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탈출 (5)
카르스텐 바익스가 왕실 근위대장 데미언 카릴베르크의 부름을 받은 것은 국왕의 왕도 탈출 작전이 시행되기 하루 전, 이제 막 자정이 넘은 한밤중이었다.
“대장님, 부르셨습니까.”
“어, 카르스텐. 그쪽에 앉아.”
“예.”
국왕을 무사히 탈출시킬 계획을 짜느라 며칠 동안 밤을 새웠던 까닭인지, 붉게 충혈된 눈을 하고 카르스텐을 맞이한 데미언.
그는 피곤함이 여실히 느껴지는 얼굴을 몇 차례 쓸어내리더니,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서류 한 뭉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데 대장님, 무슨 일로 부르셨...”
턱-
용무를 묻는 카르스텐의 앞에 들고 온 서류 뭉치를 내려놓는 데미언.
이어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르스텐에게 턱짓으로 서류 뭉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읽어 봐. 읽어 보고, 그 이후에 얘기하자.”
“... 예.”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스텐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의 상관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 대장님! 여기 있는 게... 이게, 진짭니까? 모두 사실입니까?!”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것인지, 손까지 덜덜 떨며 묻는 카르스텐에게 데미언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사실이다.”
“호, 혹시 조사 과정에 착오가 있었던 것은 아니...”
“조사는 정확하다. 이 자료들은 반년 가까운 기간 동안 꾸준히 교차 검증하며 모아온 자료들이야. 전임 왕실근위대장이신 내 장인어른이 계실 때부터 쌓인 자료이니 잘못되었을 리는 없다.”
“허...”
카르스텐을 이토록 경악하게 만든 서류의 내용.
그것은 다름 아닌 왕실근위대 부대장, 빈프리트 퀴블러가 대공파의 첩자임을 증명하는 자료였다.
물론 전임 왕실근위대장이 있을 때부터 조사한 자료라는 말은 거짓말이었지만, 어쨌건 내용 자체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생각 같아선 서류의 내용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없다.”
“...”
자신의 말에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카르스텐을 보며, 데미언은 자신의 부관이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경험 많은 선배이자 믿음직스러운 동료였던 왕실근위대 부대장 빈프리트 퀴블러의 배신.
치밀어 오르는 충격에 머리가 어질어질할 테지만, 상황은 그런 카르스텐을 여유롭게 기다려주지 않았다.
“카르스텐, 정신 차려라.”
“... 예! 죄송합니다, 대장님.”
“길게 말하지 않겠다. 오늘 시행될 작전... 카르스텐, 네가 국왕 폐하를 모시고 왕도 밖으로 나간다.”
“... 예?”
“알아들었나? 알아들었으면 빨리 대답해. 지금은 그렇게 친절하게 기다려줄 상황이 아니야.”
“아, 알아들었습니다!”
“몇 시간 후, 내가 직접 빈프리트를 호출해 거짓 명령을 내릴 거다. 녀석은 특수 제작된 짐 마차를 끌고 국왕 폐하를 탈출시키는 임무를 맡게 되겠지. 물론, 그 짐 마차 안에 국왕 폐하는 타지 않으실 거고.”
데미언의 말을 들은 카르스텐이 흔들리던 정신을 바로잡고 다시금 평소의 날카로운 눈빛을 되찾는다.
“혹시 빈프리트가 함정이라는 걸 눈치채지 않겠습니까?”
“내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챘다는 사실을 모르니, 의심하지 않을 거다.”
“음...”
“그리고 애초에 의심한 겨를도 없을 거다. 작전 시각을 얼마 남기지 않고 급하게 명령을 통보받을 테니까 말이지. 어차피 보안 유지 때문에 빠듯하게 명령을 전달받은 것으로 생각할 거야.”
“음, 이해했습니다.”
“놈은 국왕 폐하의 얼굴도 확인하지 못한 채 곧바로 짐 마차에 올라타게 될 거다. 왕도 남문을 지나 바이펠베르크로 향하는 길에 대공파 놈들이 몰려올 테지만...”
“짐 마차는 비어있겠죠.”
“그래, 바로 그거다.”
빈프리트에게 내려질 거짓 명령의 내용을 파악한 카르스텐이 곧바로 질문을 던진다.
“그럼 대장님께선...”
“나는 대비마마를 모시고 라이에른-팔츠로 향한다. 왕실마차를 이끌고, 왕도수비군에서 차출한 병력까지 더해 대대적인 국왕 행차를 벌일 예정이다. 아주 떠들썩하게.”
“대공파 놈들은 그걸 기만전술이라고 생각하겠군요.”
“그래. 빈프리트가 수행할 작전을 감추려고 필요 이상의 소란을 떤다고 생각하겠지.”
