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탈출 (3)
굳게 닫혀 있던 왕성 문을 열어젖히기 전, 나는 밤을 새워가며 국왕 요제프를 설득했다.
그 설득의 내용은 다름이 아니라 왕성의 봉쇄가 풀린 후 직접 거리로 나아가 혼란에 시달렸던 왕도의 백성들을 위로해주는 것이 어떻겠다는 것이었다.
며칠 전 하샤신의 암살자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던 어린 소년왕에게는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제안.
하지만 국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나의 말을 믿고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내 눈앞에 있다.
“폐하! 어흐으윽! 무사하셨군요!”
“그동안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폐하! 무사하시어 정말 다행입니다!!!”
“과인을 걱정해주어 고맙다! 그대들의 걱정 덕분에 나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무사할 것이다.”
“펠리노어 왕국 만세에! 요제프 3세 국왕 폐하 만세에에!!!”
왕성 앞에 구름처럼 몰려든 귀족과 백성들에게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전하는 어린 국왕.
그는 많은 이들의 앞에 서 있다는 긴장과 암살에 대한 두려움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등 뒤로 감추며 애써 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제법이야.’
그 모습이 대견하기도, 딱하기도 해서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대장님, 이제 들어가실 시간입니다.”
나의 곁에서 눈을 부릅뜨며 수상한 움직임이 있나 감시하던 부관 카르스텐이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의 말에 대답한 후, 사람들에게 미소를 짓고 있던 국왕 요제프에게 다가가 말했다.
“폐하, 이제 왕성으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아, 그런가?”
“예, 폐하. 충분히 왕도의 백성들에게 폐하의 마음이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음, 근위대장이 그리 말해주니, 마음이 놓이는군.”
말투는 한껏 근엄한 척하고 있지만,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선생님에게 칭찬받은 어린 학생과 다르지 않았다.
“크흠! 그럼, 왕성으로 돌아가시죠.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튀어나오려는 미소를 애써 참으며, 나는 국왕을 호위해 왕성으로 복귀했다.
***
“... 요제프가, 왕성 밖으로 나와 왕도의 백성들을 만나고 다녔다?”
“예, 전하.”
“허! 그 꼬마 놈에게 그 정도의 배짱이 있었나...”
왕성 봉쇄를 풀고 밖으로 나온 국왕 요제프가 왕도의 귀족과 백성들에게 건재한 모습을 보였다는 소식을 들은 베겐스바흐 대공 루트비히는 거칠게 자라난 수염을 쓸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알고 있는 조카 요제프가 했다기엔 너무나 과감하고 정치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하샤신의 암살자가 왕성에 들어가지 못했던 게 아닌가?”
“아닙니다. 제가 파악하기로는 분명히 3인의 암살자가 왕성 내에 진입했습니다. 하샤신에서 가려 뽑은 최고 실력의 암살자들이...”
“그런데, 왜 그 꼬마 놈이 멀쩡하지? 죽진 않더라도 팔 한쪽 정도는 없어졌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면 눈깔 하나라도 뽑혀있던가.”
자신의 친조카인 국왕 요제프를 두고 잔혹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꺼내는 루트비히였다.
주군의 불편한 심기를 감지한 대공파의 군사, 귄터 에슬링이 더욱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한다.
“왕성의 봉쇄가 풀렸으니, 곧 왕성 안에서 근무 중인 저희 측 인원에게서 보고가 들어올 것입니다. 노여움을 푸시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전하.”
“... 알았다.”
화가 나기에 앞서 루트비히 본인도 왕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무척 궁금해하고 있었기에, 그는 끓어오르는 화를 잠시 누그러뜨리기로 한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채 하루를 넘기지 않아 루트비히와 귄터는 왕성에서 암약 중인 대공파의 인물에게 그간 있었던 일의 내용을 전달받게 된다.
“... 결국, 다닐렌츠 남작 그놈인가?”
으드득-
왕실근위대장인 다닐렌츠 남작, 데미언 카릴베르크가 왕성 내에 숨어든 하샤신의 암살자를 모조리 잡아 죽였다는 첩보를 입수한 루트비히가 분노로 이를 악물었다.
“그 근본도 없는 잡종 놈이 사사건건 우리 계획에 훼방을 놓는구나.”
