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근위대장 (1)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이 쇄골까지 내려와 있고, 굵은 핏줄이 툭툭 튀어나온 민머리는 한낮의 햇볕을 받아 붉게 달아올라 있다.
상체 근육이 얼마나 두꺼운지, 위에 걸쳐 입은 가죽 갑옷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있고, 손에 들고 있는 톱니 모양 칼날의 대검은 보기만 해도 질릴 정도로 거대한 크기를 자랑했다.
이 사내가 바로 사울 리카르도(Saul Ricardo).
차기 왕실근위대장을 선발하는 무투회 결승에서 나와 겨루게 될 상대였다.
‘... 이 새끼가 왜 여기서 나와?’
사울을 바라보는 나의 속마음이었다.
하긴, 여기서 왜 나오냐는 말 자체가 의미 없는 소리긴 했다.
애초에 내가 알고 있는 <로스트 킹덤> 원작의 내용에선 ‘왕실근위대장 선발 무투회’라는 이벤트 자체가 등장하질 않았으니까.
원작과 달리 나라는 존재가 등장했고, 그로 인해 장인어른께서 왕실근위대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상황이 만들어졌으며, 그로 인해 무투회가 개최된 거다.
‘그나저나... 그 고트프리트를 이기고 결승까지 올라오다니, 의외긴 하군.’
사울의 준결승 상대는 이번 무투회의 우승 후보 1순위로 꼽히던 라이에른-팔츠 변경백의 둘째 아들, 고트프리트 루덴도르프였다.
그는 북부의 핏줄을 이은 사내답게 압도적인 체구에서 나오는 괴력으로 무지막지한 강검(强劍)을 구사하는 기사였는데, 준결승까지 올라오며 만났던 상대들은 그의 검을 막아내는 것조차 힘들어하며 단시간에 모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내, 사울 리카르도는 달랐다.
그는 저 터질 듯 부푼 근육에서도 느껴지듯 고트프리트 못지않은 괴력을 지닌 장사였다.
그렇게 펼쳐진 강(强) 대 강(强)의 싸움.
고트프리트와 사울은 왕성 앞에 마련된 무투회 전용 특설 연무장의 돌바닥을 절반 이상 깨부숴가며 살벌한 난타전을 벌였다.
기본적으로 두 사람은 바르디안 가드와 암흑 기사단이라는, 왕국 내에서 거대한 명성을 지닌 두 무력 단체의 대표로서 이 무투회에 참가한 입장이었다.
국왕파의 수장이자 현(現) 군무대신, 라이에른-팔츠 변경백의 친아들이자 친위기사단인 바르디안 가드(Bardian Guard) 소속의 기사 고트프리트.
대공파의 존재 이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베겐스바흐 대공의 친위대, 암흑기사단의 부단장인 사울 리카르도.
개인적인 자존심 이상의 막중한 사명감으로 맞붙은 두 사내의 대결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진탕시키고 고막을 찌릿찌릿하게 만들 정도의 대단한 싸움을 만들어냈고, 그 결과...
“크흐흐! 남작 나으리, 제가 손속이 조금 거친데 이해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쇠를 깎는 듯한 이 기괴한 목소리의 사내가 내 앞에서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꼴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에겐 전혀 의미 없는 짓거리였다.
“당연히 이해하고 말고! 하하하! 명성 자자한 동부 전선의 영웅과 이렇게 검을 겨룰 수 있게 되어 영광이네. 좋은 대결 기대하지!”
“...?”
갑작스러운 나의 칭찬을 들은 사울의 눈빛에 의아함이 떠오른다.
본격적인 대결을 치르기에 앞서 상대인 나를 도발하기 위해 말을 건넨 것인데, 내가 욱하기는커녕 웃는 낯으로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늘어놓으니 당황할 만도 하겠지.
게다가 자신에게 동부 전선의 영웅이라니?
주군인 베겐스바흐 대공조차도 자신에게 이 정도의 칭찬은 하지 않았는데...
“그...”
“대공 전하 밑에서 활약이 대단하다고 들었네. 간악한 제국 이교도 놈들을 때려죽이는데 늘 선봉에 섰다지?”
“그야 그런데...”
몇 번 중간에 내 말을 끊으려 시도했던 사울이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 감히 귀족이 얘기 중인데, 한낱 기사 나부랭이가 말을 끊으려 들어?’
사울은 상당히 무례한 인간이었지만, 지금 이곳은 국왕을 비롯해 왕국의 고위 인사들이 모두 모여 있는 자리였다.
