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57화 (157/197)

대계(大計) (1)

“왕도 내에 남아 있는 대공의 병력이 없다...?”

왕성 내부에 마련된 나의 집무실.

고풍스러운 모양새의 원목 책상 위에 놓인 보고서의 내용을 살피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통 믿을 수 없는 보고서의 내용 때문이었다.

그런 나의 반응을 본 왕실근위대장 부관, 카르스텐 바익스가 콧바람을 내쉬며 대답한다.

“흐으음... 저도 그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몇 번이고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근데 거기 쓰인 그대로였습니다.”

“대공이 자기가 데려온 병력을 모두 물렸다? 베겐스바흐로 모두 돌려보냈다는 거야?”

“정확히는 왕도에 마련한 대공의 거처를 지키는 호위병 몇 명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 봤자 스무 명이 조금 넘는 정도라 유의미한 숫자는 아닙니다.”

카르스텐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대체 무슨 속셈이냐, 루트비히...”

원작 소설에선 대공이 어떻게 반란을 준비했는지, 그 세부적인 내용은 묘사되지 않았다.

그저 반란을 일으킨 당일에 어디선가 우르르 대공의 병력이 쏟아져나와 일을 벌였고, 그 수가 생각보다 많아서 국왕파의 인물들이 크게 당황했다는 부분만 적혀 있었다.

“흐음, 대공의 거처 주변의 감시 정도를 더 올려라. 방심하지 않도록 하고.”

“예, 알겠습니다.”

***

왕도 카를리온, 베겐스바흐 대공의 거처_

“...”

이 공간의 주인인 베겐스바흐 대공, 루트비히는 부하가 가져다준 보고서의 내용을 살피고 있었다.

“용병 오십 명이라... 너무 적지 않나?”

루트비히가 살피던 보고서는 대계(大計)가 펼쳐지는 그 날 대공파 측이 동원할 용병들의 명단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전하.”

태연한 목소리로 루트비히의 말을 받으며 그의 곁으로 다가오는 한 사람.

그는 작달 만한 키에 어딘가 음침한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심지어 걷는 모습도 어딘가 뒤뚱뒤뚱 불안정해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왼쪽과 오른쪽 다리의 길이가 다른 선천적인 절름발이였다.

그의 이름은 귄터 에슬링 폰 로텐바인(Günter Esling von Rottenbein).

하얀 산맥 너머에 자리한 로텐바인 백작령의 주인이자 베겐스바흐 대공의 봉신 중 하나였다.

루트비히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귄터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대공파라 불리는 거대 파벌의 명실상부한 2인자이자, 대공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오른팔.

이것이, 바로 귄터라는 사내가 지닌 위상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는 절름발이라는 선천적 장애에 첩의 자식이라는 불리한 배경을 지니고 태어났음에도 비상한 두뇌를 이용해 정적들 제거하고 에슬링 가문의 가주가 되었다.

이어 주군인 루트비히의 휘하에서도 본인의 남다른 지모를 발휘해 활약하였고, 결국 대공파의 2인자라는 지금의 위치에 이르렀다.

그가 아니었다면, 루트비히는 압도적인 물량을 자랑하는 제국과의 전쟁에서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루트비히는 감히 왕위를 노릴 정도의 독자적인 세력을 일궈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늘 오만하고 폭압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루트비히도 늘 귄터에게는 조금의 관대함을 허락하는 편이었다.

바로 지금, 귄터가 루트비히 옆으로 절뚝거리며 천천히 다가오는 시간을 묵묵히 참아주는 것도 바로 그러한 관대함의 일면이리라.

“고작 오십의 병력이 충분하다? 어째서 그렇지?”

“예, 전하. 어차피 그 오십의 병력은 전투를 위해 동원한 병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흠...”

귄터의 대답을 들은 루트비히가 팔짱을 낀 채로 말없이 그를 바라본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

그리고 그런 주군의 눈빛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는 것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절름발이 사내는 루트비히의 책상 한쪽에 비뚜름한 몸을 기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 이 용병들은, 거사 당일 카를리온 번화가 곳곳에 불을 놓을 것입니다.”

“불을 놓는다?”

“예, 왕도의 혼란을 유도하는 역할이 이 친구들의 임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혼란을 이용해...”

