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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49화 (149/197)

뜻밖의 전개 (3)

내가 영주의 자리에 오른 후부터 척박했던 왕국 변방의 영지 다닐렌츠는 그야말로 역사에 기록될 정도의 눈부신 발전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러한 다닐렌츠의 성장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당연히 영주인 나였다.

“영주님은 우리 다닐렌츠를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신 ‘신(神)의 사자’이시다!”

“영주님께서 산을 가리키며 소금이 솟아나라고 하면 그 땅에선 소금이 생겨나고, 철광이 생기라고 외치시면 철광이 만들어진다!”

“왕국 북서부에 세워진 대장간들은 죄다 우리 나움가르트에서 나오는 철광석을 받아가지. 우리 다닐렌츠가 없으면 왕국 북서부의 모든 공방들이 손가락이나 빨아야 한다, 이거야!”

“지금의 이런 영광을 만들어준 사람이 누구냐고? 그걸 질문이라고! 당연히 우리 위대하신 다닐렌츠의 군주, 데미언 카릴베르크 남작님이시지! 하하하!”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도시, 나움가르트에 거주하는 장인들과 광부들이 시커먼 검댕이 묻은 얼굴로 앞다투어 나를 찬양했고,

“자, 여기 들판 보이지? 저 멀리 언덕까지가 다 밀밭이란다. 근데, 여기가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리던 죽음의 땅이었다는 거 아니? 그걸 우리 위대하신 영주님께서 이런 옥토로 만들어주신 거야. 얼마나 감사한 일이니?”

“육십 평생을 이 땅에서 살았지만, 그런 나도 우리 다닐렌츠가 이렇게 풍요롭고 기름진 땅인 줄은 몰랐어. 사방에 우글거리던 그 악랄한 몬스터 놈들을 몰아내고 그 땅에 곡식을 심고 나서야 비로소 이 땅의 감사함을 안 게지. 이게 다 누구 덕분이냐고? 그거야 당연히 영주님 덕이지! 당연한 걸 뭘 물어!”

“재작년에도 풍년, 작년에도 풍년, 올해도 풍년! 더 좋은 건 몇 년 내내 풍년이라 농작물이 넘쳐나도 그걸 다닐렌츠 상단에서 모조리 사다가 다른 영지에 팔아준다는 거야. 농사를 지은 만큼 무조건 돈을 벌 수 있는 있다는 얘기지!”

이 시대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산업, 농업의 주인공인 농민들 역시 영주에 대한 감사함을 말하느라 입이 마를 지경이었다.

“영지군이 된 게 자랑스럽다고? 허허허, 그런 말 들으니까 새삼스럽게 옛날 생각이 나네. 나 때는 말이야, 젊은 놈이 영지군 입대를 지원하는 건 그야말로 인생에 희망이라고는 없는 놈들의 마지막 선택 같은 거였어. 근데 지금은? 영지군에 들어오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잖아.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영지군이 되면 뭐가 좋냐고요? 어휴, 너무 많아서 일일이 말하기가 힘들 정도죠. 일단 집안에서 영지군에 입대한 사람이 나오면 그 집은 세금을 3할이나 깎아줘요. 만약 한 집에서 2명이 입대한다? 그 집은 세금이 절반이나 줄어든다니까?”

“예전엔 이런 거 꿈도 못 꿨죠. 장교나 백인대장도 아니고, 일개 병사들한테 계절별로 피복을 나눠주고 무기랑 갑옷까지 영지에서 사준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어요. 영주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영주님께서 군에 대한 처우를 대대적으로 개선해주신 이후 병사들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기본적으로 훈련에 임하는 태도가 아주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변했죠. 눈빛들이 아주 반짝반짝합니다!”

영주 취임 이후 내가 가장 많은 신경을 쏟았던 영지군에선 내가 ‘죽으라면 기꺼이 죽을 정도’의 높은 충성심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처럼 군사, 경제, 문화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면에서 골고루 기적적인 성장을 이룬 다닐렌츠.

더욱 기꺼운 것은, 내가 워낙 공을 들여서 영지의 운영 체계를 만들어 둔 덕분에 이제는 영주인 내가 없어도 영지가 알아서 잘 돌아가게 되었다는 점이다.

게임으로 치면 ‘자동 사냥’이 가능하게 된 수준이라고 할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십시오, 영주님. 다달이 올라오는 영지 재정 관련 보고서는 제가 상단 연락망을 통해 빠짐없이 카를리온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세계관 최강급의 능력치를 갖춘 우리 영지의 보물, 재무관 파스칼 긴터.

“다닐렌츠는 물론이고 속지(屬地)인 바렌부르크와 루테니아의 방위 상황 역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영주님께서 제안해주셨던 ‘예비군 제도’ 역시 순조롭게 시행 준비 중입니다.”

언제나 차분하고 안정적인 모습으로 영지의 방위를 책임지고 있는 군무관 발터 브라운.

