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탈출 (1)
콰아앙-!!!
품속에 숨겨두었던 단검을 꺼내어 잠든 소년왕의 가슴을 찌르려던 하샤신의 암살자는 누군가 방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모든 암살자는 감각이 예민하다.
그 예민함은 보통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예민한 수준을 훌쩍 넘어선 경지.
특히 하샤신의 암살자들은 주변 가까운 곳에 날아다니는 파리의 움직임에 의한 공기 흐름의 변화까지 느낄 정도였다.
한데 그런 하샤신이 누군가 문을 부술 듯이 박차고 들어오는 순간까지 접근을 알아채지 못하다니?
‘... 왕을 죽일 생각에 너무 몰입했다!’
그 찰나의 순간, 하샤신은 단검을 치켜든 채로 눈동자를 움직여 출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그놈이다.
이번 임무의 가장 큰 난관이라 불린 상대.
커다란 키에 깎아놓은 듯 잘생긴 얼굴, 눈부시게 찰랑거리는 금발과 신비스러운 녹색의 눈동자.
그 존재 자체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인물.
왕실근위대장 데미언 카릴베르크.
그가 주군의 신변에 위험이 생겼음을 감지하고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났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제 막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온 이가 자신을 막기 위해 접근하는 것보다 자신이 국왕의 가슴을 찌르는 게 훨씬 더 빠를 테니까.
비록 그 이후 자신은 분노한 데미언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게 될 테지만 어차피 이곳 왕성에 잠입했을 때부터 살아 돌아갈 생각은 버렸다.
‘모든 것은 하샤신을 위해...!’
죽음으로서, 이 임무를 성공시킨다!
그래야 했는데...
슈아아아악-
“?!”
퍼어어억-!!!
별안간 울려 퍼진 둔탁한 소음과 함께, 그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
“후우! 후우! 후우...!”
들고 있던 검을 날려 국왕의 가슴을 찌르려던 암살자를 저지했다.
검에 실린 힘이 어지간히 셌던 모양인지, 검이 암살자의 머리에 박히는 걸 넘어서 아예 머리통 자체를 부숴버렸다.
암살자가 서 있던 뒤쪽으로 시뻘건 피와 뇌수, 박살난 두개골 조각이 나뒹굴었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해야 할 왕의 침실이 개판이 되었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 진짜로 위험했다.’
하마터면 눈앞에서 국왕이 칼에 찔려 죽는 모습을 볼 뻔했다.
바로 옆방에 있었으면서도 왕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면, 왕실근위대장 체면에 칼을 물고 죽으라는 말을 들어도 과하지 않으리라.
“대장니임!!!”
“비상, 비상이다아아!!!”
문을 박차는 굉음을 들은 것인지 사방에서 왕실근위대원들이 몰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폐, 폐하!!!”
“어떻게 이런...?!”
더불어 왕을 모시는 시종들과 시녀들도 우르르 몰려왔다.
“그, 근위대장...? 여긴 어쩐 일이오?”
그 소동에 잠에서 깬 국왕 요제프가 나를 보며 멍한 표정으로 묻는다.
방금 자기가 돌아가신 아버지 곁으로 갈 뻔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치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급히 침대 곁으로 다가간 내가 암살자의 시신을 등지고 서서 국왕에게 물었다.
아직은 어린 그에게 흉측한 시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어 나는 허락을 얻은 후, 한쪽 손으로 국왕의 눈을 가리며 품에 안아 들었다.
해가 지나 이제 열두 살이 된 국왕의 몸이 믿을 수 없이 가벼웠다.
앙상하리만큼 마른 팔다리에, 품 안의 소년이 겪어야 했을 그간의 마음고생이 느껴져서 괜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 폐하의 거처를 대비마마의 침소로 옮긴다! 왕실근위대, 길을 열어라!”
“예!!!”
***
“폐하의 처소에 암살자가 들어왔단 말입니까?!”
“예, 대비마마.”
“오, 주 아르닌이시여!!!”
한밤중에 국왕을 품에 안고 나타난 나를 보고 대비 카넬리아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왕국의 군무대신이자 개인적으로는 오라버니가 되는 라이에른-팔츠 백작의 암살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던 게 고작 몇 시간 전이었다.