빈프리트가 이끌고 남쪽으로 향할 짐 마차에도, 데미언이 호위해 북쪽으로 향할 왕실마차에도 국왕은 타지 않는다.
대공파를 속이기 위해 마련한 이중의 기만전술.
그리고 그 틈을 타, 카르스텐이 단독으로 국왕을 호위해 왕도를 빠져나가는 것이다.
“이토록 무거운 임무를 제가 해낼 수 있을지...”
“해낼 수 있다. 그리고, 해내야만 해. 안될 거라는 생각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워라. 무슨 일이 있어도, 설령 네가 죽더라도 국왕 폐하를 무사히 탈출시킨다는 각오로 임해야 할 거다.”
전에 없이 진지한 나의 태도에 카르스텐 역시 비장한 눈빛으로 화답했다.
“물론입니다, 대장님. 죽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임무를 성공시키겠습니다.”
부하의 눈빛에 서린 결의를 확인한 데미언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좋다. 그럼 지금부터... ‘진짜’ 작전을 설명하겠다.”
“예, 대장님.”
***
그렇게 시행된 국왕 요제프 3세의 왕도 탈출 작전.
현재까지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현재 카르스텐은 국왕과 함께 작전의 첫 번째 도달 목표인 다닐렌츠 상단 카를리온 지부 건물에 근접해 있었다.
“이쪽입니다.”
카르스텐의 안내를 받아 묵묵히 걸음을 재촉하는 소년왕.
태어나 한 번도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기에, 이미 그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몸도 힘들 테지만 언제 대공의 병사들이 튀어나와 자신을 잡아챌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정신적인 피로가 어마어마했다.
“하아... 하아...”
“거의 다 왔습니다, 조금만 더 가시면 됩니다.”
카르스텐이 골목길을 걷는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가쁜 숨을 내쉬는 국왕을 다독였다.
생각 같아선 냉큼 등에 업고 잽싸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눈에 튀는 짓을 했다간 어디에 숨어있을지 모를 대공의 정보원들에게 발각될 수도 있다.
‘... 끝까지 방심해서는 안 된다.’
등줄기를 흥건히 적시는 식은땀을 느끼며, 카르스텐은 한 걸음 한 걸음을 침착하게 나아갔다.
“...!”
드디어, 카르스텐의 시선 끝에 첫 번째 목적지인 다닐렌츠 상단 카를리온 지부의 담벼락이 보인다.
저 담벼락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이 고된 하루가 끝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가쁜 숨을 내쉬는 어린 주군에게 잠깐의 휴식은 선사할 수 있으리라.
바로 그때,
“어이, 어이! 이거 봐! 잘생긴 청년! 거기 잠깐 좀 서 볼까?”
“...!”
골목길 한쪽 구석에서 들려온 낯선 이의 목소리.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낀 카르스텐이 자연스럽게 국왕 요제프를 자신의 등 뒤로 보내며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본다.
“허이구, 뭘 그렇게 놀라고... 뒤에 꼬맹이는 뭐야? 아들? 조카? 아니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인가?”
목소리의 주인은 많이 봐줘야 나이 서른이 될까 말까 한 젊은 청년이었다.
건들거리는 표정과 눈빛, 껄렁한 말투.
그 모든 정보를 조합해보았을 때, 도시 뒷골목을 지나다니는 행인의 주머니를 털어먹고 사는 볼품 없는 불량배로 보였다.
혼자는 아니었고, 그와 비슷한 행색을 한 청년 서넛이 이곳저곳에서 바퀴벌레처럼 기어 나왔다.
합이 총 다섯.
국왕 요제프의 전투력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하나 대 다섯의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된 카르스텐이다.
하지만...
‘... 전투력은 거의 없는 놈들이다.’
카르스텐은 다가오는 걸음걸이만 보고도 상대가 제대로 된 격투술이나 검술을 배우지 못한 이들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렇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무려 2대에 걸쳐 왕실근위대장의 부관직을 역임 중인 카르스텐이었다.
부관직의 특성상 명석한 두뇌와 정치적 감각으로 주목을 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런 것들을 빼고 보아도 카르스텐은 그 자체로 대단한 경지에 오른 빼어난 기사였다.
아마 저따위 허술한 동네 양아치들 따위는 다섯이 아니라 오십 명이 몰려와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푸핫! 눈빛 보소? 엄청 무섭네? 와씨이, 누가 보면 막 힘을 숨기고 있는 사람인 줄 알겠...”
퍼억!
선두에 서서 걸어오던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번개같이 뻗어진 카르스텐의 주먹의 그의 턱을 후려쳤다.
“끄르륵...!”
털썩!
주먹 한 방으로 이죽거리던 불량배 사내를 기절시킨 카르스텐.
“?!”
“뭐, 뭐야!?”
제대로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카르스텐의 공격에, 뒤를 따라오던 나머지 불량배들이 질겁하며 발걸음을 멈춘다.
