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58화 (158/197)

대계(大計) (2)

대륙 남쪽 끝으로 가면 사방을 뒤덮고 있는 황금빛 모래의 물결이 보인다.

사막(砂漠).

살아있는 생명체라고는 도통 찾아볼 수 없고, 그곳에 들어갔던 이들 중 몸 성히 살아 돌아온 자가 없다고 알려진 죽음과 열사의 땅.

수백 년에 걸쳐 그 땅의 뜨거움과 척박함을 경험해온 이들은 그곳에 주신 아르닌의 대척점에 서 있는 악신의 이름을 붙여 ‘칼라닌 사막’이라 칭했다.

그 칼라닌 사막의 남쪽 끄트머리에 닿으면 만날 수 있는 바다.

끝없이 뻗어있는 그 푸른 수평선 위에 배를 띄우고, 남쪽 하늘을 밝게 비추는 물고기 자리를 등대 삼아 꼬박 아흐레를 나아가면, 사시사철 우울한 잿빛 하늘로 뒤덮인 커다란 섬 하나가 나온다.

섬의 크기는 족히 하나의 나라를 일구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크고 넓었다.

하지만, 그 섬에 사는 원주민들은 늘 궁핍하고, 안정적이지 못한 삶을 살았다.

이유는 분명했다.

섬의 한 가운데 쉴새없이 붉은 화염과 연기를 토해내는 거대한 활화산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수백 년을 거슬러 전해져 온 전설에 의하면, 그 산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분화구엔 그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거대한 적룡(赤龍)이 살고 있다고 했다.

감히 용의 영역에 자리 잡은 이들을 단죄하듯, 화산은 인간들이 새로운 문명을 이룩할 때마다 뜨거운 자신의 분노를 토해내어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렇게, 수백 번 피었다 지기를 반복하던 화산섬 원주민들의 삶에 새로운 길을 제시한 위대한 지도자가 등장한다.

지금까지도 정확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 사내는 섬에 살고 있던 모든 원주민을 불러모아 자신이 꿈속에서 화산섬의 주인이자 불을 다스리는 적룡(赤龍)의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 계시는 바다를 건너 멀리 북쪽으로 향하면 그들에게 오랜 영광과 환희를 안겨줄 약속된 땅이 기다리고 있으리란 내용이었다.

하지만 원주민들의 대다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설령 그의 말을 믿는다 하더라도 수백 년이 넘도록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삶의 터전을 버리고 바다 건너의 알 수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결국, 섬에 살던 수천 명의 원주민 중 그의 뒤를 따른 것은 고작 이백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

사내는 그 이백여 명의 추종자를 규합해 바다를 건널 커다란 배를 여러 척 만들었고, 꿈속 계시를 통해 받은 길일(吉日)을 골라 섬을 떠났다.

그리고 배가 섬을 떠나 먼바다로 나아갔을 때, 놀랍게도 역사상 기록된 적 없는 거대한 화산 폭발이 일어나 섬 전체를 용암과 화산재로 뒤덮어 버렸다.

사내의 뒤를 따르지 않고 섬에 남기를 선택했던 수천의 원주민들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멀리 바다 위에서 그 광경을 바라본 이들 모두가 적룡의 분노를 두려워하며, 자신들의 목숨을 구한 것에 안도하였다.

그렇게, 적룡의 계시를 받은 사내와 그의 뒤를 따르는 이백여 추종자들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적룡의 계시를 받은 대로, 그저 북쪽을 향해 하염없이 나아가던 그들.

지금이야 항해법이 많이 발달해 아흐레면 닿을 거리였지만, 당시의 그들은 먼바다의 거센 풍랑을 버텨내기엔 기술과 지식 모두 부족한 수준이었다.

그렇게, 아흐레면 도착할 거리를 돌고 돌아 열흘하고도 닷새 만에 도착한 육지.

이백여 명으로 출발했던 일행은 눈에 띄게 줄어들어 백 명이 조금 넘는 수준으로 변해있었다.

희생자의 대다수는 배가 침몰 되어 바다에 가라앉았고, 어떤 이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었으며, 어떤 이들은 병이 나 죽었다.