이런 곳에서까지 제멋대로 행동했다간 감당 못 할 후폭풍이 밀어닥칠 것이 뻔했기에, 그는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나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오늘 리카르도 경의 그 대단한 검을 견식할 생각을 하니 한 사람의 기사로서 가슴이 떨리는구만! 후우, 이 손 떨리는 거 보이나? 하하하! 내 오늘 크게 안계를 넓히게 되겠구만! 기대하겠네!”
“... 알겠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무투회의 진행을 맡은 사회자가 앞으로 나섰다.
“대화는 다 끝나셨소이까? 자, 그럼... 결승에 임하는 두 기사는 정정당당한 대결을 약속하는 의미로 악수를 나누시오!”
사회자의 힘찬 음성을 들으며, 나는 웃는 낯으로 사울과 악수를 나눈 뒤 천천히 몸을 돌렸다.
시작 위치로 발걸음을 옮기는 나의 얼굴엔, 언제 웃었냐는 듯 한겨울 북풍한설 같은 싸늘함이 내려앉아 있었다.
***
사울 리카르도.
원작 소설 속에서 그가 등장하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 그리 많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없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가히 대서사시라 불러 마땅할 분량을 자랑하는 <로스트 킹덤>에서 사울은 이름 몇 번 언급되는 정도에 불과한 캐릭터였던 것.
하지만 그의 이름이 내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는 이유는...
‘... 저 자식이, 장인어른의 몸에 칼을 꽂은 바로 그놈이란 말이지?’
그랬다.
암흑기사단의 부단장 사울 리카르도.
그는 원작 속 베겐스바흐 대공과 그의 추종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국의 충신들을 격살하고, 국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린 ‘창검(槍劍)의 밤’ 당일에 암흑기사단 병력 일부를 이끌고 왕실근위대장을 쓰러뜨리는 임무를 맡은 인물이었다.
사실 ‘왕국제일검’이라 불리는 나의 장인어른,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의 실력을 생각하면 병력 일부가 아니라 암흑기사단 전체를 다 끌고 간다고 해도 될까 말까 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당시 장인어른은 믿었던 측근에게 배신당해 중독된 상태였고, 그로 인해 본래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 그 중독된 몸으로도 자신을 습격한 암흑기사단 소속의 기사들 대부분을 쓰러뜨렸다는 게 함정이지만.’
원작 소설 속 장인어른은 남들은 한 방울만 마셔도 즉사했을 무시무시한 극독을 마시고도 죽지 않았다.
하지만 중독의 피해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어서, 시야는 흐려지고 입과 코에선 시커멓게 오염된 피를 줄줄 흘리며 싸워야 했다.
그런 몸 상태로도 왕국 3대 기사단의 하나로 불리는 암흑기사단의 정예들을 풀 베듯이 도륙했으니, 과연 ‘왕국제일검’이라 할만했다.
그 격전의 도중에, 사울은 자신의 수하들을 ‘칼받이’로 밀어 넣은 채 공격의 기회를 엿보다 지칠 대로 지친 장인어른의 등에 검을 찔러넣는다.
등으로 꽂힌 검이 그대로 몸을 관통해 가슴으로 튀어나왔을 정도의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승리를 직감한 사울은 ‘크하하하하! 해냈다! 이 몸이 왕국제일검을 죽였다!!!’라며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지만, 죽기 직전의 마지막 힘을 끌어모은 장인어른이 몸을 돌리며 검을 내리쳤고...
‘... 결국 머리부터 몸통까지 두 조각으로 쪼개져 비참하게 죽었지.’
왕국제일검을 죽였다며 설레발을 치던 와중에 제가 먼저 머리통이 쪼개지는 개죽음을 맞이한 셈이다.
하지만...
‘... 소설과 달리 현실에선 네 놈의 그 보잘것없는 검이 장인어른에게 닿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지 않을 테니까.
***
슈아아아아아아-!!!
암흑기사단 부단장, 사울 리카르도의 상징과도 같은 거대한 톱날 대검이 무시무시한 귀곡성을 흘리며 공간을 가른다.
하얀 산맥 너머에서 전해져온 소문에 의하면, 맹수의 송곳니 같은 저 톱날에 걸려 사지가 찢겨 죽은 제국군 병사가 족히 세 자리 숫자에 달한다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그의 앞에 서 있는 상대는 평상시의 그 미친 광신도 제국군이 아니었으니.
“흐랏차!!!”
카아아아앙!!!
나는 머리통을 단번에 쪼갤 기세로 떨어지던 사울의 검을 간단하게 쳐냈다.
마치 어린아이가 휘두른 얇은 나뭇가지를 쳐내듯 가벼운 손짓이었다.
“크흑!”
작심하고 펼쳤던 공격이 너무나 간단히 막히자 사울의 입에서 작게 신음이 터졌다.
놀라움의 의미도 있을 것이고, 순수하게 손목과 팔의 통증 때문에 소리친 이유도 있겠지.
