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탈출 (6)
갑자기 골목길에 나타나 빽 소리를 지르며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은 건장한 체구의 사내.
나이는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는데, 대체 뭔 일을 하는 양반인지 팔뚝이며 가슴이며 어마어마한 근육을 달고 있었다.
한 가지 재미난 것은 카르스텐을 체포해 가려 윽박지르던 경비대원들이 그 사내와 구면으로 보였다는 점.
빠르게 다가온 사내가 경비대원들에게 반갑게 인사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이고, 순찰 돌고 계시는구나? 수고가 많으십니다!”
“아, 다닐렌츠 상단의 그...”
그렇게, 덩치 큰 사내는 경비대원들과 반갑게 인사하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고, 곧 살벌했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바뀌었다.
“아, 그러니까 이 친구가 그쪽 처남 되는 사람이란 얘깁니까?”
“예, 그렇다니까요. 아휴우! 마누라가 바짓가랑이 붙잡고 사정해서 내가 있는 인맥 없는 인맥 다 동원해서 겨우겨우 상단 짐꾼으로 밀어 넣은 건데,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맨날 저렇게... 야! 뭐해 인마! 빨리 안 들어가? 가서 일해 이 자식아!!!”
“예, 예엡!”
덩치 큰 사내의 윽박에 깜짝 놀란 카르스텐이 목을 잔뜩 움츠리며 잰걸음으로 골목길을 달려나간다.
등 뒤에 숨겨두었던 자그마한 소년, 국왕 요제프와 함께였다.
그 모습을 본 경비대원들이 피식 웃다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저 뒤에 따라가는 꼬맹이는 누구요?”
“아... 저놈은 제 아들입니다. 뭐, 지도 크면 아빠 따라 다닐렌츠 상단 들어와서 일할 거라고 맨날 노래를 불러서 한번 구경이나 하라고 데려와 봤는데, 제 삼촌이랑 같이 밖에 나가서 노느라 정신 팔리... 아휴, 아니다! 바쁘신 분들 잡고 제가 쓸데없는 얘기를... 자자, 이건 근무 끝나시고 목이나 좀 축이시라고 드리는 건데...”
“에이, 뭘 또 이런 걸 다...”
덩치 큰 사내의 품속에서 나온 작은 가죽 주머니가 경비대장의 손으로 건네진다.
비록 주머니의 크기는 작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돈의 액수는 작지 않을 것이다.
다닐렌츠 상단의 남다른 배포는 이미 왕도 내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소문이 자자했으니까.
“매번 이렇게 저흴 챙겨주시고...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다 저희 상단 잘 봐주십사 성의 표현하는 거지요. 하하하! 경비대원 분들이 계셔서 저희도 마음 편히 장사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을 부드럽게 수습한 사내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더 남기며 다닐렌츠 상단 건물로 향했다.
“아, 만약에 제 처남이랑 아들놈 이 근처에서 또 농땡이 치는 거 보시면 바로 알려주십쇼. 사례는 톡톡히 하겠습니다. 하하하!”
***
“괜찮으십니까.”
경비대원들을 보내고 다닐렌츠 상단 카를리온 지부 건물로 돌아온 덩치 큰 사내.
그가 처음 보였던 태도와 완전히 달라진 극히 공손한 모습으로 카르스텐에게 말을 걸어왔다.
경비대원들은 그를 다닐렌츠 상단에서 일하는 직원으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다닐렌츠 정보부 소속의 공작원 중 하나였다.
그는 주군인 다닐렌츠 남작의 명령을 받아 이미 반년 전부터 이곳 왕도에서 위장 신분으로 활동하며 경비대원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과 인맥을 쌓아두었는데, 직전의 위기 상황에 그간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괜찮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왕성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에 심력 소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지, 어딘가 퀭해진 눈빛으로 카르스텐이 답했다.
“폐하는 위층 숙소로 모셨습니다. 많이 지쳐 보이셔서, 우선 마실 것과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겨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폐하의 백성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겸손하게 말하는 다닐렌츠 정보부 공작원의 모습을 보며 카르스텐은 속으로 적잖이 감탄했다.
그 감탄의 대부분은 이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준비해둔 자신의 상관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마치 왕도에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알고 계셨던 것 같아...’
