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52화 (152/197)

왕실근위대장 (3)

신성력 788년 12월_

새하얀 함박눈이 쏟아지는 겨울의 어느 날.

“하, 눈 많이 오네.”

나는 왕성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창밖으로 눈 쌓인 왕도 카를리온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은 좋아하고, 어른들은 근심하는 표정.

달라진 세상에서도 눈을 바라보는 아이와 어른의 시선이 다른 건 여전했다.

“저거 언제 다 치우냐... 마차 움직여야 되는데.”

내 앞에 달린 여러 가지 직함 중엔 ‘다닐렌츠 상단주(主)’도 있었다.

사정이 사정인 만큼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상단의 영업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애들 동원해서 빨리 제설을 하라고 해야하나...”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추웅- 성!”

“근무 중 이상 없습니다, 대장님!”

내 얼굴을 알아본 문 앞의 근위병 두 사람이 칼 같은 자세로 군례를 올린다.

왕실근위대장.

전설적인 기사이자 ‘왕국제일검’이라는 영광된 칭호로 불리는 사나이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의 뒤를 이어 왕실근위대의 수장(首長) 자리에 앉은 나에 대한 충성의 표현이었다.

“그래, 고생 많다. 피곤하지?”

초소 근무를 서는 병사를 독려하는 사단장처럼, 나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근위병들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조금 웃긴 것은 내 격려를 받는 근위병들의 나이가 나보다도 몇 살 많다는 것.

사실 눈앞의 두 사람 말고도 거의 대부분의 왕실근위대 병사들이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내가 너무 어린 나이에 왕실근위대장에 올랐기에 발생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나에겐 왕실근위대장 선발 무투회 결승에서 만난 암흑기사단의 부단장 사울 리카르도를 맨손으로 제압(이라고 쓰고 ‘피떡을 만들어 버렸다’고 읽는다)해버린 압도적인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실근위대장이란 왕실에 대한 드높은 충성심과 막강한 무력이 최우선시되는 자리.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나이기에, 근위병들은 새로운 상관인 나를 진심 어린 존경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힘들지 않습니다!”

“명예로운 일을 할 수 있어 영광일 뿐입니다!”

피곤하지 않냐는 나의 걱정에 판에 박힌 듯한 뻔한 대답을 꺼내놓는 근위병들.

물어본 질문의 내용이나 튀어나오는 대답이나, 어디서든 볼 수 있고 누구든 예상 가능한 대화의 흐름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나의 반응만큼은 무척이나 신선한 것이었다.

“자, 받아라.”

“...?!”

툭-

나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병사 두 사람 중 한 명에게 건네주었다.

“대, 대장님! 이건...”

자신의 손 위에 놓인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 근위병의 눈이 커진다.

그건 상태 좋은 고블린 가죽을 가져다 꼼꼼하게 재단해 만든 질 좋은 가죽 주머니였다.

원체 크기가 작아서 뭘 많이 넣기엔 무리가 있었고, 기껏해야 동전이나 겨우 넣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이 가죽 주머니를 바로 그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금화까지는 아니고, 끽해야 은화 몇 개 들었을 거다. 그래도 너희들 근무 끝나고 밥 한 끼 하기엔 충분할 거야.”

“가, 감사합니다!”

“감사는 뭘, 일하면서 가끔 이런 재미도 있어야 사는 거 아닌가?”

남들에게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나의 영혼은 지난 생의 경험을 더해 족히 오십 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늙은 아저씨였다.

영혼의 나이로 따진다면 한참 어린 조카뻘에 불과한 근위병들의 마음을 구워삶는 일이야 어려울 게 하나도 없었다.

나이 어린 부하들의 마음을 사는 가장 쉬운 방법.

그것은 바로...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

지난 생애 직장 생활에서 배운 삶의 진리가 이곳 펠리노어 왕국의 왕성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지금 바로 들어가시겠습니까, 대장님?”

“음, 그래. 고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가죽 주머니를 받기 전에도 충분히 공손했지만, 어디가 훨씬 더욱 빠릿빠릿해진 몸짓을 한 근위병이 문 안쪽을 향해 외쳤다.

“폐하! 왕실근위대장이 알현을 청하옵니다!”

***

“오, 근위대장! 오셨습니까?”

근위병들이 열어주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며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않는 소년.

펠리노어 왕국의 39대 국왕, ‘소년왕’ 요제프 3세였다.

“폐하, 간밤엔 평안하셨습니까?”

“근위대장을 비롯한 왕실근위대의 든든한 충신들이 나를 이리 지켜주니 평안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렇다 하시니 다행이옵니다.”

국왕이 아랫사람에게 칭찬하는 말을 건네는 모습이 제법 그럴듯했다.

국왕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는 어머니, 카넬리아 대비의 교육이 꽤 성과를 거둔 모양이다.

“근위대장, 오늘은 무엇을 가르쳐 주시는 겁니까?”

나를 바라보며 묻는 어린 국왕의 표정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얼마 전 우연히 검술이라도 표현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아주 기초적인 동작을 몇 개 가르쳐 주었는데, 그 시간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원작에선 그저 나약하게만 묘사되었던 어린 소년왕 요제프.

소설 속 그는 왕위를 찬탈하려 드는 숙부 앞에서 뭐라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심약한 성격에 부실하기 그지없는 몸을 지닌, 당장이라도 부서지고 깨어질 듯 약하디약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막상 실제로 만나 대화를 나누며 살펴보니, 요제프는 의외로 씩씩한 구석이 있는 소년이었다.

동시에 원작에서 묘사되었던 그의 나약한 모습들이 이해가 되었다.