“왜, 놀랐어?”
나는 그런 사울에게 싱글싱글 웃는 미소를 보여주며 말을 걸었다.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는 간단한 도발이었는데, 효과가 확실했다.
“크아아아악!!!”
비명인지 함성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연무장 바닥을 박차는 사울.
방금 겪은 믿기 힘든 경험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겠다는 듯, 있는 힘껏 휘두른 그의 매서운 칼질이 쉴새 없이 나의 머리와 어깨, 옆구리와 허벅지를 노리며 쏘아졌다.
휘이이잉!!! 휘잉! 쉬이익-!!! 슈아아악!!!
“으아아아아! 크아악!!!”
“흡! 후읍- 흡!”
몬스터 같은 괴성을 연신 내지르며 검을 휘두르는 사울의 공격을 나는 짧은 숨을 내뱉으며 침착하게 피해내는 것에 열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정확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족히 30여 초 가까운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땐 짧은 시간일 테지만, 눈 깜박할 정도의 시간에 수십 합의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초인(超人)의 경지에 오른 사울에겐 길어도 너무나 긴 시간.
하지만, 그 긴 시간 동안 일방적인 공격을 쏟아붓고도 그의 검은 나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으니...
“와아아아아!!!”
“다 피했다, 다 피했어!!!”
“저게 가능한 건가? 상급 기사의 공격을 저렇게 쉽게 피한다고?!”
“미쳤다, 나 이런 거 처음 봐!”
우리의 대결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경악 섞인 반응이 튀어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저거 봐! 다닐렌츠 남작 지금... 뒷짐을 지고 있잖아?”
“어어어? 진짜네?! 진짜야!!!”
“와아아아아! 미쳤다! 진짜 최고다!!!”
심지어 내가 뒷짐을 진 채로 사울의 공격을 피해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누군가의 외침에 장내의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허으윽, 헉!!!”
폭풍 같이 쏟아붓던 공격을 멈추고, 나와 몇 걸음 거리를 벌린 사울이 참았던 숨을 거칠게 몰아쉰다.
반면, 그가 검을 휘두르는 것 이상의 속도로 움직이며 공격을 피해낸 나의 상태는 편안함 그 자체.
숨을 몰아쉬기는커녕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말끔한 얼굴로 서 있는 내 모습에, 사울의 얼굴은 마치 귀신을 본 사람처럼 변했다.
“허억... 허억!”
“생각보다 느리군, 리카르도 경. 나를 잡으려면 좀 더 빨라야 할 것 같은데?”
“으으... 어으...!”
대결 직전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며 확인했던 그의 현재 레벨은 62로, 이미 완숙한 상급 기사의 경지에 도달한 상태였다.
한데, 그런 그가 30초나 되는 긴 시간 동안 뒷짐을 지고 있는 적을 상대로 검을 휘둘러 아무런 이득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 얼마나 충격이겠는가.
지금 사울이 몰아쉬는 거친 숨에는 육체적인 부분보다 정신적으로 입은 타격을 회복하려는 의미가 더 짙게 숨어 있었다.
근데, 회복할 시간이 있을까?
“이제 좀 쉬었나? 그럼, 이번엔 내가 가지.”
“...!”
쉬이이잉-!!!
이건 검을 휘둘러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대여섯 걸음 떨어진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 사울의 뒤로 돌아가는 나의 몸이 공간을 찢는 소리였다.
“큭!”
뒤늦게 나의 움직임을 알아챈 사울이 급히 몸의 방향을 돌리며 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늦었다.
퍼어억-! 뚜둑!
“컥!!!”
사울의 몸이 뒤로 돌아서기도 전에 그의 텅 빈 옆구리에 나의 발차기가 작렬했다.
크게 힘을 주어 찬 것도 아니었는데, 대번에 ‘뚜둑’하며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무리해서 쥐어짠 힘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 압도적 속도가 만들어낸 가공할 파괴력.
강철 같은 맷집을 자랑하는 사울이었지만, 근육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옆구리에 그런 공격이 정확히 꽂힌 다음에야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크흑!”
저절로 굽어지는 몸의 자세를 억지로 유지하며 후속 공격을 피해 뒤로 물러서는 사울.
하지만...
“이번엔, 꽤 아플 거다!”
“!?”
휘웅- 콰아아아아앙!!!
마치 전함의 함포가 발사되는 듯한 무지막지한 굉음과 함께 내 발밑의 연무장 돌바닥이 일거에 깨져나갔고,
카아아아앙- 파카아아아앙!!!
“끄아아악!”
동시에, 내 검을 막아선 사울의 검이 유리창 깨어지듯 터져나가며 그의 온몸을 찢어발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