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47화 (147/197)

뜻밖의 전개 (1)

다닐렌츠로 돌아간 내가 정신없이 영지 관리에 힘쓰고 있던 그 시각.

왕국의 심장부, 왕도 카를리온에선 가히 파격이라 불러 마땅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최근 군무대신으로서의 권한을 사적인 목적으로 활용하여 왕실의 명예를 실추시킨 죄를 물어, 군무대신 안스바흐 남작, 트리틴 알트마이어를 파직토록 한다.”

국왕 요제프 3세의 이름으로 내려진 어명(御命).

내가 판 함정에 빠져 섣부르게 왕도의 군사를 움직였던 트리틴 알트마이어는 결국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군무대신의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군무대신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 것은 모두가 예상했던 결과이기에 딱히 파격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의 일이 아니었다.

왕도의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준 진정한 파격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무릇 군무대신이란 수십만 카를란트 신민들을 외적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내는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자리인바, 그 임무의 무게를 생각했을 때 한시도 비워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선왕께서 갑작스레 붕어(崩御)하시고 요제프 왕자께서 새로이 왕국의 군주로 즉위하시어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노력하고 계시나, 아직 어버이를 잃은 왕국의 슬픔과 혼란은 가시지 않은 시기다.”

“이런 시기에 왕국의 수호(守護)를 책임지는 군무대신의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는 법.”

“하여, 현 북부 전선 총사령관인 라이에른-팔츠 변경백 파울 루덴도르프에게 군무대신의 중임을 맡기어 수행토록 할 것이다.”

트리틴 알트마이어 남작의 파직과 동시에 이루어진 신임 군무대신의 임명.

국왕의 이 같은 결정에 공석이 된 군무대신의 자리를 노리던 수많은 이들이 할 말을 잃어버렸다.

뭐라 반박할 여지가 없는, 실로 완벽한 인선이었기 때문이다.

“... 허, 라이에른-팔츠 변경백이 군무대신 자리로 갈 줄이야.”

“나름 묘수가 아닌가 싶은데? 라이에른-팔츠 변경백이야 사적으로는 대비 마마의 오라비이니, 그만큼 펠린느 왕실에 충성을 다하는 이가 또 있겠나?”

“그건 맞지. 국왕 폐하가 변경백에겐 조카가 되니까 말이야. 집안 어른이 지켜주는 그림이 되니 실로 든든한 게지.”

“집안 어른이어서 든든하다라... 그렇게 따지면, 베겐스바흐 대공은 뭐 집안 어른이 아닌가?”

“엇, 그건 또 그렇네?”

“참 웃기는 일이지. 라이에른-팔츠 변경백은 폐하의 외숙부, 베겐스바흐 대공은 숙부인데... 두 집안 어른의 느낌이 이렇게나 다를 수가 있나?”

“그러게 말이야. 외숙부는 왕실의 수호자, 숙부는 왕위를 노리는 찬탈자 느낌이니.”

“에이, 설마 대공이 정말로 왕위에 욕심을 낼까? 이미 하얀 산맥 너머에선 왕처럼 군림한다던데...”

“왕처럼 군림하는 거랑 진짜 왕이 되어 군림하는 건 완전히 다른 거지. 모르긴 몰라도 몇 년 안에 뭔 사달이 나도 나지 싶은데...”

“허허, 그나저나 군무대신 자리를 노리던 사람들만 새 됐네. 내가 아는 왕도의 귀족들만 해도 서너 명은 됐었는데...”

“그러게 말이야. 이번 결정에 어느 누가 불만을 제기할 수 있겠나?”

개인의 실력으로 보나, 가문의 위상으로 보나 라이에른-팔츠 변경백 이상 가는 후보자는 없었기에, 그의 군무대신 임명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설령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속을 삼키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아야 하겠지.

바로, 이들처럼.

***

왕도 카를리온 외곽에 자리한 베겐스바흐 대공의 저택.

그 역시도 펠린느 왕가의 피를 이은 왕족으로서 충분히 왕성에 머물 자격이 있는 대공이였지만, 그는 자신의 거처로 왕성이 아닌 이곳을 선택했다.

겉으로는 ‘폐하의 거처인 왕성에 자신이 머무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댔지만, 진짜 이유가 그게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대공이 왕성에 머물지 않는 이유.