“... 죄송합니다, 전하.”
착 가라앉은 루트비히의 목소리에 담긴 분노를 알아차린 귄터가 마른 침을 삼킨다.
루트비히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대공파의 명실상부한 2인자 자리에 올라 있는 자신이었지만, 빠르게 올라온 만큼 언제건 그의 눈 밖에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진즉 죽여 버려야 했는데, 당장 삶아 먹기엔 덩치가 너무 커졌다.”
“아닙니다, 전하! 방법은 있습니다.”
“방법이라, 말해봐라.”
“전임 왕실근위대장, 그러니까 바이펠베르크 백작을 제거하기 위해 왕실근위대 내에 투입했던 우리 측 인물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자를 이용해 다닐렌츠 남작을 제거하면 될 것입니다.”
재빠르게 튀어나온 귄터의 대답을 들은 루트비히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연다.
“이번엔, 실수 없기를 바라지. 로텐바인 백작.”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
***
베겐스바흐 대공 루트비히가 자신의 거처에서 나름의 모략을 꾸미고 있던 그 시각.
국왕 요제프를 모시고 왕성으로 돌아온 나는 이후의 전략 수립에 고심 중이었다.
“... 하여, 소신의 판단으로는 폐하께서 왕도를 떠나시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그 내용의 무거움을 생각해 국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시녀들은 물론이고 근위병까지 모두 물린 채 국왕 요제프와 그의 어머니인 대비 카넬리아, 그리고 나까지 세 사람만이 자리한 비밀회의였다.
왕도를 떠나야 한다는 내 말에 당연히 국왕과 대비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근위대장, 왕국의 상징이신 국왕 폐하께서 어찌 왕도를 떠나실 수 있겠습니까? 왕실의 법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대비가 고개를 저으며 침통한 어조로 말했지만, 나는 단호한 눈빛으로 답했다.
“대비마마께서 어떤 심정으로 그리 말씀하시는지 이해가 갑니다만... 지금은 왕실의 법도를 따질 상황이 아니옵니다. 두 분께서도 잘 알고 계실 테지만... 이미 왕도는 대공파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왕성 내에 암약 중인 여러 첩자에 의해 폐하의 일거수일투족이 대공에게 전달되고 있고, 그 정보를 토대로 그들은 감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일을 꾸미고 있을 터.”
“하지만...”
주저하는 국왕과 대비를 설득하기 위해 나는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지금껏 대공이 반역을 일으키지 않고 자신의 거처에 웅크리고 있었던 이유는 왕성에 숨어든 하샤신의 암살자들이 참변(慘變)을 일으키는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폐하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어 더는 왕업을 이어가실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자연스럽게 그 명분을 내세워 양위(讓位)를 받으려 했겠지요.”
“어찌 그런... 왕국의 봉신들이 가만있겠습니까?”
“말이 안 된다 생각하시겠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대공파의 참람된 음모를 막아줄 국왕파 세력이 수장인 라이에른-팔츠 백작의 죽음과 함께 지리멸렬해 그 힘을 잃었기 때문이지요.”
내가 오라비인 라이에른-팔츠 백작의 죽음을 언급하자, 눈에 띄게 표정이 어두워지는 대비 카넬리아였다.
국왕의 가장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었던 라이에른-팔츠 백작의 죽음과 함께 왕도의 상황이 급작스럽게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다행이도 왕성에 숨어든 암살자들은 모두 척살되었고, 왕좌를 평화로운 방법으로 넘겨받겠다던 대공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대공이 선택할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국왕과 대비의 떨리는 눈빛을 똑똑히 마주한 채로 말을 이었다.
“대공은 자신의 군사들을 앞세워 저를 비롯한 폐하의 충신들을 모조리 주살(誅殺)하고, 옥체를 억압한 뒤 강제로 왕좌를 빼앗을 것입니다.”
“...!”
“왕국의 봉신들이 군사를 일으켜 폐하를 구하고자 마음을 먹더라도, 그들은 이곳으로 달려올 수 없습니다. 봉신들은 국왕의 허락 없이 왕실직할령 카를란트로 군사를 끌고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봉신들에게 왕명을 내리면...”
“폐하의 명을 받아 왕국의 봉신들에게 향할 사신은 카를란트를 벗어나지 못하고 대공의 군사들에게 붙잡혀 목이 떨어질 것입니다.”
