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62화 (162/197)

왕도 탈출 (2)

왕성 봉쇄(封鎖).

왕국의 절대자가 머무는 거처답게 그 어떤 건축물의 입구보다 크고 웅장하게 만들어진 왕성의 정문이 장장 일주일 동안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자 왕국의 주인인 국왕 요제프 3세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왕도 내에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군무대신과 대공을 습격했던 그 흉악한 암살자 놈들이 폐하가 계신 왕성에도 여럿 숨어 들어갔다는데?”

“그, 그럼... 국왕 폐하께서도?!”

“아이고, 이를 어째!”

“그 어린 나이에... 아이고, 폐하아아아!”

“어휴우, 이것들이 다들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네?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는데 그딴 흉흉한 소리를 하고 있어?”

“아무 일도 없으면 대체 왜 왕성 문을 저리 닫아걸고 소식이 없는 건데?”

“그건 맞지. 뭔가 큰일이 벌어졌으니 며칠째 저리 문을 닫아걸고 있는 게 아니겠어?”

“왕성이 봉쇄된 게 벌써 일주일이야! 뭔 일이 났어도 단단히 난 게지!”

“주 아르닌께서 어찌 이리도 왕국에게 가혹하신지... 선대 국왕께서 돌아가신 지 채 1년도 안 되어서 이 무슨...”

국왕의 신변에 대한 걱정과 우려는 자연스럽게 다음 대 국왕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국왕 폐하의 나이가 너무 어리시니, 나라 밖의 흉측한 놈들이 숨어들어 이 난리를 피우는 거 아니겠나?”

“그건 맞지. 에휴, 열두 살이면 우리 아들내미보다도 두 살은 더 어린 나이인데...”

“그나저나, 정말로 국왕 폐하께서 돌아가신 거면 다음 왕은 누가 되는 거지? 지금 국왕 폐하는 자식이 없잖아?”

“어허, 그러네?”

“지금 남아있는 왕족 중엔... 베겐스바흐 대공이 가장 승계 서열이 높지 않나?”

“헉! 그럼 진짜로 대공이 왕이 되는 거야? 나 그 양반은 별로던데... 보니까 엄청 잔혹하고 무서운 성격이라면서?”

“근데 뭐 어쩔 도리가 있나? 그 양반 말고는 대안이 없는 것을...”

“오히려 잘 된 것일 수도 있어! 대공이 성격이 포악하니 뭐니해도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양반 아닌가?”

“그렇긴 하지. 대공이 왕이 되면 적어도 암살자 놈들이 왕도에서 설치고 다니는 꼴은 없을 거 아닌가?”

“어으, 난 그래도 대공은 좀 싫어. 보아하니 자기 형님인 선대 국왕 폐하의 장례식에도 안 왔다던데... 적어도 사람의 도리는 해야 하지 않나, 이 말이야!”

이처럼, 사람들은 대공이 다음 대 국왕이 되는 것에 대해 뜨악해하면서도 그 외의 대안이 없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이런 분위기는 귀족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져나가, 지난 일주일간 왕도 곳곳에선 대공파의 유력 귀족에게 줄을 대려는 국왕파 귀족들의 비밀스러운 움직임이 줄을 이었다.

“지난 며칠간 숙고한 결과, 왕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물은 역시 베겐스바흐 대공 전하뿐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허허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드디어 남작께서 용단을 내리셨군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직은 폐하의 상태에 관해 무엇하나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고, 저잣거리의 무지몽매한 자들만이 폐하께서 변을 당하셨다며 함부로 떠들고 있다지만... 왕국 신민들의 안위를 생각하면 그런 헛소리조차 귀담아듣는 것이 귀족으로서의 의무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입니다!”

“늦게나마 대공 전하의 대업에 한 손을 보태려 합니다. 비록 미천한 능력일 뿐이지만, 왕국과 대공 전하에 대한 충심만은 진심으로...”

국왕파의 수장인 군무대신, 라이에른-팔츠 백작 파울 루덴도르프의 암살로 인해 급격하게 대공파 측으로 기울어버린 왕도의 정세(政勢).

이동하는 권력의 냄새를 맡고 반대편으로 우르르 넘어가는 박쥐 같은 자들의 행태에 국왕파의 충신들은 분통을 터트렸지만, 당장은 그들로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굳게 닫힌 성문 너머에 머무는 그들의 어린 군주가 무사하길 바랄 뿐이었다.

***

왕도 카를리온, 베겐스바흐 대공의 거처_

“아직도 왕성 내부의 소식은 들어온 것이 없는가?”

“예, 그렇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싸늘한 한기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주변의 가신들을 둘러보던 중년의 사내.

베겐스바흐 대공, 루트비히가 돌아온 대답에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 귄터.”

“예, 전하.”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깊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로텐바인 백작 귄터 에슬링이다.