“지난해와 비교해 외부에서 유입되는 인구는 많이 줄어들었습니다만, 영지 내에서 태어나는 신생아의 수가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몇 년간 이어져 온 가파른 인구 증가세가 올해도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영지의 괄목할만한 성장에 큰 몫을 담당해준 서기관 세르지오.

“허허허, 딱히 각오랄 것이 있겠습니까? 그저 영주님께서 이 늙은 몸에게 베풀어주신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영주인 나로서도 그저 모든 것을 믿고 맡길 뿐인 ‘든든한 언덕’, 바렌부르크의 총독(總督) 데론 베르켈 경.

그리고...

“제가 오라버니의 빈 자리를 완벽하게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다닐렌츠 영지민들을 위해 노력할게요!”

내가 없는 동안 나를 대신해 다닐렌츠 영주의 직무를 대행할 ‘빛나는 재능’ 니나와,

“여보,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니나 아가씨를 도와서 영지에 아무 문제 없도록 할 테니까. 그리고... 큼큼, 오늘도 사랑해요!”

그런 니나를 든든하게 지원해줄 다닐렌츠의 ‘안방마님’, 사랑하는 나의 아내 아이린까지.

이렇게 든든한 인재들이 다닐렌츠에 남아 있는데, 내가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끝내고, 나는 무척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닐렌츠를 떠나 왕도 카를리온으로 향했다.

***

“오늘 저녁은 바인호프 요새에서 먹겠군요. 으, 거기 밥 내 입맛에는 안 맞던데!”

왕국의 심장부로 향하는 내 곁엔 늘 그랬듯 언제나 든든한 나의 오른팔이 되어주는 호위 기사 아드리안 쉬라흐와,

“흐흐흐, 왕도의 미녀들을 품어볼 기회인가? 기다려라, 카를리온의 여인들이여!!!”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여자에 미쳐 있는 다닐렌츠 최고의 ‘신궁(神弓)’, 기사 엔리케 아르미엔토,

“쟤네 둘만 있어도 충분하지 않으십니까? 굳이 저까지 데려가실 이유가...”

지난 전쟁에서 왕국 북서부 최강의 기사로 불리던 ‘안할트의 늑대’ 마티아스 괴츠를 쓰러뜨리고 드높은 명성을 누리게 된 기사 겔베르트 로이터가 함께 했다.

“하아, 그나저나 왕도라니... 그 사람 많고 정신없는 거리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픕니다. 솔직히 말해, 너무 가기 싫군요.”

“어허! 주군을 모시고 가는 수하가 이렇게 대놓고 따라가기 싫다는 소리를 하다니,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아, 그게 들리셨습니까? 저도 모르게 오만불손한 언사를 행했군요. 당장 제 기사 작위를 빼앗고 어디 촌구석으로 내쫓아주십시오. 그 형벌, 달게 받겠습니다.”

“로이터 경은 틈만 나면 도망갈 생각밖에 없으십니까? 한 번만 더 그런 소리를 하면 기사 작위를 뺏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반 병사로 강등시켜 안할트 영지와의 접경지로 보내겠습니다.”

“... 열심히 하겠습니다, 영주님.”

나는 틈만 나면 은퇴 각을 재는 겔베르트를 ‘병사 강등 뒤 최전방 배치’라는 살벌한 협박으로 가볍게 제압했다.

그런 우리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옆에서 꺽꺽거리며 웃던 엔리케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특유의 네모진 턱을 쓱쓱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왕실근위대장 선발 무투회인가 뭔가 하는 거 말입니다. 그거 참가 기준을 보니까 꽤 빡빡하던데요? 남작 이상의 작위를 지닌 귀족이거나 그런 귀족 가문의 자제가 아니면 아예 참가도 못 한다고 하던데?”

“깜냥도 안 되는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몰려들까 봐 내세운 기준이겠죠. 그리고 기본적으로 왕실근위대장은 왕성에 머물며 국왕 폐하와 왕족들을 상대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귀족으로서의 기본적인 예의범절을 배워 익힌 자여야 하니, 애초에 지원자를 귀족으로 한정한 것 아니겠습니까?”

엔리케의 질문을 들은 아드리안이 상세하고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답변한다.

누가 보면 이번 무투회를 기획한 실무자라고 생각될 만큼 청산유수의 답변이었다.

“아드리안, 너... 뭐냐? 좀 낯설다?”

“뭐가 말입니까.”

“아니, 뭐랄까... 그, 사람이 엄청 똑똑해 보이잖아!”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는 엔리케의 반응에 아드리안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영주님을 가까이서 모시면서 높은 분들을 자주 만나다 보니, 저도 세상을 보는 눈을 좀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명색이 호위 기사인데, 칼질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는 무식쟁이면 영주님의 명성에도 누가 될 것 아닙니까?”

“허... 아드리안, 너 진짜...”

