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탈출 (7)
여전히 추운 겨울이었지만, 전투의 흥분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몸을 생각하면 오히려 기껍게 느껴지는 날씨였다.
“왕실근위대는 마차를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폐하를 지키는 것에만 집중해라!”
“알겠습니다!”
촤앙! 촤아앙-!
나의 명령을 받은 왕실근위대 병사들이 검을 뽑은 채 마차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마차 안에 국왕이 타고 있다고 믿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죽음을 각오한 듯 표정이 비장했다.
“수비군들은 방패를 들어 마차를 둘러싸라! 적들의 화살이 마차에 도달하지 않게 하라!”
“예! 근위대장님!”
뒤이어 집채만 한 방패를 든 왕도수비군 소속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카넬리아 대비가 타고 있는 마차를 물샐 틈 없이 에워쌌다.
한편, 우리 쪽이 침착하게 전투에 대비하는 동안 저쪽은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무작정 돌진해오고 있었다.
“흐야아아아아!!!”
“모두 죽여라! 대공 전하의 대업을 가로막는 놈들이다!!!”
뿌옇게 하늘로 날아오르는 흙먼지들.
한눈에 봐도 이쪽보다 두 배 가까이 많아 보이는 병력이었다.
우리 측 병력이 대략 3백 정도였으니, 못해도 5, 6백은 될 법한 규모였다.
“저게 다 대공의 군사들은 아닐 테고... 그 밑에 붙은 떨거지들인 것 같은데?”
내가 짐작한 그대로였다.
대공이 직접 부리는 병사들은 배신자 빈프리트가 물어다 준 정보에 속아 남쪽 바이펠베르크로 향한 짐 마차 쪽에 투입되었고, 나와 카넬리아 대비가 움직이는 왕도 북쪽 가도엔 대공파에 속한 여러 귀족의 사병들이 달라붙었다.
“다닐렌츠 남작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 전하께서 귀족 작위를 약속하셨다!!!”
“모조리 죽여라!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국왕의 개새끼를 죽여라!!! 데미언의 목을 가져와라!!!”
“와아아아아아아!!!”
요란하기 그지없는 돌진.
저마다 공을 세워 대공에게 한 자리를 얻어내겠다는 욕망에 불타 눈이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저 새끼들이 진짜...”
놈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 내 성질 까먹은 모양이네.”
***
“짐 마차 안에, 국왕이 없었다?”
“예, 그렇습니다!”
황당해하는 상관의 물음에 큰 소리로 대답하는 병사.
자신이 전한 소식이 결코 좋은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에, 자연스럽게 긴장한 그였다.
“하아...”
병사가 전한 소식을 듣고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는 중년의 사내.
바로, 대공파의 2인자이자 베겐스바흐 대공의 지낭(智囊)으로 불리는 로텐바인 백작, 귄터 에슬링이었다.
“... 오는 길에 어디에다가 흘린 것은 아니고?”
“예? 아니, 그...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너무 황당한 소식에 어이가 없어서 던진 농담을 듣고 진지하게 대답하는 병사.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기에, 귄터는 병사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았다.
“...”
그저 인상을 구긴 채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을 뿐이다.
‘라이에른-팔츠 방면으로 연막을 치고, 바이펠베르크로 가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양쪽 모두가 기만 전술이었던 거다.
그럼 대체 국왕은 어디로 갔을까?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답게, 귄터는 오래지 않아 답을 찾아내었다.
“... 다닐렌츠로군.”
“예?”
눈앞의 귄터가 워낙 심각한 분위기에 빠져 있었기에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부동자세로 서 있던 병사가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너, 지금 당장 왕도의 남문(南門)으로 달려가라.”
“나, 남문 말입니까?”
“그래. 남문으로 가서, 암흑기사단이 그곳에 도착하는 즉시 왕도 서편 다닐렌츠 방면을 향해 달려가라고 일러라. 국왕은 분명 그쪽으로 빠져나갔을 거다.”
“아, 알겠습니다!”
자신의 명령을 받은 병사가 꽁지가 빠지게 달려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귄터.
“푸흣, 큭! 크하하하하!”
그가 문득 웃음을 터트렸다.
상황을 모르는 이가 봤다면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있나 싶을 정도의 커다란 웃음.