이제 겨우겨우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아들이자 국왕인 요제프의 상태를 살피려 침소로 가려던 참인데, 그런 아들이 왕실근위대장의 품에 안겨 자신의 방으로 왔으니 얼마나 놀랄 것인가.
심지어, 왕의 처소에서 암살 시도가 있었다고 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오라버니에 이어 자식까지 잃을 뻔했다는 생각에 대비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떨었다.
“송구합니다, 대비마마. 모든 것이 다 저의 불찰입니다.”
“아니... 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대체 어떻게 암살자가 폐하의 침실에 들어갈 수가 있었던 겁니까? 겹겹이 지키고 선 근위병들의 감시를 뚫고서...”
대비의 궁금증에 대한 대답은 내 뒤쪽에 있던 나의 부관, 카르스텐이 대신했다.
“암살자가 폐하를 가까이서 모시는 시녀의 모습으로 위장해 침입했습니다. 침실의 청소를 담당하는 시녀였는데...”
“청소 담당 시녀? 내가 아는 그 시녀가 맞습니까? 그게 말이 되는...”
혼란스러워하는 대비에게 나는 침착하게 추가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암살자는 그 시녀와 비슷한 키와 체형을 지닌 자였습니다. 걸음걸이와 목소리마저 완벽하게 표현하는 재주를 가졌더군요. 그리고...”
“?”
“놈은 시녀를 죽이고, 그 얼굴의 살가죽을 뜯어 만든 특수한 가면을 썼습니다. 얼굴을 가까이 대고 확인하지 않으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정교한 물건이었습니다.”
“...!”
“저도 속았을 정도니, 아마 그 누구도 암살자의 정체를 밝혀낼 수 없었을 겁니다. 아마, 대비마마께서도 몇 번이나 그 위장한 암살자와 대화를 나누셨을 겁니다. 적어도 일주일 이상 폐하의 곁에 머물며 기회를 노린 것으로 보입니다.”
“허읍...!”
나의 설명에 놀란 대비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사람의 얼굴을 뜯어 가면을 만든다는 얘기 자체도 끔찍했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왕의 곁에 암살자가 머물고 있었다는 말이 더 충격적이겠지.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어버린 대비의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무협지에 나오는 전설적인 특급 살수들도 아니고, 시녀로 위장해 침투를 하다니...
‘이 미친 하샤신 새끼들 같으니... 이거 설정 붕괴 아냐?’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원작자에 대한 분노가 치미는 순간이었다.
“폐하, 그리고 대비마마.”
“...?”
“여러모로 불편하시겠지만, 폐하와 대비마마의 경호를 위해 당분간 방 안에 근위병을 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불안에 떠는 국왕에게 심리적 안정을 주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내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쉰 대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국왕 대신 답했다.
“... 어쩔 수 없지요. 그리하도록 하세요, 근위대장.”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마.”
***
왕도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든 군무대신 암살 사건 이후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왕실근위대를 동원해 왕성 내에서 암약 중이던 하샤신의 암살자 두 명을 추가로 발견해 처형했다.
아니, 발견되자마자 자결했으니 냉정히 말하면 처형이라고 부를 수 없겠지.
놈들이 왜 저항하지 않고 자결을 선택했는지는 대강 짐작이 간다.
‘... 나 때문이겠지.’
나랑 싸워봤자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깨끗하게 자결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자결의 순간,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목을 그어버리는 놈들의 모습에 나는 섬뜩함을 느꼈다.
차라리 수백, 수천 명의 적과 정면 승부를 벌이는 것이 낫지, 이런 무시무시한 독심(毒心)을 지닌 암살자를 상대하는 건 훨씬 어렵고 피곤한 일이다.
‘... 대체 이런 놈들이 얼마나 더 있는 거지?’
놈들은 전설의 암살조직 하샤신이었다.
이곳 <로스트 킹덤>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과거와 현재 시점의 지식뿐만 아니라 미래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도 모조리 관통하고 있어 그야말로 ‘신(神)’과 비견될 정도의 혜안을 지닌 나로서도 놈들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강대한 제국이 몇백 년간 국력을 기울여 토벌하려 했지만 끝내 실패했을 만큼 어마어마한 저력을 지닌 놈들이라는 사실밖에 모른다.
