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56화 (156/197)

서열 정리 (4)

왕도 카를리온, 왕성(王城)_

“오셨습니까, 근위대장.”

“예, 폐하. 찾으셨사옵니까.”

나는 어린 주군의 물음에 답하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이른 아침부터 대체 무슨 일로 부른 거지?

“내 근위대장에게 긴히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폐하께서 알고자 하신다면 신은 성실하게 답할 것입니다.”

뭐가 궁금한 것인지, 눈을 반짝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소년왕 요제프.

그런 그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요즘 성내에 근위대장이 과인의 친위대인 사자기사단을 불러 ‘매타작’을 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

예상치 못한 국왕의 물음에 순간적으로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다행히 국왕을 알현하는 자리라 머리를 바닥으로 처박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당황했던 표정을 다시 빠르게 회복하고, 침착한 어조로 답했다.

“신이 근래에 사자기사단 측에서 제안한 합동 훈련 제안을 받아들여 자주 만나 검을 겨루고는 있으나... 폐하의 말씀처럼 ‘매타작’이라 불릴 정도의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사옵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예, 폐하. 제가 어찌 감히 천하에 이름 높은 국왕친위대이자 왕국의 자랑인 사자기사단을 상대로 매질을 했겠사옵니까?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음, 그렇군요. 내 근위대장의 말을 믿겠습니다.”

... 전혀 믿지 않는 눈치인데.

하긴 뭐, 나도 믿으라고 한 말은 아니다.

아무리 내가 국왕의 최측근이라 한들 ‘예, 맞습니다. 제가 확인해보니 폐하의 친위대라는 것들의 수준이 아주 개판 5분 전이라 한 따가리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신하된 자로서 어디까지나 군주의 면을 세워줘야 하니 일단은 아니라고 하는 거다.

아직 나이 어린 소년에 불과했지만, 내가 에둘러 설명한 이유를 짐작하는 것인지, 국왕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까지는 어떻게 하질 못해서 아랫입술을 간신히 깨물며 웃음을 참는 것이 보였다.

뭐가 저리 신이 난 건지 모르겠네.

요즘 나에 대한 국왕 요제프의 호감도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지고 있는 판국이라 내가 뭘 하든 마냥 좋은 모양이다.

“크흠, 아무튼... 사자기사단과 왕실근위대가 서로 훈련까지 도와줄 정도로 사이가 좋아졌다니 다행입니다. 근위대장의 공이 컸습니다.”

“과찬의 말씀이시옵니다.”

“아니, 과찬이 아닙니다. 내가 비록 아는 것 없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사자기사단의 용맹이 예전만 못하다는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었으니까요.”

“... 그러셨습니까.”

나이 어린 국왕도 그 심각함을 알고 있을 정도로 사자기사단의 위상과 실력은 크게 떨어져 있었다.

왕실직할령 주변의 만만한 중소 영지의 기사단들을 찾아가 몇 대 쥐어박는 것 정도로는 수습이 안 될 정도의 추락.

하지만 당장 사자기사단을 동원할 전시 상황이 아니기도 하고, 딱히 해결방안이 없기도 해서 손을 놓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이 엉뚱하게 풀렸다.

그동안 ‘왕국제일검’인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존재가 두려워 왕실근위대를 상대로 시비를 걸지 못했던 사자기사단.

허나 바로 그 바이펠베르크 백작이 수장 자리에서 물러나자 사자기사단 놈들은 옳다구나 하고 왕실근위대에게 합동 훈련을 제안했다.

말이 훈련이지, 사실상 왕실근위대를 상대로 서열 정리를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왕실근위대원들이 왕국군 전체에서 가려 뽑은 우수한 인재들이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그들은 병사였다.

병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봤자 명색이 ‘왕국 3대 기사단’이라 불리는 사자기사단 소속의 기사를 능가할 리 없으니, 이번 기회에 사진들이 왕실근위대에 우위에 있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줄 기회였다.

분명 그랬는데...

‘현실은 기사단 전원이 몰려와서 나 한 사람에게 개 맞듯 얻어터진 거지.’

서열 정리를 하기는커녕, 역으로 정리를 당해버린 거다!

나는 놈들의 뼈마디에 그 날의 기억이 새겨져 영영 잊히지 않을 만큼 옴팡지게 때려주었다.