하지만, 가까이에서 그의 모습을 살펴본 사람이라면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을 것이다.
“크하하하하! 다닐렌츠 남작, 생각보다 더 재밌는 놈이었구나! 이 귄터가 보기 좋게 한 방 먹었어!”
대공파의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 불리는 사나이, 귄터 에슬링.
쉴새 없이 웃음을 터트리는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
“크르르르릉!!”
나의 애마, 블리츠(Blitz)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들판을 내달린다.
다른 말들과 달리 블리츠의 울음은 맹수(猛獸)의 그것과 닮아 있었는데, 녀석의 혈통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수년 전, 다닐렌츠 북부 지역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흑마(黑馬) 블리츠.
녀석은 수십 마리에 이르는 야생마 무리를 이끌고 다니며 농민들이 힘들게 기른 농작물을 약탈하다 나에게 붙잡혔고, 그 뒤로 나의 전용 군마가 되었다.
사실, 블리츠는 대륙 북부 지역에 서식하는 몬스터, 오록스(Aurochs)와 야생마 사이에서 태어난 돌연변이였다.
오록스는 우리가 아는 물소와 거의 흡사한 생김새를 지녔는데, 평범한 물소의 서너 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몸 크기를 지니고 있어 몬스터로 분류되는 놈들이었다.
평상시에는 순한 성격이지만 적에게 위협을 받으면 포악하게 돌변했는데, 겁 없이 오록스의 영역을 침범했다가 오록스의 뿔에 찔리거나 밟혀서 죽는 다른 몬스터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여러 마리가 무리를 지어 사는 것이 보통인지라 ‘몬스터의 제왕’이라 불리는 오우거조차 오록스의 영역을 발견하면 굳이 가까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오우거가 원체 강하다고는 하지만 눈 돌아간 오록스 수십 마리에게 둘러싸여 싸우다 보면 재수 없게 뿔에 받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블리츠는 그런 오록스의 피를 타고난 녀석이었다.
오록스의 그것과 비교하면 거의 없는 수준이었지만 다른 말들에게선 볼 수 없는 두 개의 작은 뿔이 머리에 돋아나 있었는데. 그 뿔이야말로 녀석이 오록스의 피를 타고났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뿐인가, 녀석은 덩치 크기로 어디서 밀리지 않는 다른 군마(軍馬)들을 무슨 당나귀나 노새처럼 보이게 할 정도로 위압적인 크기를 자랑했고, 울룩불룩 튀어나온 전신의 근육은 갑옷처럼 단단했다.
거기에 더해 몇 날 며칠을 전력으로 달려도 지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무한한 체력과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사방에서 찔러오는 창검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강철 같은 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런 어마어마한 녀석의 등에 올라타 적들을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하아아아아아!!!”
손에 든 나의 독문무기, 초대형 강철 글레이브에 블리츠의 무지막지한 돌파력을 그대로 실어 내질렀다.
“푸화아아아아악!!!”
내 눈앞에 있던 대여섯 명의 대공파 기사들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사람이 몸이 이토록 연약하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들은 몸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찢어지고 갈라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니, 생각해보니 그들의 몸이 연약한 것이 아니라 나와 블리츠의 돌파가 만들어낸 파괴력이 규격 외이기 때문이겠지.
“뭐, 뭐야!?”
“미친... 저게 무슨...?!”
“사, 사람이 맞나?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거냐!”
선두에 섰던 기사들이 순식간에 ‘삭제’되는 것을 본 적 지휘관들이 기함했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광경에 어안이 벙벙했다.
왕실근위대장의 목을 얻겠다며 기세 좋게 달려나간 선봉의 기사들.
모두가 소속 영지 내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이들이었고, 그만큼 실력도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뭘 해보기도 전에 찢긴 육편이 되어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너무나 비현실적인 모습이어서 무서운 생각마저 들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씨발! 주, 죽어라!!!”
휭-
겁에 질린 눈빛으로 쥐고 있던 장창을 냅다 내지르는 적의 기사.
이미 마음속에서부터 패배한 이가 가한 공격이 위력적일 이가 없다.
카앙, 휘이잉-
나는 간단하게 그 공격을 쳐낸 뒤, 그대로 말을 달려 창날이 아닌 창대로 놈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퍼억!!!