제대로 된 알맹이는 없고, 순 겉핥기식의 정보만 지니고 있다는 얘기였다.
‘애초에 원작 소설에서도 실제로 등장을 안 하는 놈들이었으니...’
하샤신의 지독함을 맛보고 치를 떨다 보니, 이런 놈들과 손을 잡아가면서까지 왕좌를 차지하려는 대공의 야망이 새삼 무섭게 느껴졌다.
‘내가 놈의 계획에 제동을 건 것이 문제였나...’
차라리 원작의 흐름대로 흘러가도록 놔두고,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해 대공의 야욕을 분쇄하는 쪽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이건 뭐 공략집에도 나오지 않는 악랄한 난이도의 히든 퀘스트가 등장한 꼴이 되어버렸으니...
“정말 지독한 놈들입니다! 하샤신이 악랄하다는 말은 몇 번이고 들어봤었지만, 실제로 맞닥뜨리고 보니 역사책에 나온 놈들에 대한 설명은 오히려 과소평가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하샤신에 대해 치를 떨기로는 나 못지않게 되어버린 카르스텐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지난 며칠간 나와 함께 왕성 내에 근무하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일일이 검문을 하느라 피로에 절어버린 그였다.
“그 대단한 제국 놈들이 치를 떨 정도의 악명이 그냥 생긴 것은 아닐 테지.”
“맞습니다. 대체 어떤 수련을 거쳤길래 그 정도의 독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인지... 악마와 계약을 한 것은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종교적인 얘기는 됐고, 왕성 바깥의 상황은 어떤가?”
“아, 예. 보고서 올려드리겠습니다.”
현재 카를리온 왕성은 왕실근위대장인 나의 직권에 의해 출입이 봉쇄되어 있었다.
“일단 왕도 내에서 군무대신 암살이라는 큰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대장님께서 왕성 출입 봉쇄 명령을 내린 것에는 대체로 귀족들도 이해를 하는 분위기입니다. 더불어 재상 각하께서 앞장서서 왕도 곳곳을 돌아다니시며 백성들의 동요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음, 재상 각하께서 고생이 많으시군.”
“다만, 왕성 봉쇄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슬슬 폐하의 안위를 걱정하는 귀족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혹시나 폐하께서 변을 당하신 것이 아니냐는 말인데, 그 여론을 주도하는 쪽은...”
“대공파 측이겠지.”
“예, 맞습니다.”
나의 짧은 대답을 들은 카르스텐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이건, 방금 다닐렌츠 상단 카를리온 지부에서 대장님 앞으로 보내온 서신입니다.”
“줘 봐.”
상단 지부에서 내게 보내는 서신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다닐렌츠 영지의 현 상황을 일주일 별로 요약해 만든 주간 보고서.
다른 하나는 다닐렌츠 정보부에서 특이 사항이 있을 때마다 내게 전하는 첩보 관련 보고서.
지금 카르스텐이 내게 건넨 것은, 그 둘 중 후자였다.
“... 대공의 거처에 출입하는 국왕파 귀족들의 숫자가 늘었다는군.”
“하!”
그 노골적인 변절의 움직임에 카르스텐이 분기(忿氣) 섞인 숨을 내쉬었다.
“군무대신 각하께서 그리되시자마자 편을 갈아타겠다는 것 아닙니까?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런...!”
“폐하를 모시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분노할 일이지만, 그들의 입장에선 살기 위한 몸부림이겠지. 뭐... 이해는 간다.”
씩씩거리는 카르스텐과 달리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리 답한 나는 입가를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다음 한 수(手)를 어떻게 두어야 할까?’
원작의 흐름을 알고 있기에 거침없이 발을 내디뎠던 지난날들과 달리, 작금의 사태는 오롯이 나의 지식과 감각에 기대어 판단을 내려야 했다.
하샤신이라는 예상 밖의 전력을 끌어들여 왕좌를 노리는 대공을 상대로 국왕의 목숨을 지킬 최적의 방법은...
‘... 다닐렌츠로 가야겠군.’
나의 근거지,
다닐렌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