“...!”
“군무대신께서 살아계실 때는 왕도 내에서 힘의 균형이 이루어졌지만... 이제는 그 균형이 무너졌습니다. 왕도 내에서는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나의 설명을 들은 국왕과 대비의 얼굴이 더 나빠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두워진다.
한참 동안 이어지던 침묵, 그나마 어른인 대비가 먼저 입을 열어 나에게 물었다.
“... 대공의 감시 속에 왕도를 빠져나가는 일 자체가 쉽지 않을 테지만, 그 일의 어려움은 나중에 생각할 일. 그렇다면 폐하를 어디로 모셔야 하겠습니까?”
“폐하를 모실 곳으로 떠올린 장소는 크게 크게 세 곳이 있습니다.”
“계속 말씀하십시오, 듣고 있습니다.”
“우선은 대비마마의 고향이신 라이에른-팔츠 백작령입니다. 왕가에 대한 충성심은 말할 것도 없고, 강력한 군사력 역시 갖춘 곳입니다. 그곳이라면 능히 폐하를 보필하여 대공과 승부를 겨룰 수 있겠지요.”
“하지만... 대공 역시 폐하가 라이에른-팔츠 백작령으로 몸을 피하리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북쪽으로 향하는 가도는 모조리 대공 측의 손이 닿아 있을 것입니다.”
“흐음...”
대비 역시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이해하는 표정이었기에, 나는 지체하지 않고 다음 후보지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다음으로... 제 장인이시자 전임 왕실근위대장이신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영지로 가는 것입니다.”
“음, 바이펠베르크 백작이라면 충분히 믿을만하지요.”
장인어른의 이름을 듣자 얼굴이 밝아지는 국왕과 대비 카넬리아였다.
장인어른이 얼마나 두 사람에게 신뢰받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단적인 예였다.
“하지만... 바이펠베르크로 향하는 것에도 위험이 적지 않습니다.”
“위험이라면?”
“단순히 직선거리만 따지자면 라이에른-팔츠보다 가깝지만, 중간에 포나우 강을 건너야 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
“포나우 강은 배가 없다면 건널 수 없기에, 대공 측이 대비하기에도 쉬울 것입니다. 배를 띄울 수 있는 항구와 나루터에 군사를 보내면 바로 우리의 발목을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더불어 바이펠베르크의 지척에 가장 강력한 대공의 지지세력 중 하나인 바덴하임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만약 어찌어찌 바이펠베르크에 도착하는 것에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그곳에서 대공과 바덴하임의 공격을 함께 받게 된다면 폐하께선 어려운 지경에 처할 것입니다.”
나의 설명을 들은 두 사람이 절망 어린 표정을 짓는다.
“근위대장,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야합니까?”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대비의 질문을 받고 목을 가다듬은 나는 천천히 대답을 시작했다.
“바로... 저의 영지인 다닐렌츠입니다.”
“...!”
***
오랜 회의 끝에, 국왕 요제프와 대비 카넬리아는 나의 영지인 다닐렌츠로 향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들이 생각할 때도 라이에른-팔츠와 바이펠베르크 영지로 향하는 것에 비해 위험부담이 현저히 낮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대공의 눈을 속이고 왕도를 무사히 빠져나갈 작전을 짜야 했다.
하여, 나는 왕실근위대의 두 기둥으로 불리는 부대장 빈프리트 퀴블러와 부관 카르스텐 바익스를 불러들여 명령을 내렸다.
“절대로, 작전 당일까지 이곳에서 한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안 된다. 이 계획은 나와 너희 둘, 국왕 폐하와 카넬리아 대비마마께서만 아시는 내용이다.”
“... 알겠습니다.”
“물론입니다, 대장님.”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두 기사의 얼굴을 보며, 나는 비장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흘 후, 우리는 폐하를 모시고 왕도를 빠져나가 바이펠베르크로 향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앞서 국왕과 대비에게 했던 말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 사흘 후!”
“바이펠베르크... 입니까?!”
순간, 나는 내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눈을 빛내는 한 사내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 내가 한 말 그대로 가서 대공에게 전해라, 이 망할 쥐새끼야.’
대공을 속이기 위한, 기만전술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