“하샤신 놈들이 왕성에 투입한 암살자의 수가 몇이라고 했지?”

“제가 알기로, 총 세 명이었습니다.”

“세 명?”

귄터의 대답을 들은 루트비히의 얼굴이 일그러뜨린다.

군무대신 파울 루덴도르프를 죽이는 데 열 명이 훌쩍 넘는 암살자가 투입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던 그였다.

근데 일국의 군주를 죽이기 위해 투입된 암살자의 수가 고작 세 명이라니?

“... 왜 그것뿐이지? 고작 세 명으로 뭔 일을 할 수 있겠나? 파울 그 늙은이의 목을 따기 위해 투입했던 암살자는 열이 넘었다고 들었다. 근데 세 명?”

하지만 짜증 섞인 루트비히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귄터는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왕성에 투입된 암살자의 숫자가 적은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전하.”

“그만한 이유라.”

“예. 제가 지금부터 설명하겠습니다.”

흠흠, 꽤 긴 이야기를 하려는 듯 몇 차례 목을 가다듬은 귄터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선, 전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왕성에 잠입하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왕성에 잠입하는 임무를 담당하는 암살자들은 탁월한 수준의 은잠술과 위장 능력이 필요하고, 여기에 더해 왕성이라는 임무 수행 장소의 특수함을 고려하여 발각 즉시 자결을 해야 하는 독심(毒心)까지 갖춰야 합니다. 아무리 하샤신이 전설적인 암살 조직이라 한들 이런 능력을 갖춘 암살자가 흔하겠습니까?”

“흐음...”

“능력이 부족한 어설픈 자를 왕성 내부에 투입해봤자 미리 발각되어 임무의 실패 가능성만 높일 뿐입니다. 하여, 하샤신 측에서 최고의 실력을 지닌 암살자만을 선발하여 왕성으로 들여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게, 지금 들어간 3명이다?”

“예, 그렇습니다.”

귄터의 설명을 들은 루트비히가 별다른 말 없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이켰다.

표정은 변함없이 차가웠지만, 귄터는 자신의 주군이 방금의 설명을 듣고 품고 있던 의문을 해소했음을 느꼈다.

“설령, 왕성에 투입한 암살자들이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에겐 나쁠 일이 없습니다. 어린 국왕은 누군가가 자신의 목을 노리고 숨어들었다는 사실에 잔뜩 움츠러들어 왕좌를 유지하는 것에 부담을 느낄 것입니다. 자연스레 국왕 본인과 그 어미인 대비는 머릿속에 양위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되겠지요. 일종의... 겁박(劫迫)이랄까요? 그것만으로도 성과는 충분합니다.”

“양위라... 그래, 어쩌면 어린 조카가 죽고 없는 빈자리에 냉큼 오르는 것보다는 그쪽이 보기엔 더 좋겠지.”

“왕도의 분위기 역시 술렁이고 있습니다. 저잣거리의 여론은 물론이고, 귀족 사회도 크게 동요 중입니다. 이미 국왕파에 붙어 있던 왕도 내 귀족들의 3할 정도가 우리 쪽으로 배를 갈아탔습니다.”

“음... 국왕파 놈들이 군무대신 암살의 배후를 찾기 위해 혈안이던데?”

“라이에른-팔츠 백작이 죽고 없는 지금, 국왕파는 제대로 힘을 모을 수 없을 것입니다. 머리를 잃었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이제 국왕파는 머리에 자루를 뒤집어쓴 황소와 같은 형국이 되었습니다. 앞과 뒤, 위와 아래를 분간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들이받다가 제풀에 지쳐 쓰러지게 되겠지요.”

“핫하! 자루를 뒤집어쓴 황소라...”

귄터의 그 표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루트비히가 보기 드물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다시 차가운 얼굴이 되어 자신의 군사에게 물었다.

“혹, 누군가 등장해 죽은 파울의 자리를 대신할 가능성은?”

“결단코 없습니다.”

“없다?”

“예. 라이에른-팔츠 백작이 국왕파 내에서 보여주었던 막강한 영향력을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은 없습니다. 애초에 국왕파라는 세력 자체가 백작의 존재감 위에 세워진 성과 같았습니다. 백작의 죽음과 함께 성을 떠받치던 땅이 무너졌으니, 이제 국왕파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음...”

“혹시라도 전(前) 왕실근위대장인 바이펠베르크 백작이 왕도에 남아있었다면 모를까... 그 역시 사위에게 근위대장 자리를 넘겨주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으니, 사실상 대안이 없는 셈이지요.”

“혹, 재상은 어떤가?”

암살당한 라이에른-팔츠 백작을 대신해 국왕파를 이끌 새로운 수장으로 왕국의 노 재상(宰相), 라우링겐 백작 알베르투스 헴펠을 떠올린 루트비히였다.

