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계(大計) (4)
“대장님! 군무대신 각하가 암살당했습니다!!!”
부관 카르스텐이 전한 소식을 듣고 머리가 띵한 기분이었다.
펠리노어 왕국 유일의 변경백이자 군무대신인 파울 루덴도르프.
그는 현 국왕인 요제프 3세의 외숙부였고, 왕국의 양대 정치 파벌 중 하나인 국왕파의 수장이었으며 ‘북부의 패자(霸者)’라 불리는 시대의 거인이었다.
그런 이가, 왕도 한복판에서 살해당했단다.
“확실해? 피해자가 군무대신 각하가 맞나?”
“예, 확실합니다. 애초에 이 보고 자체가 군무부 쪽에서 온 거라... 추가로 각하의 둘째 아들인 바르디안 가드의 부단장, 고트프리트 루덴도르프 경도 암살자와의 전투 중 사망했다고 합니다.”
“대체 이게 뭔... 하아...!”
나는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며 신음했다.
현재 왕도의 상황은 내가 기억하는 원작 소설의 흐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전대 국왕인 하인리히 4세의 장례식 이후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야 했던 라이에른-팔츠 백작 파울은 군무대신이 되어 왕도에 머물러 있었고, 아예 원작에 등장하지 않았던 인물인 나는 왕실근위대장이 되어 소년왕의 곁을 지키는 중이다.
이 정도면 원작의 비극이 발생하는 걸 완전히 막지는 못해도, 그 시기를 상당히 늦출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라이에른-팔츠 백작 파울 루덴도르프는 내가 기억하는 원작의 시간대보다 훨씬 더 빨리 죽음을 맞이했다.
심지어 다른 곳도 아니고 왕국의 심장부, 왕도 카를리온의 한복판에서.
‘... 진짜 돌아버리겠군.’
원작의 파울은 지금 이 시기에 자신의 영지인 라이에른-팔츠 백작령의 주도 루덴스부르크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베겐스바흐 대공의 입장에선 그를 당장이라도 때려죽이고 싶었겠지만, 자신의 땅 가장 깊숙한 곳에 눌러앉아 있는 그를 잡을 방법이 없었다.
하여, 대공은 지금으로부터 몇 달 뒤에 있을 전대 국왕 하인리히 4세의 1주기 추모 미사를 노렸다.
미사 참석을 위해 왕도로 향하는 백작 일행을 가도에서 습격한 것이다.
백작의 근위대인 바르디안 가드를 뚫어내기 위해 거액을 주고 동원한 수백 명의 용병이 들판 가득 피를 뿌리고, 대공파 소속 귀족들의 휘하에 있는 여러 기사단이 무참히 갈려 나갔다.
훗날 기록된 해당 전투의 교환비는 거의 1 대 30에 달했다.
바르디안 가드 소속의 기사 하나를 쓰러뜨리기 위해 대공파 측의 병력 서른 명이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충분히 감수할 만한 희생이었다.
해당 전투로 대공은 국왕파의 수장인 라이에른-팔츠 백작 파울 루덴도르프의 머리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들은 국왕파의 가장 강력한 전력으로 꼽히는 바르디안 가드를 전멸시켰다.
백작의 사망 소식이 왕도에 전해진 바로 그 날, 대공은 야음을 틈타 반란을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원작 소설 <로스트 킹덤> 속에 등장하는 ‘창검(槍劍)의 밤’의 실체다.
하지만 현실에선 내가 대공의 계획을 상당 부분 뒤틀어 놓았기에, 당연히 그가 자신의 계획을 상당 시일 뒤로 미루고 재정비에 들어갈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대공은 그 같은 나의 생각을 비웃듯 더욱 과감한 행보를 선보였다.
그 결과가 바로 백작의 이른 죽음이었다.
“... 왕실근위대 전원 전시태세로 돌입한다. 휴가자와 비번인 인원들에게 복귀하라는 연락을 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나는 지금 바로 폐하에게로 가겠다. 군무대신 각하의 암살과 관련된 추가적인 보고가 들어오면 바로 가져오도록 해!”
“알겠습니다, 대장님!”
이후로도 나는 카르스텐에게 몇 가지 추가적인 지시를 하달한 뒤 곧바로 국왕이 있는 왕성의 심처로 향했다.
새카만 밤하늘에 무심하게 떠 있는 달의 모습이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
“어떻게 된 겁니까, 근위대장? 외숙부께서 암살당하시다니요!”
