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탈출 (4)
[사흘 후, 국왕과 대비는 군무대신 파울 루덴도르프의 장례식에 참석한다는 명분으로 왕도를 떠나 라이에른-팔츠 영지로 향할 예정.]
[하지만 그것은 대공 전하를 속이기 위한 기만 작전이며, 실제로는 왕도 남쪽의 바이펠베르크 영지로 향할 계획.]
[작전 세부 계획이 모두 수립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다닐렌츠 남작이 아직 왕실근위대 내에 공개하지 않았음. 작전 당일 지시할 것으로 보임.]
[기존 하달되었던 임무 수행은 정황상 불가할 것으로 보임.]
부하가 전달한 쪽지의 내용을 모두 살핀 대공파의 2인자, 귄터 에슬링.
꾸깃-
그에 손에 들려 있던 쪽지가 사정없이 구겨진다.
“파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라이에른-팔츠로 간다라... 뭐, 핑계는 좋군.”
말은 비꼬듯이 늘어놓았으나, 사실 어느 정도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국왕의 외숙이자 왕국 유일의 변경백이었으며, 죽기 직전까지 왕국의 군무대신으로서 중책을 맡고 있었던 라이에른-팔츠 백작 파울 루덴도르프.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기 위해 국왕과 대비가 직접 라이에른-팔츠로 이동해 장례식에 참석한다는 것은 명분상 하등 문제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심지어 그걸 연막으로 써서 우릴 속이고, 바이펠베르크로 가겠다... 머리를 잘 썼어. 이것도 자네가 그린 그림인가, 다닐렌츠 남작?”
마치 눈앞에 상대가 있는 것처럼 시선을 돌리며 비릿한 웃음을 짓는 귄터였다.
“그나저나... 아쉽게 됐군. 기존 임무는 없던 일이 되었으니.”
방금 귄터가 읽은 쪽지를 보낸 이는 다름 아닌 왕성 내부의 대공파 첩자였고, 그런 그에게 내려졌던 ‘기존 임무’란 다름 아닌 왕실근위대장의 암살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당분간 그 기존 임무는 미뤄질 수밖에.
“... 뭐, 어차피 놈이 왕도 밖으로 기어 나오면 국왕, 대비, 왕실근위대장까지 한 번에 치워버리면 될 일. 흐음...”
양손으로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린 귄터가 바깥에서 대기 중인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다들 들어와라! 전하께 왕국을 들어다 바칠 계획을 세울 시간이다!”
***
사흘이란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그 사흘 내내 나는 잠을 줄이고, 밥 먹을 시간을 줄여가며 나는 국왕과 대비를 왕도에 탈출시킬 계획을 짰다.
그리하여 작전 개시 당일.
나는 해도 뜨기 전인 이른 새벽녘에 왕성에 마련된 나의 집무실로 누군가를 호출했다.
“대장님.”
“왔나, 빈프리트.”
왕실근위대의 명실상부한 2인자, 빈프리트 퀴블러.
그는 전임 왕실근위대장인 바이펠베르크 백작 때부터 왕실근위대에서 복무해온 베테랑 기사였다.
경력이 오래된 만큼 나이도 나보다 훨씬 많아서, 거의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났다.
물론 조직 내의 위계도 있고, 영지를 지닌 귀족과 평범한 기사 간의 신분 차이도 존재했기에 편하게 반말을 썼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아랫사람 대하듯이 막 부려먹지는 않았다.
세상 어떤 조직이든 ‘짬’이라는 것은 대우받아 충분한 요소이니 말이다.
“오늘 작전에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심각한 나의 표정을 본 빈프리트가 걱정하는 기색으로 묻는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고... 자네의 임무를 알려주려고 불렀네.”
“예, 말씀해주십시오.”
“오늘 작전, 자네가 국왕 폐하를 모시고 바이펠베르크로 가야 하네.”
“...!”
나의 말을 듣고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빈프리트다.
“제가, 국왕 폐하를 모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대장님이 아니고?”
“그래.”
“하지만...”
“하지만이 아니야.”
뭐라 반박하려는 빈프리트의 말을 막으며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자네가 해야 해. 그게, 폐하를 위하는 길이야.”
“...”
설명을 요구하는 빈프리트의 눈빛.