둔탁한 소음과 함께 터져나가는 기사의 머리.
아니, 머리에 쓰고 있는 투구가 벗겨지지 않은 상태이니, 터져나갔다는 말보다는 ‘으깨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이따위 실력으로 감히 국왕 폐하에게 검을 들이대는가!!!”
나는 노한 음성을 토해내며 질풍처럼 창을 휘둘렀다.
일전에도 언급했듯, 내가 사용하는 강철 글레이브는 창날과 창대 모두 통짜 강철로 만들어진 괴악한 무기.
길이 자체도 길었지만, 창대의 속까지 강철로 꽉꽉 채웠고 창날의 두께 자체도 남다른 수준이었다.
그런 만큼 무기의 중량 자체가 어마어마해서 단순히 휘두르기만 해도 정신 나간 수준의 파괴력이 나왔다.
카카캉! 으직- 퍼억! 푸화악!!!
그 같은 사실을 증명하듯, 상대 어느 누구도 나의 공격을 받아내지 못했다.
검을 가져다 대면 검날이 깨져나가고, 창을 가져다 대면 창대가 부러졌다.
들고 있는 무기가 그 지경이 되었는데 무기의 주인이 무사할 리는 없는 법.
머리통이 깨지고, 팔다리가 잘려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두꺼운 창대에 얻어맞은 적의 배와 등이 터져 으깨진 내장을 뱉어낸다.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 지옥도(地獄道).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달려들었던 대공파의 병사들은 모두 지리멸렬, 공포에 질려 아예 무기를 내던지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살려줘!!!”
“으으, 괴물... 괴물이다! 사람이 아니야!!!”
“저런 거랑 어떻게 싸워! 씨발!!!”
단 한 사람의 돌격으로 만들어낸 거대한 혼란.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뒤편으로 창을 휘두르며 명령을 내렸다.
“왕도수비군 돌격! 왕국의 반역자들을 분쇄해라!!!”
“돌겨어어어어억!!!”
“와아아아아아! 모조리 죽여라아아아!!!”
나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무기를 세우고 돌격하는 왕도수비군의 병사들.
카넬리아 대비가 타고 있는 마차의 호위가 우선이었기에 공격에 가담한 숫자는 백오십여 명 남짓에 불과했지만, 이미 나에게 한 차례 짓밟히고 깨져 전의를 상실한 적들을 상대로 한 전투였기에 어려울 것이 없었다.
“우, 우리도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 와서 도망치면 대공 전하께서 우릴 어떻게 보겠는가! 끝까지 싸워야지!”
“끝까지 싸우기는 니미! 여기에 뻗치고 있다간 저 괴물한테 대가리 터져 뒤지게 생겼는데 그게 할 소리요?”
“뭐라? 지금 나한테 목소리를 높이는 거요?”
“이 개새끼가 지금 이 마당에도 잘난 척하고 있네? 야이 시발놈아! 나 용병대장 출신인 거 가지고 언제까지 무시할 건데?”
“이 자가? 결국 천박한 출신다운 티를 내는구나!”
“천박? 그래 이 새끼야, 나 천박하다! 똑같은 남작 나부랭이인 주제에 꼴같잖게 구는 거 제법 좆같았다! 어차피 좆된 거, 여기서 네 목부터 따주마!”
“이, 이런 미친 자를 보았나!!!”
“뭐하시는 겁니까?! 두 분 다 진정하십시오!!!”
병사들은 겁에 질려 바퀴벌레마냥 사방으로 흩어지고, 지휘관이라는 작자들은 서로 칼을 들이대며 내분에 휩싸였다.
그런 자들을 상대로 한 싸움은 사실상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줍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대장님! 대승입니다! 적들을 격퇴하였습니다!”
“와아아아아아! 우리가 이겼다아!!!”
“왕실근위대장님 만세에!!! 요제프 국왕 폐하 만세에에에에!!!”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승리의 환호성을 지를 수 있었다.
“이쪽은 잘 마무리 됐고...”
나는 적의 피로 흥건해진 투구를 벗어 손에 든 채로 천천히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간절함을 담아 아끼는 부하의 이름을 불렀다.
“... 이젠 네 차례다. 부탁한다, 카르스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