그들 중 몇몇은 내가 작정하고 쏟아낸 투기를 버텨내지 못해 정신을 잃고 연무장 바닥에 오줌을 지렸을 정도였으니, 더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어휴, 그 지린내 빼내느라 며칠 고생 좀 했지...’

하지만, 그런 나의 행동에 악감정은 실려 있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나의 행동은 사자기사단이 정신 차리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를 바라는 ‘사랑의 매’였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의도를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녀석들을 두들겨 팰 때마다 여러 가지 진심 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너는 하체 방어가 약하다, 너는 동작이 한 박자 늦는구나, 너는 공격이 너무 가벼워서 위력적이지 못하다, 생각이 많아서 반응이 느리다 등등.

정신없게 얻어터지는 와중이라 나의 가르침이 잘 전달됐을지 조금 걱정됐지만, 뭐 그거야 녀석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거기서 뭔가 깨달음을 얻고, 자신들의 실력을 끌어올려 보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면, 내 입장에선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 것이다.

반대로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나한테 얻어맞았다는 사실만 분해한다면, 그냥 놈들의 깜냥이 거기까지인 거겠지.

“어제, 사자기사단장이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음...”

사자기사단장이 국왕을 찾아갔다?

일단 말하는 표정을 보니, 내가 지네들 두들겨 팼다고 국왕에게 이르러 간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런 나의 추측은 맞아떨어졌다.

“사자기사단장이 말하길... 왕실근위대장을 기사단의 검술 사범으로 모시고 싶다더군요.”

“...?!”

“기사단 전원이 동의했다면서, 내게 윤허를 청하려 왔습니다. 근위대장은 이 같은 사자기사단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행히, 놈들에게 사자기사단의 긍지가 아직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

내가 사자기사단의 전력을 끌어올리려는 이유는 바로 대공이 왕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킬 그 날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원작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자기사단은 대공이 반란을 일으키는 ‘창검(槍劍)의 밤’ 당시 대공의 친위대인 암흑기사단을 상대로 한 시가지 전투에서 형편없이 패배, 전원이 사망하는 비극을 겪는다.

사자기사단을 격파한 암흑기사단은 그대로 왕성으로 진입하는데, 그 시간이 너무 빨랐던 터라 왕실근위대는 국왕을 비롯한 왕족들을 탈출시키는 데 실패하고 만다.

결국, 왕성에 갇힌 채로 반란군의 주력인 암흑기사단과 최후의 전투를 벌이게 된 왕실근위대.

객관적인 전력만 따진다면 당연히 왕실근위대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왕실근위대에는 ‘비대칭 전력’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왕국제일검’, 바이펠베르크 백작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가 있었기에 전투의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없었다.

바이펠베르크 백작은 대공파 측의 음모로 독에 중독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용전분투, 암흑기사단에게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힌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온몸에 퍼진 독의 작용으로 백작의 몸놀림은 무뎌졌고, 결국 암흑기사단의 부단장 사울 리카르도에게 치명상을 입고 쓰러지고야 만다.

그다음에야 뭐, 뻔한 결과가 되고 말았고.

원작의 이 장면을 읽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만약 바이펠베르크 백작이 독에 중독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일단 그 가정은 내가 장인어른을 대신해 왕실근위대장의 자리에 앉는 것으로 완전히 다른 흐름을 타게 되었다.

이 변화가 어떤 결말을 낳을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

자, 그럼 여기서 두 번째 가정.

만약, 사자기사단이 암흑기사단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조금 더 오래 버텨줬다면 어떻게 됐을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대강의 흐름을 예상해볼 수는 있다.

‘... 사자기사단이 암흑기사단의 발목을 잡는 사이 왕실근위대는 국왕을 왕성의 비밀통로를 통해 왕도 밖으로 빼낸다.’

어차피 대공 측도 베겐스바흐 공국에 주둔 중인 주력 병력을 모조리 데려온 것이 아니라 암흑기사단으로 대표되는 소수 정예 병력만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상황이었다.

그 병력으로 빠르게 국왕의 신병을 확보한 뒤 왕도와 왕실직할령의 군 지휘권을 손에 쥔 군무대신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마무리하는 것이 그들의 계획.

원작에선 대공파의 계획대로 상황이 흘러갔고, 결국 반란은 성공했다.

하지만...

‘... 이젠 다르지. 너희들 마음대로 일이 흘러가진 않을 거다.’