하지만 그런 루트비히의 말에 귄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라우링겐 백작은 군주가 아닌 펠리노어 왕국 그 자체에 충성을 바치는 인물입니다. 그러한 신념을 보여주듯, 재상은 그동안 국왕파에도, 우리 대공파에도 발을 걸치지 않았지요. 그런 인물이 뒤늦게 국왕파의 머저리들과 손을 잡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정쟁(政爭)의 고단함을 감수하기에 그는 너무 늙은 몸입니다.”

“그렇군.”

귄터의 길었던 설명을 듣고 흡족한 표정이 된 루트비히가 술잔을 들어올리며 혼잣말을 읊조린다.

“후우... 우리 어린 조카, 요제프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실로 궁금하구나. 어서 얼굴을 봤으면 좋겠는데... 죽었건 살았건, 어느 쪽이든 말이다. 하하하!”

***

옅은 눈발이 흩날리는 이른 아침이었다.

왕실근위대 부대장 빈프리트 퀴블러(Winfried Kübler)가 지난 일주일간 굳게 닫혀 있던 왕성의 문 앞에 서서 큰소리로 외쳤다.

“왕실근위대, 문을 열어라!!!”

“예!!!”

빈프리트의 명령을 받은 근위병들이 문 양쪽으로 달려들어 힘을 쓰기 시작한다.

“흐으으음!”

“흐랏차!”

그그그그그...

천천히 열리는 왕성의 정문.

열린 문 사이로 왕성 앞에 운집한 수많은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막 해가 떠오른 이른 아침, 한겨울의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왕의 상태를 걱정하여 왕성 앞에 모인 이들이었다.

“오!”

“열린다, 열려!!!”

“폐하! 폐하아아아! 무사하십니까!”

“폐하아아아!!!”

“무탈하십니까, 폐하!!!”

“폐하의 백성들이 왔습니다!!!”

모여 있던 이들의 대다수는 국왕을 걱정하는 순수한 마음에 모여 있던 평범한 백성들이었지만, 개중의 몇몇 인물들은 국왕의 신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대공파 측에게 전달할 요량으로 성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곧, 그들은 왕성의 문이 열리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며 성문 안쪽의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폐하께서는 어디 계신가? 폐하! 폐하아아아아!”

“길을 열어라, 이놈들!!! 폐하께 왕국의 진정한 충신, 코를하임 남작이 왔다고 전해라!”

“물러서십시오!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어허, 무엄하다! 어디 감히 귀족의 몸에 손을 대느냐!”

난장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감히 왕성 앞에서 이따위 소란을 피울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이들.

하지만 지난 며칠간 대공파가 왕국 안팎을 장악하고 권세를 누리는 상상에 취해 있던 이들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이놈들! 왕국의 충신이 주군의 안위를 확인하려는데 길을 막는 것이냐?”

“사전에 출입 재가를 받으셔야 합니다. 이렇게 함부로 들어오실 수는 없...”

“어허! 그것은 평시에나 그런 것이지, 군무대신께서 암살당하고, 대공 전하께서도 간악한 암살자의 공격에 피습당하신 상황에서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있느냐? 어서 길을 열어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스스로를 코를하임 남작이라 밝힌 중년의 사내를 비롯한 대공파의 귀족 몇몇이 근위병을 윽박지르며 왕성 안쪽으로 출입하려던 그때,

촤아아아앙-

사방의 혼란을 잠재우는 경쾌한 발검음이 들리고,

슈아아아앙- 투드득!

“어흑!”

“뭐, 뭐야?!”

“어, 어떤 놈이냐!!!”

근위병들의 앞에서 소란을 피우던 귀족들의 외투 자락과 단추 따위가 한순간에 잘려나갔다.

이어, 마치 땅에서 솟아난 듯 그 자리에 등장한 한 사내의 입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왕실근위대장의 권한으로 말하노니, 그 이상 접근하면 즉시 참하겠다.”

“...!”

“의심스러우면 발을 내디뎌 보도록. 그 어디든 몸통에서 떨어져 바닥에 구르는 모습을 보게 될 테니.”

“... 그, 그게!”

겁에 질린 얼굴이 된 귀족들이 뭐라 입을 열려고 하던 그 순간,

휘잉- 스르릉- 탁!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동작으로 들고 있던 검을 허리춤으로 돌려보낸 왕실근위대장, 데미언 카릴베르크가 자신의 뒤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인다.

이어 들려오는 근위병의 함성.

그 목소리를 들은 장내의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엎드린다.

“주 아르닌의 축복을 받은 이 땅의 유일한 지배자, 펠리노어 왕국의 온당하신 주인, 요제프 레나투스 피오 카를 폰 펠린느 국왕 폐하에게 모두 예를 갖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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