다행히 그들이 도착한 곳은 작은 숲에 나무가 무성하고 맑은 물이 가득한 호숫가였기에, 오랜 항해에 지쳐있던 이들 모두 그곳에 머물며 굶주렸던 배를 채우고 체력을 회복했다.

그들이 평생 살아왔던 화산섬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운 땅.

모두가 적룡의 계시 속에 언급된 ‘약속된 땅’이 바로 이곳이라며 기뻐했다.

하지만 유일한 한 사람, 그들을 이곳까지 이끌어온 사내는 그 같은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적룡이 점지한 약속의 땅은 이보다 더욱 북쪽에 자리해있으며, 고작 ‘이 정도’의 풍요함으론 오랜 영광과 환희를 이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시 한번 선택의 순간이 왔다.

남은 백여 명의 사람 중 절반이 넘는 숫자가 지금 있는 곳에 남는 것을 택했다.

이미 바다를 건너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가족과 친구를 잃은 그들이었다.

그들의 앞에 놓인 것은 북쪽 언덕 너머로 끝도 없이 펼쳐진 거대한 사막.

보기만 해도 압도되는 그 광경을 눈앞에 두고 또다시 목숨을 걸 자들은 많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알기에, 사내는 남아 있기로 한 이들을 탓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뒤를 따르기로 한 서른 남짓의 사람들을 다독이며, 약속의 땅을 향한 험난한 여정을 인도할 뿐이었다.

다시 스무날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사막을 지나며, 사내와 그를 따르는 이들은 모두 지치고 병들어갔다.

대사막의 가혹함은 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바다 그 이상이었다.

낮에는 살가죽을 태울 듯 내리쬐는 태양에 고통받았고, 밤에는 극심한 추위와 모래 밑에서 기어 나오는 전갈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물을 구할 수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극심한 탈수에 시달리던 동료가 정신을 잃고 모래밭 위에 쓰러져도 다른 이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들 역시 당장 쓰러질 만큼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이 고된 여정의 끝에 약속의 땅이 있으리란 믿음 하나로 버티어 나아가던 이들.

그런 그들의 앞에,

“드디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펼쳐진 황금빛 밀밭과 수많은 과실을 품고 있는 거대한 숲을 모두 지닌 곳.

‘약속의 땅’이 나타났다.

***

턱-

읽고 있던 책, ‘쿠르펠리안 제국 건국기’를 잠시 책상 위에 올려둔 베겐스바흐 대공, 루트비히가 오랜 독서로 피로해진 눈을 천천히 문질렀다.

십수 년간 준비했던 대계의 실행을 코앞에 둔 터라 심란해진 마음을 달래려 시작한 독서였다.

더불어 그 책 안에 등장하는 어느 단체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기 위함도 있었다.

며칠 전 그의 심복 귄터 에슬링이 전해준 두루마리에 적혀 있던 이름.

‘...하샤신.’

그 이름을 지닌 이들에 대해 이해하려면, 현 대륙의 최강대국이라 불리는 쿠르펠리안 제국의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

적룡의 계시를 받은 위대한 지도자의 뒤를 따라 고향인 대륙 남부의 화산섬 쿠르펠을 떠난 원주민들.

그들은 거센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와 지옥 같은 열기가 끓어오르는 대사막을 거쳐 마침내 적룡이 예지한 그곳, ‘약속의 땅’에 도착했다.

그들이 도착한 땅의 풍요로움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사람이 따로 무엇을 하지 않아도 들판에선 온갖 곡물과 과실수가 쑥쑥 자라났고, 근처에 자리한 강은 물이 마르는 법이 없었다.

그야말로 문명을 이룩할 천혜의 환경이었던 것.

먹을 것이 풍족하니 저절로 사람의 수는 늘어났고, 살아남은 열댓 명의 쿠르펠 이주민들로부터 시작된 작은 사회는 이십여 년 후 수백 명을 아우르는 거대한 부족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처음 쿠르펠 사람들을 이끌어 이곳까지 데려온 위대한 지도자가 그때까지도 처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

신화와 전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이란 대개 그러하듯, 불로(不老)의 신비를 지닌 사내는 덩치가 커진 자신의 부족을 이끌고 정복 전쟁을 벌였고, 다시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주변 일대의 모든 부족을 일통(一統)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그는 자신의 고향인 대륙 남부의 화산섬 쿠르펠의 이름을 딴 나라를 세우게 되니, 그것이 바로 현재의 대륙 최강대국인 쿠르펠리안 제국이다.