우선, 원작과 달리 놈들의 계획을 손금 보듯 훤히 알고 있는 내가 왕실근위대의 수장 자리에 앉아 있다.

그 결과 이미 놈들의 계획은 여러 부분에서 삐걱거리고 있었다.

일단 대공파의 중요 인물 중 하나였던 전(前) 군무대신 트리틴 알트마이어가 실각했고, 그 자리엔 놈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인 국왕파의 수장, 라이에른-팔츠 변경백 파울 루덴도르프가 앉아 있다.

그로 인해 왕도수비군과 도시경비대 병력의 통제권을 상실했으니, 반란군 놈들에게 주어진 시간적 여유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해 볼만 하다고 생각할 거다.’

군무대신이라는 중요한 패 하나를 잃었지만, 나는 대공은 반란 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왜냐고?

‘장인어른께서 왕실근위대장 자리에서 물러났으니까... 놈들의 입장에선 어마어마한 호재겠지.’

국왕의 곁을 지키는 왕국 최강의 검,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가 사라졌다.

십수 년간 그와 싸울 생각을 하며 온갖 계략을 꾸며온 대공파의 입장에선 갑자기 앓던 이가 빠진 듯 시원할 것이다.

‘장인어른에 비하면 나랑 싸우는 건 땅 짚고 헤엄치기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놈들은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

신성력(神聖歷) 789년 1월_

해가 바뀌어, 나는 스물넷이 되었다.

앳된 인상은 거의 사라지고, 완연한 청년의 기운만이 얼굴 위에 맴돈다.

사실, 스물넷이란 나이는 여전히 어린 느낌이 있는 나이였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에겐 그런 느낌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크허억!!”

콰당탕-!!!

“... 여전히 느리십니다. 뭘 할지가 뻔히 보여서 봐 드리려고 해도 봐 드릴 수가 없군요.”

“크으으...”

... 매일 같이 사자기사단과 왕실근위대의 검술 훈련을 지도하며 성격이 더욱 거칠게 바뀌었기 때문이리라.

“으, 쿨럭! 다시 가겠습니다.”

나에게 옆구리를 걷어차여 연무장 저편으로 처박혔던 사자기사단장 빌헬름 리벤트로프가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운다.

국왕의 허락이 떨어진 후, 나는 정식으로 사자기사단의 검술 사범이 되었다.

주중 3일, 하루 2시간 동안 단장인 빌헬름을 포함해 사자기사단 전원이 나에게 검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 강도가 만만치 않았다.

매일 같이 피가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사람이 나왔다.

너무 힘든 나머지 훈련 중에 구토를 하고, 몇몇은 실신을 할 정도로 가혹하게 몰아치는 훈련.

하지만 그들 중 나의 가르침에 불만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그동안 몇 년에 걸쳐 답보 상태에 머물렀던 사자기사단의 부단장 가르빈 알트로크가 나의 검술 지도를 받은 후 한 달 만에 상급 기사의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근위대장님!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감격으로 벌겋게 충혈된 눈을 한 가르빈이 내게 거듭 고개를 숙이는 그 모습을 목격한 날, 사자기사단 전원의 기세가 달라졌다.

내가 전하는 가르침에 자신들의 삶을 바꿀 정도의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지도를 받은 사자기사단과 왕실근위대의 전력은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

“전하, 암흑기사단 전원이 왕도 내 진입을 완료했습니다.”

“... 음.”

고개를 조아리며 보고를 올리는 부하의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사내.

베겐스바흐 대공, 루트비히 베르너 이그나티우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몇 달 전부터 그는 국왕파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그의 친위대 병력인 암흑기사단을 비롯한 대부분의 병력을 왕도 밖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그것은 훗날을 위한 보여주기식 명령이었다.

왕도 밖으로 나갔던 대공의 병력은 왕실직할령 내 이곳저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각자의 신분을 속여 다시 왕도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오늘, 그가 가진 무기 중 가장 날카로운 검인 암흑기사단 병력 전원이 왕도에 집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슬슬, 움직일 때군.”

더는 기다릴 수가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부하들도 알았다.

그의 가슴 속에서 이글거리는 왕좌에 대한 욕망이 이미 뜨거울 대로 뜨거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 일주일 후, 대계(大計)를 진행한다.”

마침내,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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