스윽, 귄터의 품속에서 끈에 칭칭 감긴 두루마리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 이 안에 담긴 이들이, 전하의 대업(大業)을 도울 것입니다.”

그가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바치는 두루마리를 받아든 루트비히.

“...”

그가 두루마리를 감고 있던 끈을 천천히 풀어내고, 그 내용을 확인한다.

그리고,

“...!”

대화가 이루어지는 내내 감정 없던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오른다.

그만큼 두루마리에 담긴 내용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리라.

차륵-

이어 그는 보고 있던 두루마리를 내용이 보이지 않도록 책상 위에 뒤집어 놓은 뒤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 모두 자리를 비우도록. 로텐바인 백작과 긴히 할 얘기가 있다.”

“예, 전하.”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귄터를 제외한 모두가 루트비히에게 고개를 숙인 후 자리를 떠난다.

잠시 후, 자리에 남은 것은 방의 주인인 루트비히와 어딘가 비틀린 듯한 눈빛을 지닌 절름발이 사내 하나뿐.

곧, 침묵을 지키던 루트비히의 입이 열렸다.

“이건... 선을 넘었군, 자네.”

목소리는 작고 낮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감정은 명백한 분노(忿怒).

하지만 그 분노를 받아내는 귄터의 반응은 그저 태연할 뿐이다.

“제 손을 잡아 그 선 너머로 인도하신 건 전하이십니다.”

“지금 나랑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어찌 감히 제가 전하를 상대로 그런 불충한 짓을 하겠습니까. 그저, 전하를 위해 제 손에 더러운 것을 조금 묻혔을 뿐입니다.”

루트비히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귄터.

그리고 그러한 귄터의 태도를 한동안 바라보던 루트비히의 반응은...

“크하하하하핫!”

그야말로 광소(狂笑)라 불러 마땅할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 아닌가?

“그래, 그거지. 잘 했다, 귄터! 사내로 태어나 대업을 이루는데 어찌 손이 더러워지는 것을 걱정하겠는가!”

귄터가 다른 루트비히의 봉신들과 확연히 대비되는 한 가지.

그것은 바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다른 봉신들은 루트비히의 눈에 들고 싶어 하면서도 결코 앞장서서 자신의 손에 더러운 오물과 피를 묻히려 들지 않았다.

그저 루트비히의 명이 있을 때만 수동적으로 움직여 모든 일을 행했을 뿐이다.

반면, 귄터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루트비히의 마음을 귀신같이 알아챘고, 그의 입이 열리기 전에 먼저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온갖 세상의 비난이 쏟아졌지만, 귄터는 그런 것들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남들이 천형(天刑)이라 비난하는 절름발이의 어려움도 이겨내고 결국 가문의 주인이 된 사내였다.

세상이 보내는 온갖 비난과 모욕, 질시 등의 갖가지 부정적 감정을 버텨내는 것에는 이골이 난 인물이었고, 그렇기에 그런 것들에 대한 겁이 없었다.

방금 루트비히의 광소를 이끌어낸 두루마리 속의 내용 역시 세상이 안다면 대를 거슬러 오랫동안 비난을 받을 정도의 일이었지만, 귄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일을 해냈다.

국왕파의 인물들이 그를 일컬어 ‘지옥에서 온 책사(策士)’라 부르는 이유였다.

스륵- 탁!

내용이 보이지 않도록 책상 위에 거꾸로 두었던 두루마리를 다시 뒤집는 루트비히.

그 가장 윗줄에 쓰여 있는 이름은 바로...

[하샤신]

하얀 산맥 너머 제국의 황족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극악무도한 암살자들의 이름이었다.

***

“그간 격조했습니다, 군무대신 각하.”

“허허, 폐하의 곁을 지키느라 밤낮으로 고생 중인 근위대장 아니신가? 격조했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으니 넣어두시게.”

“후배의 예의 없음을 그리 포장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남작이 나의 후배라? 허허, 같은 검의 길을 걷고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구만. 자, 일단 앉게나.”

먼저 초대를 받은 후 바쁜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겨우 만든 군무대신 파울 루덴도르프와의 식사 자리였다.

