 챙겨줄게.”
“아니, 나중엔 뭘 더 대단할 거를 챙겨주시려고 그러십니까?”
내가 아드리안에게 선물한 것은, 주도 키르헨 근방에 지어진 저택 하나와 그에 딸린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담은 증서였다.
한데, 그 토지의 크기가 좀 많이 컸다.
“토지에 포함된 마을이... 세 개?”
영주가 휘하 봉신 기사에게 식읍의 개념으로 내리는 장원(莊園)은 마을 하나 정도를 끼고 있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드리안에게 내린 장원은 무려 세 개의 마을을 포함한 막대한 넓이를 자랑했으니...
당연히 그에 딸린 저택도 보통 기사들이 받는 크기를 아득히 초월한 수준이었다.
“너한테 준 저택, 저 영주성 지은 장인들한테 부탁해서 따로 지은 거야. 신축 건물이라는 얘기지.”
“영주님...”
내가 준비한 깜짝 선물에 감격한 아드리안이 말끝을 흐린다.
새끼, 저러다 울겠네, 울겠어.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괜히 영지 재정에 부담을 준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아이고, 쓸데없는 소리. 우리 다닐렌츠가 너한테 챙겨줬다고 문제 생길 정도로 허술한 살림살이냐?”
내 입에서 나온 말처럼, 현재 우리 영지의 재정 상황은 봉신 기사에게 마을 서너 개 정도 떼어준다고 해서 문제가 생길 정도로 허술하지 않았다.
영지 북부 나움가르트에서 매일 같이 캐내는 철광석과 암염.
다닐렌츠의 너른 평야 지대에서 수확한 막대한 양의 밀과 보리.
그리고 여전히 준수한 생산량을 자랑하는 몬스터 가죽까지.
팔아먹을 것이 넘쳐나는 다닐렌츠 상단의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었고, 이제 왕국 북서부 지역을 넘어 왕국 전체 상권으로 놓고 보아도 무시 못 할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남부 최대의 도시 카르셀에 자리한 초호화 도박장 ‘슐로스’에서는 거의 돈이 ‘복사가 되는 수준’으로 수익이 쏟아지고 있었다.
뿐인가, <로스트 킹덤> 세계관 최고 수준의 능력을 갖춘 캐릭터, 파스칼 긴터를 포함한 유능한 가신들의 노력으로 영지민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세수(稅收) 또한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대책 없이 무작정 인구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제도를 통해 새로이 영지에 정착한 사람들의 수를 정확히 파악하고, 적당한 수준의 세금을 부과한 덕분이었다.
덕분에 우리 다닐렌츠는 ‘소금 전쟁’으로 흡수한 바렌부르크, 루테니아 지역을 모두 합쳐 왕국 내에서 경제력으로 손꼽히는 수준의 영지가 되었다.
내가 다스리는 마을의 개수만 해도 수십 개가 되었으니, 아드리안에게 달랑 세 개 떼어준다고 해봤자 티도 나지 않을 것이다.
“더 좋은 건, 영주인 내가 자리를 비워도 아무 문제가 없을 만큼 영지의 경영구조가 탄탄한 상황이 되었다는 거야.”
“하하, 맞습니다. 특히 니나 아가씨의 공이 큽니다.”
“그래. 내가 뭐랬어? 니나, 엄청 잘할 거라고 했잖아.”
내가 왕도 카를리온에 가 있는 동안 나를 대신해 영주 대리로서의 임무를 맡았던 여동생 니나.
니나는 행정관 세르지오, 재무관 파스칼, 군무관 발터의 도움을 받아 훌륭하게 영주 대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하긴... 니나가 잘 하는 게 당연한 건가?’
원작에선 영주의 여동생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영주가 되어 다닐렌츠를 왕국 제일의 영지로 부흥시킨 니나였다.
다닐렌츠 영주가 된 뒤 내가 한 일은 그저 원작의 니나가 했던 것들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었을 뿐.
즉, 니나는 내가 따로 뭘 가르치지 않아도 이미 훌륭한 영주가 될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 녀석에게 처음부터 밥을 지어 먹으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다 갖춰 놓은 밥상에서 밥만 맛있게 떠먹는 임무를 시켰으니, 식은 죽 먹기일 수밖에.
“이제 장인어른께 연락이 오면 안심하고 왕도로 내려가도 되겠어. 니나가 있으니까.”
“... 그 자리, 정말 하시는 겁니까?”
“응, 하겠다고 했으니 해야지.”
나를 바라보는 아드리안의 눈빛이 조심스럽다.
녀석이 언급한 ‘그 자리’.
바로 차기 왕실근위대장의 자리였다.
‘선왕인 하인리히 4세의 죽음이 내가 아는 원작의 흐름보다 몇 달 빨리 일어났다.’
그렇다면, 문제의 그 사건도 원작보다 훨씬 빨리 일어나게 되는 게 아닐까?
아니, 거의 확실할 것이다.
심지어 원작에서 대공파의 한 축으로서 큰 역할을 담당했던 군무대신이 나와의 충돌로 인해 실각 위기에 처했으니...
‘... 대공의 입장에선 서둘러 계획을 진행하려고 하겠지. 아니면 아예 계획을 몇 년 미루거나.’
후자라면 몰라도, 대공이 전자를 선택했다면 일이 급박해진다.
‘그러니, 그 달라진 역사의 흐름이 빨리 대처하기 위해 내가 왕도로 가야 한다.’
원작 소설 <로스트 킹덤>에서, 왕권을 노린 베겐스바흐 대공과 그의 추종자들이 일으킨 끔찍한 사건.
‘창검(槍劍)의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