그것은 매일 같이 그의 거처를 들락거리는 대공의 추종자들 때문이었다.

“전하! 어찌하여 이런 일이...”

“국왕파 놈들이 일부러 작당하여 알트마이어 남작을 찍어낸 것이 분명합니다!”

“맞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 자리에 라이에른-팔츠 변경백을 끼워 넣을 수 있단 말입니까?”

“파울 루덴도르프가 누굽니까? 바로 국왕파의 수장입니다! 애초에 알트마이어 남작을 군무대신 자리에서 밀어낸 것도, 그를 그 자리에 대신 앉히려는 수작이었겠지요.”

“하지만... 애초에 알트마이어 남작이 우리 쪽 인물이란 것이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어찌 알고 국왕파에서 냉큼 찍어낸다는 말입니까?”

“모를 것은 또 뭐요? 우리만큼이나 저쪽도 신경이 곤두서 있을 텐데, 사방에 첩자 놈들을 깔아두었을 터!”

“남작이 꼬리를 밟혔다는 얘긴가?”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겠소?”

“국왕파의 쥐새끼들... 이 기회에 첩자 놈들을 다 솎아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공 전하를 위한 우리의 계획에도 문제가 생길 겁니다!”

대공의 거처에 모인 대공파의 인물들은 최근 벌어진 군무대신 파직 사건에 대해 격렬한 토론을 나눴다.

그의 실각은 트리틴 알트마이어 남작이란 개인만의 비극이 아니었다.

그가 비밀리에 몸담고 있던 조직, 대공파가 꿈꾸고 있는 대계(大計)에 큰 지장을 줄만 한 사건이었던 것.

자신과 가문의 운명을 걸고 대공파라는 이름의 배에 올라탄 이들에겐 심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의 인과를 살펴보면, 알트마이어 남작의 실각이 딱히 국왕파 측의 농간에 의한 결과인가 싶은 생각은 드오.”

“어째서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까?”

“생각해보시오. 애초에 남작이 군무대신의 자리에서 파직을 당한 것은 무리한 사유를 들어 왕도수비군을 움직이고, 심지어 죄 없는 귀족을 공격했기 때문이었소. 이 과정에 국왕파가 끼어들 여지가 있소이까?”

“으음...”

모여 있던 사람 중 누군가가 군무대신의 실각은 트리틴 알트마이어 남작 본인의 책임이 크다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앞뒤 사정을 들어보니, 그 상대가... 이름이 뭐지? 다닐렌츠 남작이라고 했던가?”

“예, 다닐렌츠 남작이 맞습니다.”

“알트마이어 남작은 그 친구가 왕도 내 병력 소개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왕도수비군을 움직였던 것 같은데, 알고보니 소개령을 어긴 것도 아니었다는구려. 이게 뭐요? 그냥 남작이 무능했다는 얘기밖에 더 됩니까?”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일을 벌였다가 제 발등을 찍은 꼴이다?”

“바로 그렇지요. 뭐,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알트마이어 남작은 예전부터 좀 그런 면이 있었습니다. 성정이 거칠고, 신중하지가 못해요.”

“언제는 그런 덕에 사람이 추진력이 있고 과감하여 좋다고 말씀하셨으면서...”

“에헤이, 내가 또 언제 그런 말을 했소?”

권력이란 실로 무상한 것.

트리틴 알트마이어 남작이 군무대신의 자리에 올라 한창 세를 떨칠 때는 그를 칭찬하느라 열을 올리던 이들이 그가 실각하자 금세 태도를 바꾸어 그의 흉을 보기 시작했다.

“군무대신 씩이나 되어서 그렇게 성급하게 처신했으니, 당연히 탈이 날 수밖에요.”

“왜 아니겠습니까? 행동 하나, 말 하나에도 신중해야 할 사람이 그토록 엉덩이가 가벼워서야...”

“애초에 그 자리에는 왜 나간 걸까요? 차라리 부하들만 보낸 거였으면 ‘나는 몰랐다’ 하면서 꼬리라도 잘랐을 텐데 말입니다.”

“한 치 앞을 몰랐던 거지요. 하긴 뭐, 군무대신 자리에 오른 뒤 남작이 그런 행동을 한 게 한두 번입니까?”

