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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48화 (148/197)

뜻밖의 전개 (2)

몇 달 전, 사위인 다닐렌츠 남작 데미언 카릴베르크와 차기 왕실근위대장 직위 수행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바이펠베르크 백작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는 그 즉시 국왕을 찾았다.

“폐하, 신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가 왕실근위대를 이끄는 막중한 책임을 받은 지도 어언 스무 해가 다 되어가옵니다. 선왕 폐하께서 한없이 부족한 저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푸시어...”

길고도 긴 이야기의 내용을 축약하면, 결국 왕실근위대장 노릇 그만하고 은퇴하겠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디트리히의 길고 긴 청을 들은 국왕 요제프 3세의 대답은,

“불가하오. 과인은 그대의 사직요청을 허할 수 없소.”

예상대로, 기각이었다.

하지만 어린 주군의 가차 없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 뒤로도 줄기차게, 디트리히는 국왕 폐하에게 사직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나 하기 싫으니 그만두게 해줘요!’라고 한 건 아니었다.

오랫동안 준비한 일이었던 만큼 갖다 붙일 명분도, 이유도 많았다.

하여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월요일 아침마다 정성 들여 사직을 청하는 상소문을 작성해 국왕에게 전했다.

그렇게 장장 백일, 그러니까 석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났을 때...

“하아... 그뢰네마이어 경, 정녕 제 곁을 떠나시겠다는 겁니까? 어째서 입니까?”

마침내 디트리히는 울먹이는 얼굴로 말을 건네는 소년왕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군신의 관계를 떠나 생각해본다면, 선왕 하인리히의 오랜 벗인 디트리히에게 지금의 국왕 요제프는 자신의 조카와도 같은 소년.

그렇기에 왕좌 위에서 울먹이는 국왕의 얼굴을 바라보는 게 쉽지 않았지만, 디트리히는 침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을 이어나갔다.

“폐하의 곁을 떠나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저 맡은 바 임무가 달라질 뿐, 이 디트리히는 언제나 폐하와 펠린느 왕실의 곁을 지킬 것입니다.”

“하지만... 경이 아니라면 대체 그 어떤 이가 무수한 적들의 칼날 아래서 이 부족함 많은 국왕의 목숨을 지켜낼 수 있겠습니까?”

디트리히는 너무나 유능한 왕실근위대장이었다.

왕실근위대장은 국왕을 포함한 왕족들을 적들의 ‘물리적’ 위협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직책이었다.

당연히 그 임무의 특성상 그 어떤 능력보다 무력이 중요한 자리였고, ‘왕국제일검’이라는 영광된 칭호의 주인인 디트리히는 그런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이였다.

한데 그런 이가 20년 가까이 별 탈 없이 지켜왔던 왕실근위대장의 자리에서 내려온다고 하니 국왕의 입장에선 두렵고 걱정될 수밖에.

하지만 디트리히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 그동안 아껴두었던 사직의 이유를 밝혔다.

“옛말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할 때는 주변 환경까지 모두 바꾸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 그렇다면, 경은 스스로를 헌 부대라 생각하는 것이오?”

“예, 그러하옵니다. 폐하께서도 선왕 폐하와 신이 그러했듯, 폐하와 함께 오랜 세월을 믿고 의지해나갈 폐하의 검을 벼려내셔야 합니다. 저는 선왕 폐하의 유산입니다. 새로이 찬란한 왕국의 역사를 만들어가실 요제프 3세 폐하의 곁에 두기엔 너무나 낡은 검이지요.”

“나의 검을, 벼려내라...”

국왕 요제프 3세가 디트리히의 말을 듣고 고민에 빠진다.

바로 그 순간,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다른 이가 나선다.

바로, 국왕의 어머니인 대비 카넬리아였다.

“... 디트리히 경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허나, 경도 잘 아시겠지요. 왕실근위대장의 자리는 그 무엇보다 폐하를 적들의 공격에서 지켜낼 실력이 우선되어야 하는 자리라는 것을요. 아니 그렇습니까?”

“음... 예, 그것은 대비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보령과 비슷한 젊은 기사 중에서 왕실근위대장 직책의 무게를 감당해낼 수 있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나이에 그 정도의 능력을 지닌다는 건 불가능한...”