“전형적인 영웅 서사지. 신화와 전설을 곁들여 집권 세력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방법이라...”

혼잣말을 읊조리며 빠르게 책장을 넘기던 루트비히의 손이 멎은 것은, 그가 찾던 단체의 이름이 등장한 순간부터였다.

[... 하샤신은 제국의 시조(始祖)가 벌인 정복 전쟁 과정에서 학살당한 몇몇 부족들의 후손이 모여 제국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만든 비밀결사조직이다...]

“... 그냥 비밀결사가 아니지.”

듣는 이 없는 루트비히의 혼잣말에 묘한 긴장감이 어린다.

그들과 손을 잡기로 한 이후 마음 한구석에 형언할 수 없는 불편함이 생겨난 그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

바로, 하샤신이 대륙 최악의 명성을 지닌 암살단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 그들은 제국의 눈을 피해 오랜 세월에 걸쳐 산속 깊은 곳에 자신들만의 왕국을 세웠다. 그 장소가 어디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지 그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다.]

[... 하샤신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후, 지난 2백여 년간 목숨을 잃은 제국의 인물들은 수도 없이 많다.]

[... 고관대작부터 천한 하층민까지, 하샤신은 제국인이라면 신분을 가리지 않고 죽였다. 그들에게 있어 제국의 이름 아래 사는 이들은 자신들의 조상을 죽인 복수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 제국의 고위 관료는 물론이고 거대한 부를 축적한 상인, 명성 높은 장군들과 기사, 심지어 음유시인과 연극배우 같은 이들도 어둠 속에서 찔러오는 하샤신의 검을 피하지 못했다.]

[... 과거 하샤신은 제국민을 상대로 한 암살만을 수행했다. 하지만 근래의 하샤신은 제국민이 아닌 타국의 사람들에게도 잔혹한 암살자의 검을 겨누고 있다. 학자들은 이러한 하샤신의 변화가 조직의 운영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사업 분야 확대’라 설명한다.]

[... 과거 제국에게 멸망한 조상들의 복수라는 빛나는 명분을 위해 검을 들었던 하샤신. 하지만, 지금의 하샤신은 그저 돈 몇 푼에 사람의 목숨을 취하는 천박하고 비열한 암살자 집단이 되어버렸다.]

“천박하고 비열한 암살자 집단이라...”

하샤신에 대한 글쓴이의 노골적인 비난 표현에 루트비히가 옅은 웃음을 짓는다.

“... 한 가지가 빠졌군.”

천박하고,

비열하나,

최고의 실력을 지닌, 암살자들.

“이제 슬슬... 그 늙은이를 만났으려나?”

책에서 눈을 뗀 루트비히의 시선이, 자신의 방 창문 너머 어둠이 내려앉은 왕도의 거리로 향했다.

저 어둠 속 어디선가 바삐 움직이고 있을 암살자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가 미소지었다.

***

“커억!!!”

라이에른-팔츠 백작령이 자랑하는 ‘폭풍 기사단’ 소속의 전도유망한 기사, 옌스 보나탈이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칼에 목을 찔리며 주저앉는다.

그는 십 년 안에 상급 기사의 경지를 넘볼 수 있을 정도의 재능이라는 평을 받는 대단한 기사였지만, 그런 그로서도 아무 기척도 없이 다가오는 검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암살자다!!! 각하를 지켜라!!!”

촤아앙-!

일행의 앞장을 서던 옌스가 무기력하게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한 라이에른-팔츠 변경백의 근위 기사단, ‘바르디안 가드’의 부단장 고트프리트가 다급한 함성을 지르며 자신의 검을 뽑았다.

‘...!’

문제는, 무려 상급 기사의 경지에 오른 그의 감각으로도 암살자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점.

왕국, 아니 대륙 전체를 놓고 본다고 해도 이 정도로 자신의 존재감을 완벽하게 지워내는 실력을 지닌 암살자는 많지 않았다.

‘... 설마?’

머릿속을 스치는 어떤 이름에 고트프리트가 경악하던 그 순간,

푹- 푸푹!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뻗어진 암살자의 칼날이 그의 등에 깊숙이 틀어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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