“다닐렌츠 남작? 그 어린 친구가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사위라면서요? 그 사실이 알트마이어 남작의 눈을 뒤집히게 만든 게지요. 그 양반, 원래부터 바이펠베르크 백작에게 열등감이 있지 않았습니까?”

이들이 이토록 열심히 실각한 전(前) 군무대신을 비난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바로, 그가 대공파 내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자리를 노리는 것.

트리틴 알트마이어 남작은 왕도에서 암약 중인 대공파 귀족들 중 그 이름값 면에서 수위를 다투는 인물이었다.

그런 이가 하루아침에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으니, 대공파 내에서 그가 누리던 영향력을 뜯어먹으려는 승냥이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한편, 권력에 대한 아귀다툼으로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운 저택 1층과 달리, 2층은 한껏 차분한 분위기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2층 응접실에 ‘그’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번 일이 국왕파의 수작이라고 생각하나?”

상석에 앉아 호박색 위스키가 찰랑이는 유리잔을 들어 올리는 사나이.

분명 차분한 음색이었지만, 묘하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였다.

목소리만으로 듣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저택의 주인.

펠리노어 왕국의 유일무이한 대공(大公), 루트비히 베르너 이그나티우스 폰 펠린느(Ludwig Werner Ignatius von Felline).

그의 물음에 잔뜩 움츠러든 가신들의 모습이 안쓰럽게 보일 정도였다.

그중 하나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마른 침을 삼키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아무래도 정황상 그렇지 않나 생각합니다.”

“정황상? 그 정황이란 게 뭐지? 한번 설명해보겠나?”

“어, 음... 그게 그러니까...”

스르릉-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대공이 옆에 서 있던 호위 기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내어 말을 더듬던 가신의 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턱-

그리곤, 들고 있던 검을 그 가신의 어깨 위에 올렸다.

“어흐윽!”

날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냉병기 특유의 한기가 목 근처에서 느껴지자 가신의 입에서 비명이 터진다.

“설명하라. 어째서 이 일을 국왕파의 수작이라 생각하는지 말이야.”

“저, 저, 전하아... 제가 방금 한 말은 사실이 아니라 그저 추측한 것에 불과한...!”

“사실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럴듯한 얘기이기만 하면 돼. 내가 이야기를 듣고서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기만 하면 된다.”

대공의 목소리는 화가 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기대를 품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읽어낼 수 없는 무감정(無感情)의 목소리.

하지만 목덜미 옆에 검날을 걸친 가신은 이미 공포에 절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고, 결국 ‘사, 살려주십시오!’ 따위의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그 결과,

휘이잉- 촤아아악!!!

털썩!

가신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 사방을 붉게 물들인다.

하지만 정작 그 끔찍한 풍경을 만들어낸 장본인, 베겐스바흐 대공 루트비히는 여전히 무감정한 눈빛을 한 채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 치워라.”

“예, 전하.”

호위 기사의 손짓에 재빨리 달려온 병사들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머리와 여전히 온기가 느껴지는 시신을 치웠다.

이어 재빨리 달려온 저택의 하녀들이 바닥에 흐른 피를 닦기 시작한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 누구 하나 당황하지도, 놀라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 본래 군무대신이 하기로 했던 역할을 맡길 후보가 있나? 한번 말해봐라.”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대공이 위스키로 마른 목을 적시며 묻는다.

“왕도 내에 머무는 우리 쪽의 인물들이 몇 명 있으나, 군무대신 정도의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없습니다.”

“...”

대공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오랫동안 그를 모셔온 이 자리의 가신들은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분노(忿怒)다.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던 대공의 계획이 생각지도 못한 암초에 걸리게 된 상황.

방금 목이 잘려 주신의 곁으로 간 동료처럼, 자신도 그렇게 될까 싶어 장내의 모두가 입을 열지 못하고 있던 그때...

“저, 전하! 급보이옵니다!”

다급한 발걸음으로 돌계단을 뛰어올라 2층 응접실에 모습을 드러낸 한 병사가 들고 있던 종이쪽지를 대공의 호위 기사에게 넘겨 주었다.

그리고, 그 종이쪽지를 넘겨받은 대공.

그 안에 쓰인 내용을 확인한 대공의 눈빛이 변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닥친 위기의 순간을 벗어날 활로(活路)를 찾아낸 자의 눈빛이었다.

[... 국왕이 바이펠베르크 백작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의 왕실근위대장 사직 주청을 윤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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