그리고, 그런 카르스텐의 놀라움은 다닐렌츠 정보부 공작원의 안내를 받아 숙소 벽난로 안쪽에 마련된 비밀 탈출 통로를 발견했을 때 정점에 이른다.
“이곳입니다.”
“...”
“이 벽난로 위쪽 사다리를 통해 조금만 올라가시면, 작은 문이 하나 나올 겁니다. 그 문을 여시면 통로가 하나 나올 텐데, 통로가 좀 좁아서 바익스 경께서는 허리를 굽혀 지나가셔야 할 겁니다. 그 통로 끝에 지하로 내려가는 좁은 계단이 나옵니다. 계단이 가파르니 유의하십시오.”
“지하... 말입니까?”
“예, 지하입니다. 계단 끝까지 내려가시면 다시 문 하나가 있을 겁니다. 그 문을 여시면, 왕도 밖으로 이어지는 긴 지하 통로가 나옵니다.”
“...!”
“왕도의 성벽 밑을 관통해 한참을 더 가야 출구가 나오니 꽤 오랜 시간을 걸으셔야 할 겁니다. 통로 중간중간에 외부 공기가 유입되는 환기 구멍이 있고, 그 옆에 마실 물과 잠깐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가 놓여 있을 겁니다. 폐하께서 지치시면 잠깐 쉬었다가 가십시오. 하지만, 너무 오래 지체하면 안 됩니다.”
“... 이 모든 걸, 왕실근위대장님께서 준비해두신 겁니까?”
경악한 표정으로 묻는 카르스텐을 본 다닐렌츠의 공작원이 자부심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예, 그렇습니다. 저희 영주님께서는 베겐스바흐 대공이 역심을 품고 왕도에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 예상하시고 오랫동안 이 시설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군요.”
“허어...”
“바익스 경,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폐하를 모시고 피신하시지요.”
단호한 공작원에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카르스텐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조심해서 따라와 주시길...”
그렇게 잠시 후, 카르스텐과 그의 어린 주군은 벽난로 안쪽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이, 이럴 수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왕도 카를리온의 남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밀밭이 펼쳐져 있는 곳, 바이센 평야의 한복판에 충격을 몸을 떨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펠리노어 왕국 왕실근위대의 부대장, 빈프리트 퀴블러.
그의 얼굴이 마치 보아서는 안 될 것은 본 사람의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어디 갔어, 어디! 어디 갔냐고!!!”
쾅! 쾅! 쾅!
빈프리트가 손에 든 검을 휘둘러 눈앞의 짐 마차를 때려 부수기 시작한다.
그 짐 마차 안쪽, 특수 제작했다던 비밀 공간에 숨어 있어야 했을 오늘의 목표.
펠리노어 왕국의 국왕, 요제프 3세가 사라졌다.
“거기까지. 그만해라.”
“이 시발! 그만하긴 뭘 그만... 헉!”
마차를 때려 부수며 난동을 피우던 빈프리트가 뒤쪽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성질을 내려다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고 깜짝 놀라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갑주로 무장한 기사들이 주변에 즐비했지만,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지닌 이.
베겐스바흐 대공의 친위대, 암흑기사단의 수장(首長),
리하르트 그라나흐(Richard Granach).
그를 부르는 다른 이름이 무수히 많았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동부 전선의 악마’라는 별칭이었다.
그는 제국군을 상대로 싸우는 동부 전선에서 가장 많은 왕국의 적을 죽인 사나이로 알려져 있었다.
그만큼 많은 전투 경험을 지녔다는 이야기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다리 멀쩡하게 살아 있을 만큼 강하다는 이야기였다.
그 무시무시한 사내가, 무감정한 눈빛으로 미쳐 날뛰는 빈프리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빈프리트의 태도가 고양이 앞의 쥐처럼 수그러든다.
“그, 그라나흐 경! 이게... 이게 그러니까... 내가 다 설명하겠소!”
“기회를 주지. 설명해봐라. 만약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넌 여기서 죽는다.”
“...!”
리하르트의 경고에 빈프리트의 얼굴에서 새하얗게 피가 빠져나간다.