내가 도착했을 때, 파리한 안색으로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던 요제프 국왕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주변 시녀들에게 듣자 하니 백작의 암살 소식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는데, 허옇게 변한 얼굴색을 보니 이 어린 소년이 지금 얼마나 무섭고 놀랐는지를 알 것 같았다.
“진정하시지요, 폐하. 지금 사람을 풀어 상황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근위대장, 이게 어찌 된 것인가? 진정... 진정 루트비히 그 자가...!”
대강 짐작은 가나 누구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못했던 군무대신 암살의 배후.
베겐스바흐 대공, 루트비히 베르너 이그나티우스의 이름이 소년왕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아직, 아직이옵니다, 폐하. 아직은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섣부른 추측을 금하소서. 폐하의 말 한 마디에 왕국이 혼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정황이...”
“정황은 정황일 뿐, 그것이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확한 조사 결과가 알려질 때까지 말을 아끼소서.”
“아, 알았네.”
침착한 목소리로 국왕을 진정시킨 뒤, 나는 국왕을 근거리에서 모시는 이들에게 물었다.
“군무부에서 따로 올라온 보고가 있는가?”
“처음 군무대신 각하가 암살당하셨다는 소식을 전한 이후엔 추가로 전해진 얘기가 없었습니다.”
“추가로 전해진 게 없다라...”
하긴, 지금 군무부 입장에선 수장을 잃고 지휘 체계가 엉망이 되었으니 국왕에게 보고를 올리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군무대신을 노린 흉악한 무리가 아직 왕도 안에 머물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 이 시간 부로 왕성의 출입문을 폐쇄한다. 외부인 누구도 성안으로 들이지 마라!”
“알겠습니다!”
이어 나는 국왕에게 우선 허락을 득한 뒤 추가적인 명령을 내렸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소식은 모두 나에게 가져와라. 또한 왕실근위대의 검시를 받지 않은 그 어떤 형태의 물건도 폐하께서 계신 곳으로 들일 수 없다! 모두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서릿발 같은 기세를 내뿜는 나의 모습에 바짝 긴장한 모두가 머리를 조아리며 즉각 대답했다.
그렇게 대강의 정리를 끝낸 뒤 방을 빠져나가려는데...
“... 근위대장.”
기운이 쪽 빠진 목소리가 내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나는 즉각 몸을 돌려 국왕의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부르셨사옵니까, 폐하.”
“어디, 멀리 계실 것은 아니겠지요?”
왕으로서의 위엄을 지키려 애를 쓰고 있지만, 본능적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꼭 다문 입술이 덜덜 떨리고 있다.
나는 이 기구한 운명을 지닌 소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한 음색으로 마음을 전했다.
“신 왕실근위대장 데미언 카릴베르크, 늘 폐하의 옥음이 닿는 곳에 머물 것이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 그대만 믿겠소.”
“예, 폐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겠사옵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어린 군주를 일별한 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
국왕의 침소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방을 비우고 임시 집무실로 만든 나는 왕실근위대 병사들이 전해주는 여러 정보를 살피며 현황 파악에 주력하고 있었다.
“잠깐...”
그중 나의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내용의 정보가 하나 올라왔다.
[군무대신 암살 현장에 대공의 친위대인 암흑기사단 병력이 나타난 것으로 파악됨.
해당 병력은 암흑기사단 특유의 검은색 갑주를 입고 있었으며, 현장에 도착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신분을 밝힘.]
“... 이게 무슨?”
도통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었다.
앞서 국왕에게는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으니 군무대신 암살의 배후로 대공의 이름을 언급하는 일을 삼가라고 했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나는 대공이 군무대신 암살을 지시한 인물이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한데, 대공의 친위대인 암흑기사단이 군무대신 암살 현장에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뭐 내전(內戰)을 일으키겠다는 의도가 아니고서야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내가 확인한 보고서에는 암살 현장에 나타난 암흑기사단의 병력이 뭘 했는지까지는 나와 있지가 않아서, 지금 당장은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대, 대장님!!!”
한 손에 종이뭉치를 들고 헐레벌떡 내 방으로 뛰어들어오는 부관 카르스텐.
나는 그가 들고 있는 종이뭉치 안에 내가 알고 싶은 내용이 들어있음을 직감했다.
“빨리!”
“예, 여기 있습니다!”