변해도 너무 변한 아드리안의 모습에 감탄을 넘어 배신감을 느끼는 엔리케였다.

“하하! 좋은 자세다, 아드리안. 기사로서 검을 수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책을 가까이하고 학식 깊은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스스로의 지혜를 키워가는 것 또한 중한 일이다.”

“예, 영주님.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엔리케?”

“예, 영주님!”

나의 부름에 씩씩하게 대답하는 엔리케.

그런 그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주며, 나는 말했다.

“책 좀 읽어요, 책 좀! 한참 어린 아드리안 보기 부끄럽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제 여자 좀 그만 밝히고 장가나 좀 가십쇼! 나이를 먹었으면 사람이 무게감이 있어야지! 에이...”

“여, 영주님...!”

“푸흡...! 큭!”

“푸하하하하하하!!!”

나의 호통에 울먹이는 엔리케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리고야 마는 아드리안과 겔베르트.

그렇게, 나는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믿음직스러운 전우들과 함께 다시금 왕도 카를리온에 당도했다.

***

‘왕실근위대장 선발’이라는 사상 유례가 없는 포상을 걸고 카를리온에서 개최된 무투회(武鬪會).

참가 자격 자체가 귀족들로 제한되었기에, 일반적인 무투회처럼 수백, 수천 명의 지원자가 몰려드는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더불어 참가 자격을 충족한 귀족 중에서도 왕실근위대장 직위에 도전할 정도의 고강한 실력을 지닌 이가 많지 않았고, 또 그런 실력자들이 모두 다 무투회에 참여한 것도 아니었기에 자연스럽게 참가자의 숫자는 스무 명 남짓에 그치게 되었다.

“누가 무투회에서 우승해서 새로운 왕실근위대장이 될까?”

“아무래도 라이에른-팔츠 변경백의 둘째 공자가 우승하지 않을까?”

“아아, ‘강철곰’이라고 불리는 그 친구 말이지? 이름이... 고트프리트인가 그랬는데.”

“어, 맞아. 내가 엊그제 봤는데 진짜 사람이 아니라 곰이라고 해도 믿겠더구만. 덩치가 어마어마해.”

무투회의 본격적인 개최를 앞두고 우승자를 예측하는 사람들의 열기가 후끈했다.

수많은 이름이 언급되었지만, 그중 가장 많은 사람의 선택을 받은 이는 바로 현(現) 군무대신 파울 루덴도르프의 아들인 고트프리트였다.

보통 사람 두세 명을 붙여 놓은 듯한 장대한 체구를 지닌 그는 그 막강한 신체적 조건에 걸맞은 무지막지한 위력의 강검(强劍)을 구사하는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 일전에 군무대신을 두들겨 패서 난리였던 젊은 귀족은 어떤가? 그 사람도 대단한 거 같던데.”

“아, 다닐렌츠 남작 말이지? 지금 왕실근위대장의 사위라는.”

“맞네, 그 사람이 있었네. 명색이 ‘왕국제일검’의 사위인데, 한가락 하지 않을까?”

“왕국제일검의 아들도 아니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위인데, 뭔 상관? 아무래도 아버지인 변경백의 피를 이은 아들이 낫지 않겠어?”

동시에 나의 이름도 꽤 언급되었지만, 아무래도 고트프리트에 비하면 한 수 처진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이대로 영주님이 결승까지 올라가신다면, 결승 상대는 고트프리트가 되겠군요.”

“아마도 그렇겠지?”

“하, 잘 됐습니다. 다들 그 곰탱이가 우승한다고 떠들고 있던데, 결승에서 아주 확실히 밟아주시죠!”

“밟긴 뭘 밟아. 그냥 안 다치게 적당히 해서 끝낼 거야.”

나보다 더 흥분해서 씩씩거리는 수하들을 진정시키며, 나는 착실하게 무투회에 임했다.

그렇게, 나는 준결승에서 만난 사자기사단 출신의 어느 귀족 자제를 가볍게 꺾고 결승에 올랐고...

“자, 마지막 대결입니다. 이 대결의 승자가 국왕 폐하를 수호하는 왕실근위대장의 영예를 차지하게 됩니다!”

“와아아아아아아!!!”

수백 명에 달하는 왕도 카를리온 주민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왕성 앞에 마련된 넓은 특설 연무장 위에서 무투회의 마지막 대결을 치르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다 예상대로였는데...

“... 이건 예상 못 했네.”

내 눈앞에 서 있는 음침한 인상의 사나이.

“크흐으! 잘 부탁드립니다, 귀족 나으리! 흐흐흐!”

마치 목을 긁어서 내는 듯 목소리마저 기괴한 나의 결승 상대.

“... 다닐렌츠 남작과 무투회의 우승을 다툴 상대는, 저 멀리 하얀 산맥 너머 동부 전선에서 무수히 많은 제국 이교도 놈들을 쓰러뜨린 암흑 기사단의 부단장, 사울 리카르도 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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