그건 리하르트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본능적으로 이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대공이 가장 아끼는 병력인 암흑기사단의 수장인 리하르트 그라나흐가 직접 투입된 국왕 확보 작전.
한데, 방금 짐 마차 안에 타고 있어야 할 국왕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뜻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 함정에 빠졌다!’
빈프리트는 이번 작전의 기반이 된 모든 정보의 제공자였다.
즉, 작전의 실패는 곧 그의 실패가 된다.
알다시피 대공은 실패한 부하에게 관대하지 않은 주군.
당장이라도 눈앞의 리하르트가 자신의 목을 칠 것 같은 두려움에 빈프리트의 턱이 공포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왜 대답이 없지?”
“어, 음... 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와, 왕성에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여기 타고 있었...”
“직접 확인했나?”
“...!”
리하르트의 말에 빈프리트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다.
생각해보니 ‘국왕이 안에 타고 있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 직접 국왕이 짐 마차에 타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애초에 그는 국왕이 바이펠베르크로 향할 거라는 사실 자체를 작전 시작 몇 시간 전에 들었다.
그 모든 것이 보안 유지 때문이라며 미안한 표정을 짓던 상관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데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속이기 위한 연막이었다니?!
“데미언, 이런 개...”
푸화아악!!! 털썩-
뭐라 제대로 욕을 내뱉어 보기도 전에, 빈프리트의 머리가 떨어졌다.
이른바 ‘강철 장미(Stahl Rose)’라 불리는 리하르트의 독문무기, 묵빛의 도끼창이 순식간에 만들어낸 끔찍한 광경.
푸슉, 푸슈슛-!
바닥에 떨어진 빈프리트의 머리와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그 곁에 쓰러진 몸통이 울컥거리며 더운 피를 쏟아낸다.
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한기가 가득한 바닥이 때아닌 온기를 받아들이며 새하얀 김을 내뿜는다.
“... 왕도로 돌아간다. 대공 전하에게 임무 실패 소식을 알려라.”
“예, 단장님!”
마치 길가의 들풀을 베어내듯 무감정한 표정으로 빈프리트의 목을 쳐낸 리하르트가 곁에 있는 수하에게 명령을 내리고 돌아섰다.
그와 함께 바삐 움직이는 암흑 기사단의 뒤로, 이제는 말할 수 없게 되어버린 수십여 왕실근위대 병사들의 시신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
“... 이제 슬슬 알게 됐으려나.”
나는 비어있는 짐 마차를 끌고 남쪽으로 향한 빈프리트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국왕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몰려온 대공 측의 병력을 만나 짐 마차가 비어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거다.
말도 안 되는 실책을 저질렀으니, 모르긴 몰라도 대공의 성격상 그를 살려두지는 않겠지.
그는 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성심성의껏 왕실근위대 부대장으로서 나의 곁을 지켜온 인물이었으나, 그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었고 실상은 대공에게 붙어먹은 배신자였다.
원작 소설의 빈프리트는 왕실근위대장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가 마시는 술에 독을 타 그를 중독시킨다.
보통 사람이라면 진작 죽고도 남았을 극독이었는데, 원작의 장인어른은 그런 독에 중독되고도 왕성에 쳐들어온 암흑기사단을 상대로 무시무시한 위용을 선보이셨더랬지.
물론, 이건 소설 속의 내용이고 현실의 장인어른께선 사위를 잘 둔 덕에 은퇴하시고 고향으로 내려가 잘 살고 계신다.
“그나저나... 슬슬 우리 쪽에도 뭔가 입질이 올 때가 됐는데?”
국왕의 신병 확보 문제와는 별개로 대공의 입장에서 눈엣가시인 나와 카넬리아 대비가 몸 성히 라이에른-팔츠 영지로 향하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장님! 전방에 소속을 알 수 없는 병력이 등장했습니다!!!”
멀리, 짙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우리 일행을 향해 달려오는 한 떼의 병력이 보인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일이기에, 당황할 것도 없었다.
침착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나는 왕실 마차를 호위하는 전 병력에게 알렸다.
“... 전원 전투 준비.”
“전투 준비이이이이이!!!”
우렁차게 나의 명령을 복창하는 병사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철컹-!
나는 쓰고 있던 투구의 면갑을 내렸다.
전투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