“있습니다.”

“...?”

너무나 단호한 목소리로, 대비의 말에 답하는 디트리히.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튀어나온 대답에 당황한 대비와 국왕이 멍하니 그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데, 곧 디트리히의 입에서 두 사람이 궁금해했던 이름이 흘러나왔다.

“왕실근위대장의 무게를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자, 바로 다닐렌츠 남작 데미언 카릴베르크입니다.”

***

곧 이어진 대화에서, 디트리히는 다닐렌츠 남작의 무용(武勇)이 자신에 못지않다는 말을 꺼냈다.

하지만 예상대로 국왕과 대비는 그의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

하긴, 누군들 그럴 수 있을까.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가 누구인가?

젊은 시절 ‘벽안무적(碧眼無敵)’이라 불리며 따로 책으로 펴내도 될 정도의 무수한 무용담을 만들어낸 전설적인 기사였다.

이미 30대의 젊은 나이에 상급 기사의 경지에 들었고, 그 뒤로도 끊임없는 수련으로 자신의 검을 갈고 닦아 끝내 ‘왕국제일검’의 칭호를 거머쥔 사나이가 바로 그였다.

한데 이제 겨우 이십 대 초반에 불과한 젊은이가 그와 비슷한 경지에 올랐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 말을 쉽게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국왕과 대비 쪽이 느끼는 감정이 황당함이었다면, 디트리히 쪽이 느끼는 감정은 답답함이었다.

만약 사위인 다닐렌츠 남작이 왕도에 머물러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왕 앞으로 불러다 그 실력을 보여줬을 텐데...

물론, 지금이라도 불러서 자랑스러운 사위의 실력을 국왕에게 보여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장인으로서의 면이 서지 않았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영지로 돌아가서 연락을 기다리라고 말하며 사위를 돌려보내지 않았던가?

그래 놓고서 뒤늦게 ‘국왕 폐하가 자네의 실력을 확인코자 하시니, 왕도로 와서 실력을 보여주시게’라고 말한다?

장인의 위신을 걸고 그리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사위인 다닐렌츠 남작을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하고 물러나려는 디트리히와 그 결정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국왕의 대립 아닌 대립 상황이 계속 이어지던 어느 날.

“다닐렌츠 남작이라면... 저는 추천합니다. 그라면 장인 못지않은 훌륭한 왕실근위대장이 될 겁니다.”

실각한 트리틴 알트마이어의 뒤를 이어 왕국의 신임 군무대신 자리에 오른 라이에른-팔츠 변경백, 파울 루덴도르프.

그는 디트리히가 자신의 후임 왕실근위대장으로 사위인 다닐렌츠 남작을 추천했다는 말을 전해 듣자 이 같은 반응을 보였다.

“오라버니께선 다닐렌츠 남작을 만나 뵈온 적이 있으십니까?”

너무나도 긍정적인 그의 반응에 놀란 대비가 그리 묻자, 파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얼마 전, 따로 자리를 가진 적이 있사옵니다, 대비마마.”

“오라버니께서 보시기에는 어떻던가요?”

“그 나이에 결코 가질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지닌 자였사옵니다. 담대함과 패기는 물론 나이를 의심케 하는 매끄러운 말솜씨까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실근위대장은 모름지기 위급한 순간에도 폐하를 지켜낼 수 있는 호위 기사로서의 실력이 우선 아니겠습니까?”

“음... 그것은 제가 다닐렌츠 남작과 검을 맞댄 것이 아니기에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까...”

“허나.”

“...?”

“제가 아는 바이펠베르크 백작은 검(劍)과 관련해서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사위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 같은 군무대신 파울 루덴도르프의 찬성으로,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의 왕실근위대장 사직 및 후임인 데미언 카릴베르크의 임명이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반대 의견이 튀어나왔는데, 그 의견을 낸 이는 다름 아닌 왕국의 재상(宰相) 알베르투스 헴펠이었다.

그가 반대의 이유로 내세운 것은 다음과 같았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현 왕실근위대장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말엔 이 노신(老臣) 역시도 공감하는 바입니다.”