“흡!”
퍼퍼퍽! 뻐걱! 빠악! 으지직!!!
순식간에 상대와의 거리를 좁힌 카르스텐이 연이은 공격으로 단숨에 나머지 불량배들을 때려눕힌다.
달려들며 발차기로 턱을 갈기고, 바닥에 착지함과 동시에 양쪽으로 주먹으로 휘둘러 두 명을 눕히고, 도망치는 마지막 한 명의 뒤를 따라잡아 목 뒤를 후려쳐 마무리 지었다.
앞서 기절한 녀석과 마찬가지로 카르스텐에게 얻어맞는 네 명 모두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걸어 다니는 전투 병기’라 불리는 기사, 그것도 왕실근위대 소속의 간부에게 동네 양아치들이 시비를 걸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후우...”
앞길을 가로막았던 불량배들을 순식간에 정리한 카르스텐이 조금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
그곳엔 조금 놀란 눈을 하고 서 있는 국왕 요제프가 있었다.
만약 그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라 함부로 도망치거나 소리를 질렀다면 큰 문제가 됐을 터.
하지만 요제프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국의 군주다운 의연함을 보이며 자리를 지켰다.
“상황 정리했습니다. 다시 이동하겠습니다.”
“... 수고했다.”
그 와중에 짧은 치하의 말을 잊지 않는 요제프.
자신의 공을 칭찬하는 어린 주군의 목소리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은 카르스텐이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려는데...
“잠시 정지.”
“...!?”
다시 한번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
먼젓번과 마찬가지로 국왕 요제프를 등 뒤로 숨긴 카르스텐이 말을 걸어온 이들의 정체를 확인하는데...
‘... 젠장, 도시 경비대잖아!’
낯익은 복장을 하고 다가오는 사내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왕도 카를리온의 치안을 책임지는 도시 경비대였다.
숫자는 앞서 불량배들과 같은 다섯 명.
하지만 제대로 된 검술 훈련을 받고 롱소드와 가죽 갑옷으로 무장한 경비대원들의 전투력이 동네 뒷골목에서 껄렁거리는 양아치들과 같을 리 없었다.
“뭐야, 이 새끼들은 여기 왜 쓰러져 있어?”
“어? 조장님, 이놈들 그놈들인데요? 지난번에 술집에서 소란 피워서 잡혀왔던...”
“아, 맞네.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만.”
쓰러져 있는 불량배들의 얼굴을 확인한 경비대 조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하의 말에 대답했다.
“그나저나 이 새끼들 얼굴이 아주 개판이 됐네? 이거, 그쪽이 그런 거요?”
“...”
경비대 조장이라 불린 사내가 물었지만 카르스텐의 반응은 묵묵부답.
그런 그의 반응이 수상하다 생각한 경비대 조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뭐야, 이 아저씨 왜 대답이 없어? 수상한데? 그리고 뒤에 숨긴 꼬맹이는 또 뭐고? 크흠! 야, 꼬맹아! 너 앞에 아저씨랑 무슨 사이야?”
“...”
하지만 경비대 조장의 부름을 받은 ‘꼬맹이’ 역시도 입을 열지 않았고, 그 반응을 본 경비대 전원의 기세가 급변한다.
“... 얌전히 지시에 따라 경비대로 가자고. 이 이상 버티면 재미없을 거야. 가서 문제없으면 바로 풀어줄 테니까, 조용히 가자고.”
“...”
“이 양반이 끝까지 대답을 안 하네? 결국 매를 벌겠다는 거지?”
스르릉-
여전히 대답이 없는 상대를 보며 천천히 자신의 검을 꺼내는 경비대원들.
그 모습을 본 카르스텐이 속으로 탄식했다.
불량배들과 달리 경비대원 다섯을 한꺼번에 제압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결론적으론 그가 이길 수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앞서와 다른 큰 소란이 빚어질 것이다.
특히 경비대원들이 하나씩 지니고 다니는 비상용 호루라기가 큰 문제였다.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면, 주변의 사람들이 경비대에 찾아가 신고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국왕의 정체가 밝혀질 수도 있었다.
‘... 검을 뽑아야 하나.’
제압은 힘들겠지만, 검을 뽑아 휘두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죄 없는 경비대원들을 죽이는 것이 마음에 걸려 주저했던 것인데, 상황이 이리된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천천히 다가오는 경비대원들에게 마음속으로 사죄의 말을 건넨 카르스텐이 허리춤의 검을 향해 손을 가져가는데...
“야, 인마!”
어느새 골목길 끝에 나타난 큼지막한 체구의 사내가 큰소리를 질러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너네 빨리 안 들어 오고 뭐해! 내가 밖에 나가서 사고 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으이구! 매를 벌어라, 매를 벌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