어릴 적부터 얼굴 보고 지낸 집안 어른이 칼 들고 찾아와서 왕 자리를 내놓지 않으면 죽일 거라고 하는데, 11살 꼬맹이 입장에서는 무서워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아마 내가 요제프였어도 무서워서 오줌을 지리고 눈물을 찔끔 흘렸을 거다.

더불어 나는 요제프를 마냥 지켜주어야 할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당당한 남자로 성장시킬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요제프에게 검술을 가르친 것도 그런 생각의 일환이었고.

나를 보며 반가워하는 지금의 반응을 보니 요제프도 검술을 배우는 게 꽤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장인어른에게 듣기로는 검술 수업이 처음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예전엔 검을 배우는 것에 별 흥미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냥 선생님이 다르기 때문일지도?’

과거 요제프가 왕자의 신분이던 시절, 그의 아버지인 하인리히 4세는 당시 왕실근위대와 사자기사단 내부의 내로라하는 기사를 불러 자신의 아들에게 검술을 가르치라 명했다.

하지만 그 검술 수업에 요제프는 그 어떠한 흥미도 느끼지 못했고, 결국 검술 스승만 대여섯 명을 갈아치운 후에야 국왕은 왕자에게 검을 가르치라는 명을 거두었다고 한다.

대충 뭔 일이 있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때의 요제프는 지금보다도 더 어린 나이였을 테지.’

한마디로, 그저 칼싸움하고 노는 게 좋을 나이의 꼬맹이였을 요제프.

그런 애를 데려다가 바닥에 꿇어 앉혀놓고 분명 검(劍)의 길이 어쩌구 하는 고리타분한 소리나 해댔을 테니, 당연히 검술에 대한 흥미가 생길 리 없다.

반면, 나는 그때보다 조금 더 머리가 자란 요제프를 상대로 보기만 해도 흥미로운 모습을 여럿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사과를 공중으로 던져 땅에 떨어지는 동안 껍질을 깎아 내거나 어른 머리통만 한 바윗돌을 진흙 가르듯 베어내 수십 조각으로 만든다거나 하는 것들.

어린 소년의 눈을 홀리게 만드는, 신기하고 멋진 것들을 보여주면서 자연스럽게 검에 대한 흥미를 유도했던 거다.

“오늘은... 음, 과인이 듣기에 절정의 경지에 오른 검사는 날아오는 화살도 풀 베듯 베어낼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근위대장도 분명 그 정도의 경지에 오른 검사이실 테니, 그런 것도 가능하시겠지요?”

이건 뭐 삼촌한테 ‘이런 거 할 줄 아세요?’하고 물어보는 조카도 아니고.

세상 화려한 예복을 입고 머리엔 번쩍이는 보석으로 치장된 왕관을 얹었지만, 그저 순진한 그 나이 또래 소년의 모습을 간직한 요제프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나는 능숙하게 표정을 관리하며 입을 열었다.

“폐하, 무릇 배움이라는 것은 새로운 것을 익혀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배운 것을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옵니다.”

“아...”

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대강 짐작을 한 모양인지, 소년의 얼굴에 조금씩 당황의 감정이 번져나간다.

“오늘은 지난번에 제가 가르쳐드린 것을 얼마나 잘 이해하셨는지 그 부분을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폐하께서 준비가 끝나시는 대로 지하 연무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어, 으, 아... 생각해보니 오늘은 과인이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으니, 검술 수업은 다음에...”

“대비마마, 폐하의 말씀이 사실이옵니까?”

나의 차분한 물음에, 자애로운 미소를 띤 대비가 천천히 답한다.

“폐하께서는 오전 일찍부터 근위대장과의 시간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 편찮은 곳 하나 없이 건강하십니다.”

“어... 어마마마?”

흔들리는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 대비를 바라보는 소년.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럼, 어서 채비를 하시지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폐하.”

***

내가 왕실근위대장의 자리에 오른 지도 벌써 한 달이 되었다.

그 기간 내내 전임 왕실근위대장인 나의 장인어른께서는 왕도에 머물며 내게 인수인계를 해주셨다.

왕실근위대장의 업무는 생각 이상으로 방대하고, 예상보다 더 복잡했지만, 사실 영지 전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관리해야 하는 영주의 일에 비하면 간단한 편이었다.

기본적으로 몸을 써야 하는 일이 많아 체력적으로 힘들다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내게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성지 에셀바흐에서 얻었던 ‘구원의 성배(聖杯)’와 왕도에서 습득한 ‘카델린의 아뮬렛(The Amulet Of Cadelin)’, 이 두 가지 히든 피스의 힘을 흡수한 나는 지치고 싶어도 지칠 수가 없는 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넘쳐나는 체력을 앞세워 나는 국왕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고, 남는 시간에 왕실근위대 병력들에게 검술을 가르쳤으며, 내 스스로의 수련에도 힘썼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자기사단에서 합동 훈련 요청을 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전임 왕실근위대장인 장인어른의 부관이었고, 대를 이어 나의 부관으로서 일하고 있는 기사 카르스텐 바익스.

그가 전한 뜬금없는 소식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원래 왕실근위대랑 사자기사단이 이렇게 같이 훈련을 하고 그러나?”

“지금까지는... 없었습니다.”

“없었다?”

“예.”

“... 이거, 뭔가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한 부분 같은데?”

뭔가를 말하고 싶어 달싹거리는 카르스텐의 입술을 보며 나는 천천히 앉아 있던 집무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의 못된 짓을 선생님께 이르는 아이 같은 표정을 한 카르스텐이 내게 외쳤다.

“사자기사단, 그 새끼들 완전 나쁜 새끼들입니다!”

“...?”

이건 또 뭐야.

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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