군무대신이기 이전에 왕국의 유일한 변경백인 파울인 만큼, 그가 지내는 왕도의 거처는 그 어떤 귀족의 대저택 못지않게 화려하고 웅장했다.

물론, 매일 같이 왕성에서 지내는 내 눈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말이지.

“일단 식사부터 들지. 종일 일 하느라 시장했을 텐데 말이야.”

“감사히 먹겠습니다, 각하.”

끝도 없이 전해지는 각종 산해진미로 헛헛한 속을 채우며 변경백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듣자하니 자네가 사자기사단의 검을 봐주고 있다던데... 사실인가?”

“그게 벌써 군무부까지 소문이 다 퍼졌군요? 나름 조용히 한다고 한 것인데...”

“하하하!”

나의 대답에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린 파울이 비어있던 술잔에 붉은 와인을 채우며 말한다.

“이 사람아, 내가 명색이 왕국의 군무대신일세. 물론 사자기사단이 군무부 휘하가 아니라 폐하의 친위대이긴 하지만, 그래도 최근의 동향 정도는 파악하고 있지 않아야겠나?”

“하하,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검을 봐준 성과는 좀 있고?”

“아직은 그렇게 보낸 시간이 오래되지 않아 성과라 할만한 진전은 없었습니다만... 그래도, 눈빛들은 훨씬 좋아진 것 같습니다.”

“눈빛이 좋아졌다라... 허, 기사에게 있어 그 이상의 진전이 또 있겠나? 왕국을 위해 큰일을 해주었구만!”

“과찬이십니다, 각하.”

살짝 고개를 저으며 겸양을 보이는 내 모습에 파울을 손까지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과찬은 무슨.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거지만... 사자기사단 놈들, 이름값 못한 지가 꽤 되었단 말이지. 요 몇 년 동안의 사자기사단은 그저 돈 많은 도련님들이 모여서 좋은 갑옷에 좋은 칼 차고, 값비싼 말 타고 다니며 잘난 척하는 게 다였어. 하긴, 왕도의 평화가 너무 길긴 했지.”

‘왕도의 평화’를 언급하는 파울의 눈에 순간 불길이 번뜩인다.

왕국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충신들의 모임, 국왕파의 수장다운 눈빛이었다.

“... 그 평화를 위협할 폭풍이 다가오고 있네. 그 폭풍의 진원지가 어디인지는, 자네도 대강 짐작하고 있겠지.”

불길이 일렁이는 파울의 눈을 차분하게 바라보며, 나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 폭풍이 아무리 크고 거칠다 한들, 요제프 국왕 폐하께선 무사하실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요.”

“하하!”

콰앙-!

나의 대답을 들은 파울이 손바닥으로 식탁을 내리치며 웃음을 터트린다.

“내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하는군, 자네. 한데... 그 대답이 아주 마음에 들어. 과연 ‘왕국제일검’의 사위다운 자신감 아닌가!”

“...”

“사실, 예전에도 자네의 실력을 의심하진 않았지만 그게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선 긴가민가했었다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믿고 있지. 다름 아닌 그 사울 리카르도를 맨손으로 두들겨 주저앉히는 모습을 보았으니 말일세.”

나를 왕실근위대장의 자리에 앉혀준 그 날의 일을 언급하는 파울이었다.

“다닐렌츠 남작.”

“예, 각하.”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대는 그대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해주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네. 왕국의 충신이자, 폐하의 외숙으로서 말이야.”

“...”

파울의 말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다, 툭 던지듯 한 마디를 건넸다.

“몸조심하십시오, 각하.”

“응?”

“왕국의 적들은, 각하의 생각보다 더욱 강하고 악랄할 겁니다.”

“...!”

나의 말을 듣고 잠시 대답이 없던 파울.

허나 잠시 후 그는 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내게 말했다.

“하하! 걱정해주어 고맙네. 하지만 이 파울 루덴도르프, 아직 쓸만하다네. 비열한 왕국의 적들을 잡아다 그 모가지를 모조리 꺾어 놓을 정도의 힘은 남아 있음이야! 하하하하!”

***

그로부터 일주일 뒤.

나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려온 부관 카르스텐으로부터,

“대장님! 군무대신 각하가 암살당했습니다!!!”

파울 루덴도르프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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