촤악-
카르스텐의 손에서 뺏다시피 하여 넘겨받은 보고서의 내용을 빠르게 읽어 내린다.
어지간히 급하게 작성된 듯, 군데군데 오탈자가 눈에 띄는 그 보고서에 담긴 내용은...
“허!”
상상 이상의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 군무대신의 암살이 벌어지던 때, 대공도 습격을 받았다고? 이게 사실인가?”
“현재 파악하기로는... 예, 그렇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이게 어떻게 이런...”
내가 생각하고 있던 머릿속의 시나리오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럼, 군무대신 암살 현장에 나타난 암흑기사단은?”
“그 내용도, 보고서에 적혀 있습니다.”
“...!”
[베겐스바흐 대공은 암살자의 검에 팔을 크게 베이는 부상을 당했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졌으며, 그 즉시 암흑기사단 병력을 왕도 곳곳에 급파하여 혹시 모를 추가 피해를 막으려 시도함.]
그러니까, 암흑기사단이 군무대신 암살 현장에 나타난 이유는 군무대신을 죽이려던 게 아니라 암살자들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소리였다.
“... 암흑기사단이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군무대신 각하께서 암살자들의 공격에 치명상을 입으신 후였다고 합니다.”
“하아...”
이어지는 카르스텐의 보고를 들으며,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 완전히 당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법을 들고나와 판세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려버린 대공이다.
“... 그놈들은, 군무대신 각하와 대공을 습격한 놈들의 정체는? 나왔나? 밝혀졌어?”
“그것이...”
돌아가는 상황에 나 못지않게 당황한 카르스텐이 연신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답한다.
“... 하샤신, 이라고 합니다.”
“하샤신?”
“예.”
“그게... 내가 아는 그 하샤신? ‘제국의 적’이라 불리는 그 미친 암살자 놈들 말인가?”
“... 예, 맞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원작 소설을 수십 번 읽은 나지만 하샤신이 실제로 등장해 스토리에 영향을 끼치는 장면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나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내가 대공의 계획을 너무나 많이 뒤틀어 놓은 탓에 원작에 없던 전개가 진행된 거다.
하샤신을 끌어들여 왕도 내에서 정적인 군무대신을 제거하고, 대공 본인은 암살 시도의 또 다른 피해자가 되어 암살 배후의 의혹을 떨쳐낸다.
대공이 실제로 암살자에게 칼을 맞기까지 했다고 하니, 군무대신 암살의 배후로 그를 의심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 이렇게 되면, 수장을 잃은 국왕파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국왕파에 속한 모두가 진정으로 왕국을 위하는 충신일 리가 없다.
거의 절반은, 아니 대다수가 개인과 가문의 이익을 위해 국왕파에 줄을 대고 있었을 뿐일 터.
그런 상황에서 국왕파의 수장인 군무대신 파울 루덴도르프가 사망했으니, 적지 않은 이들이 대공파 측으로 편을 갈아탈 것이다.
이번 일로 뒤집힐 왕국의 정세를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대공파에서 이런 미친 계책을 만들어 낼 인물이라면...
‘... 귄터 에슬링, 그놈의 작품이겠지.’
대공의 지낭(智囊)이자 군사, 명실상부 대공파의 2인자인 로텐바인 백작 귄터 에슬링.
그놈의 존재를 뻔히 알고 있음에도 내가 기억하는 원작의 흐름만에 의지해 일을 처리했던 것이 오늘의 뼈아픈 결과를 낳았다.
“놈이 하샤신을 끌어들일 줄이야...”
그런데 순간, 나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하나.
과연 대공이 그토록 전설적인 암살조직을 끌어들여 목숨을 노린 사람이, 군무대신 하나뿐이었을까?
“... 젠장!”
콰당!
순식간에 방문을 박차고 달려나간 내 눈에 국왕의 침소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당당한 체구의 근위병 두 사람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문제 없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듯한 모습.
그러나 내 눈엔 보였다.
두 근위병 모두, 눈동자를 제외한 몸의 모든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 독(毒)!’
그 즉시, 나는 바닥을 박차며 검을 뽑아 들었다.
콰아앙!!!
어깨로 닫힌 문을 박살내며 국왕의 침소 안으로 진입하니, 막 손에 든 단검으로 잠든 국왕의 가슴을 내리찍으려는 시녀의 모습이 보였다.
“감히!!!”
슈아아아아악!!!
분노한 내 손에서 쏘아진 검이, 한줄기 빛살이 되어 공간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