“후우...”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쉰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며칠 전부터 왕도 곳곳에 국왕 폐하와 대비마마께서 고인이 되신 파울 루덴도르프 변경백 각하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라이에른-팔츠로 가신다는 소문을 내어놓았지만, 대공이 그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을 거야. 아니, 대공은 몰라도 그의 군사인 귄터는 믿지 않겠지.”
“음...”
“그래서, 놈을 속이기 위해 내가 직접 얼굴을 드러내고 마차를 이끌어야 해.”
“... 대장님께서 직접 미끼가 되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애초에 목숨 내어놓고 하는 일이 이 왕실근위대장의 자리 아닌가?”
“...!”
담담하게 내어놓는 내 말에 말문이 막힌 빈프리트가 이를 악물고 나를 바라본다.
“어쩔 수 없어. 대공과 대공의 오른팔인 귄터를 속이려면 이 방법뿐이야. 그리고... 대비마마께서도 나와 함께 하실 거야.”
“허, 대비마마께서 말입니까?”
“그래. 마마께서도 폐하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시겠다고 말씀하셨지.”
“하지만 대장님!”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마. 이미 정해진 일이고, 돌이킬 수 없어. 그리고 폐하께서도 승낙하신 작전이야. 번복할 수 없다는 얘기지.”
“...!”
“자... 가서 어서 준비하도록 해.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
“하아...”
죽음을 각오했다는 나의 말에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는 빈프리트.
그 뒤로도 작전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를 몇 마디 더 나눈 후, 나는 그를 돌려보냈다.
“... 대장님, 무운(武運)을 빌겠습니다.”
“그래. 자네도.”
비장한 얼굴로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는 빈프리트.
그런 그의 모습을, 나는 한동안 말없이 서서 바라보았다.
***
보통 사람들은 왕성의 출입문이 하나뿐이라고 생각하지만, 하지만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작은 쪽문들이 존재했다.
그 쪽문들은 대개 왕성에서 일하는 근위병이나 시녀들이 출퇴근할 때 사용하거나 왕성에서 사용하는 여러 물품을 공급할 때 쓰였다.
덜컹, 덜컹!
바로 그 쪽문을 통해 허름한 모양새의 짐 마차 한 대가 빠져나왔다.
마차 위엔 왕성에서 사용하는 식자재, 예컨대 각종 채소와 과일, 육류와 생선 등을 담았던 나무 상자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왕성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오는 길이었기에 당연히 그 나무 상자들은 텅 비어 있었고, 그래서인지 상자끼리 부딪쳐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짐 마차의 수는 모두 세 대였고, 마차를 이끄는 사람들의 숫자는 총 여섯 명.
마차 한 대당 두 명이 붙어 있는 셈이었다.
“...”
겉으로 보기엔 왕성에 물품을 공급하는 평범한 상단 마차의 행렬이었지만, 마차 위에 올라앉은 사람들의 표정과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마차가 움직이는 왕도 시가지 골목의 구석구석을 살피는 눈빛이 사냥감을 노리는 매의 그것처럼 날카로웠다.
그렇게 왕성을 빠져나온 마차는 그다지 빠르지 않은 속도로, 그러나 쉬지 않고 왕도의 거리를 달려 이동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왕도 카를리온의 남문(南門)에 가까운 어느 골목길에 도착했을 때,
“... 정지.”
선두에 선 마차에 위에 올라타 있던 사내가 한쪽 손을 들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내의 명령에 따라 천천히 이동을 멈추는 세 대의 짐 마차.
곧, 골목 한쪽에 세워진 작은 목조 건물에서 각양각색의 옷차림을 한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 부대장님.”
“음.”
몰려나온 사내 중 대표격으로 보이는 이가 마차 위에 올라탄 사내에게 다가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바로 왕실근위대 소속의 병사들이었고, 선두에 선 마차 위의 사내는 바로 왕실근위대의 부대장 빈프리트 퀴블러였다.
“폐하께서는...”
“쉿, 언행에 유의해라. 듣는 귀가 있을 수 있다.”
“엇, 죄송합니다.”
단호한 말투로 부하에게 경고한 빈프리트가 시선을 슬쩍 돌려 자신이 타고 있는 짐 마차의 뒷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그 짐 마차의 안쪽.
덩치가 작은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그 공간에 바로 국왕 요제프 3세가 숨어 있었다.