“허나 그 후임으로 추천한 다닐렌츠 남작의 인선엔 찬성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인품과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를 추천한 바이펠베르크 백작과 라이에른-팔츠 변경백이 사람을 잘못 보았을 리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다닐렌츠 남작은 사적으로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사위가 되는 이, 그런 사람을 폐하의 측근 중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왕실근위대장으로 삼는다면 불필요한 정쟁(政爭)을 만들 것입니다.”

“왕좌의 주인이 바뀌고, 나라가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피할 수 있는 다툼은 피하고, 국가의 힘을 하나로 결집해야 합니다.”

왕국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노신의 구구절절 옳은 소리에, 거의 성사단계에 이른 듯했던 다닐렌츠 남작의 신임 왕실근위대장 선임은 물거품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때, 군무대신 파울 루덴도르프가 이 상황을 해결할 뜻밖의 묘수를 내었으니, 그건 바로...

***

“허... 이게 정말인가?”

다닐렌츠의 주도 키르헨의 새로운 상징이 된 영주성.

최근 가파르게 성장한 영지의 위상을 상징하듯 웅장한 규모로 세워진 그 영주성 내부의 내 집무실에서 나는 부하가 전달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예, 영주님. 이틀 전 국왕 폐하의 이름으로 왕국 전역에 포고된 내용입니다.”

“영주님,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그렇게 놀라십니까?”

“놀랄만한 내용이니까 놀라지. 네가 직접 읽어봐. 자, 여기.”

내 옆에 서서 보고서의 내용을 궁금해하는 아드리안에게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문서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헐...? 뭡니까, 이거?”

“거봐 인마, 너도 헉 소리가 절로 나오지?”

“예, 확실히... 그럴만한 내용이네요.”

나와 아드리안은 물론 이 소식을 전한 정보부 소속 담당자까지 깜짝 놀라게 만든 보고서의 내용은...

“왕실근위대장 선발 무투회라... 이건 진짜 예상 못 했네.”

바로, 장인어른의 뒤를 이어 왕실근위대장의 자리를 이어받을 기사를 뽑는 무투회(武鬪會)의 개최 소식이었다.

“해당 무투회는 군무대신이 제안했다고 합니다.”

“군무대신이라면... 라이에른-팔츠 변경백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국왕 폐하를 수호하는 중요한 자리인 만큼, 실력으로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 기사에게 그 명예를 허락하자며 군무대신이 주장했다고 합니다.”

정보부 담당자의 이어지는 상황 보고를 듣던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근데... 영주님, 이거 생각해보니 아주 괜찮은 생각인 거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

“아니, 이렇게 실력으로 뽑아버리면 뒷말이 안 나올 것 아닙니까?”

“뭐, 그건 그렇지.”

“안 그래도 영주님이 얼마 전에 그 얘기 하시지 않았습니까. 전임 왕실근위대장이 장인어른이시다 보니, 남들 눈엔 사위한테 자기 자리 물려주는 것처럼 보여서 구설수 생기지 않을까 하고요.”

“음, 그랬었지.”

“근데 이렇게 되면 깔끔하게 실력으로 증명해버리는 거니까, 그런 말 나올 일도 없겠지요. 하하하!”

마치 자기 일처럼 좋아하는 아드리안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야, 그러다가 내가 무투회에서 우승 못 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내 딴에는 나름 심각하게 꺼낸 얘기였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들은 아드리안의 얼굴은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변했다.

“에이, 그럴 리가 있습니까? 영주님이랑 동년배인 젊은 기사 중에서 영주님보다 강한 사람이 나온다? 그건 진짜...”

“...?”

“... 주 아르닌께서 이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하늘에서 내려보낸 악마일 겁니다. 영주님이 못 이길 사람, 적어도 우리 또래 중엔 절대 없습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

그로부터 한 달 후...

“자, 마지막 대결입니다. 이 대결의 승자가 국왕 폐하를 수호하는 왕실근위대장의 영예를 차지하게 됩니다!”

“와아아아아아아!!!”

나는 수백 명에 달하는 왕도 카를리온 주민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왕성 앞에 마련된 넓은 특설 연무장 위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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