“... 지체할 시간이 없다. 바로 이동한다.”
“예, 알겠습니다. 저희가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곧, 용병대로 위장한 왕실근위대 병사들이 골목길을 빠져나갔고 상단 짐 마차로 위장한 빈프리트 일행이 천천히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
“... 대비마마, 출발하겠습니다.”
“예, 그리 하세요.”
호화로운 왕실 마차 안쪽에서 들려온 대비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마친 후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자, 출발한다!”
다각, 다각, 다각...
한 대의 왕실 마차와 그 뒤를 따르는 다섯 대의 보급 마차, 그리고 호위 목적으로 따라붙은 오십여 명의 왕실근위대 병사들과 따로 차출된 이백여 명의 왕도수비군 병력.
거기에 시녀들과 어의(御醫), 왕실요리사 등 국왕과 대비의 시중을 드는 인력을 모두 포함해 약 삼백여 명에 달하는 대 인원이 왕성을 출발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국왕의 목적지는 왕국 북부에 자리한 라이에른-팔츠 영지였기에 당연히 왕성을 빠져나온 행렬은 왕도의 북문(北門) 쪽으로 향했다.
“저기다, 저기!”
“와아! 왕실근위대다!!!”
“국왕 폐하의 마차다! 진짜 멋있어!”
국왕의 행차를 지켜보기 위해 나온 왕도 백성들의 수가 워낙 많았기에 길이 좁아졌고, 자연스레 이동 속도 역시 복장이 터질 정도로 느려졌다.
“요제프 국왕 폐하 만세!!!”
“펠리노어 왕국이여 영원하라!!!”
“국왕 폐하, 영원하소서!”
“국왕 폐하 만세에에에!!!”
백성들의 환호 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었지만 야속하게도 마차의 양옆에 난 창문은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내가 호위 중인 마차엔 국왕이 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우...”
몰려드는 긴장감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총원 삼백여 명에 달하는 이 거대한 국왕 행렬의 참가자들 가운데 마차 안에 국왕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왕실근위대장인 나와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카넬리아 대비 두 사람뿐이었다.
이 호화로운 왕의 행차 자체가 대공의 눈을 속이기 위한 기만전술이었고, 현재까진 그럴듯하게 진행 중이다.
“귄터 이 새끼가 속아줘야 할 텐데...”
주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뇌까린 후, 나는 천천히 쓰고 있던 투구의 면갑(面甲)을 내렸다.
주변 거리를 가득 채운 구경꾼들이 충분히 내 얼굴을 알아본 이후의 일이었다.
***
왕실근위대장 데미언 카릴베르크가 이끄는 국왕의 마차 행렬을 구경하러 나온 인파로 인해 떠들썩한 왕도의 거리 한쪽 구석.
“어휴, 뭔 사람이 이렇게 많아? 자자, 이쪽으로 가자. 삼촌 손 꼭 잡아! 자칫하면 잃어버리니까.”
도시 어디서든 볼 법한 평범한 옷차림을 한 사내가 조카뻘로 보이는 소년의 손을 꼭 잡고 사람들 사이를 헤쳐나가고 있었다.
소년 역시 사내와 마찬가지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머리엔 그 나이 또래 소년들이 즐겨 쓸법한 모자를 푹 눌러써 이마까지 가리고 있었다.
“아휴우, 죽겠다. 깔려 죽을 뻔했네!”
사람들이 몰려있던 대로변을 지나 겨우겨우 인적이 뜸한 골목길로 접어든 사내가 혀를 내두르며 우는 소리를 냈다.
“으, 그래도 여긴 좀 났네. 사람이 없어서 걸어 다닐 만하다. 어디 다친 곳 없지? 얼른 가자, 늦겠다!”
“...”
이제야 좀 살겠다는 듯 너스레를 떤 사내가 유난히 조용한 소년의 손을 잡고 길을 재촉한다.
그렇게, 대답 없는 소년을 이끌고 인적이 뜸한 골목으로 향한 사내.
주변에 듣는 귀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사내가, 별안간 소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는다.
“... 폐하, 거의 다 왔습니다. 조금만 더 참아주십시오.”
사내, 왕실근위대장의 부관 카르스텐 바익스.
그가 자신의 눈앞에 선 소년, 국왕 요제프 3세의 지친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