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탈출 (8)
왕도 성벽 너머로 한참을 더 가야 지하 비밀통로의 출구가 나올 것이라는 다닐렌츠 정보부 첩보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비밀통로에 진입한 지 족히 한 시간 이상이 흘렀음에도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하악... 하악...”
작은 등불 하나에 의지해 어둠 속을 나아가는 왕실근위대장의 부관 카르스텐 바익스.
그는 등 뒤에서 들리는 국왕의 거친 숨소리에 잠시 갈등했지만, 이내 마음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폐하, 너무나 힘들고 고단하시겠지만... 조금만 더 버텨주소서. 탈출의 성공 여부는 시간에 달렸습니다.”
“... 하악... 하악...”
카르스텐의 말에 뭐라 대답조차 하지 못할 만큼 지쳐버린 국왕 요제프.
하지만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결코 발을 멈추지는 않았다.
나이 어린 주군이 충직한 수하에게 내려준 무언(無言)의 대답.
힘들다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태어나 지금껏 왕성 안에서만 지내며 이 같은 고생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국왕 요제프가 느끼고 있을 고통을 생각하니 비애감이 드는 카르스텐이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어주시... 응?”
무슨 말이라도 꺼내 어린 주군을 위로하려던 카르스텐의 앞에 뭔가 눈에 띄는 구조물이 등장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일렁이는 등불의 빛에 의해 명확해지는 생김새.
그것은, 분명히 말하건대 ‘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폐하, 도착한 것 같습니다.”
마침내 출구에 도달했다는 기쁨과 그 너머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하아악... 하아...”
말은 걸어왔다지만 사실상 ‘뜀 걸음’에 가까웠던 고된 여정에 완전히 퍼져버린 어린 소년, 국왕 요제프가 벽을 짚고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 세웠다.
그 모습을 본 카르스텐이 놀라며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나는, 괜찮다. 어서, 출구를... 출구를 열어라.”
“... 알겠습니다, 폐하!”
철컥- 끄그그극...
통짜 쇳덩이로 만들어진 문을 열어젖히자 다시 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공간이 나왔다.
마치 깊은 동굴 속에 들어온 듯한 풍경.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돌벽이 사방을 감싸고 있었다.
“흐음...”
예상 밖의 풍경에 마음이 답답했지만 카르스텐은 침착하게 등불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돌벽 이곳저곳을 살폈고, 곧 긴 막대기 모양의 무언가가 툭 튀어나와 있는 것을 찾아냈다.
“... 이게 뭐지?”
생소한 무언가의 등장에 카르스텐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그는 곧 차분한 얼굴로 돌아와 막대기 위에 손을 얻었다.
“이렇게... 하는 건가?”
그리고, 힘을 주어 그 막대기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크르르르릉-!!!
카르스텐이 막대기를 잡아 내리자 돌벽 안쪽에서 마치 짐승의 울음 같은 요란한 소음이 들렸다.
그리고,
그그그그그-!
“...!”
그저 딱딱한 바위라고만 생각했던 왼편의 돌벽이 서서히 움직이며 열리기 시작했다.
“와아...”
예상을 벗어난 광경에 압도당해 입을 벌리는 국왕 요제프.
그리고 마찬가지로 깜짝 놀랐으나 호위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은 카르스텐에 천천히 허리춤의 검을 뽑아내며 앞으로 나섰다.
그그그그- 쿠웅!
천천히 열리던 문이 마침내 움직임을 멈췄다.
눈앞에 나타난 공간은 앞서와 별반 다르지 않은 동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동굴 특유의 습기와 냄새가 가득한 그 공간에, 카르스텐이 발을 디디며 말했다.
“폐하, 지금부터 혹시 모를 적의 출현에 대비하기 위해 등불을 꺼트리겠습니다. 시야가 어두워질테니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제 등에 손을 대고 천천히 따라오시면 됩니다.”
“... 알았다.”
왕실근위대장을 모시는 부관직을 역임할 정도의 뛰어난 엘리트 기사인 카르스텐은 등불이 없는 캄캄한 동굴 속에서도 사물을 어느 정도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의 신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 국왕 요제프는 사회적으로야 누구와도 비할 바 없이 존귀한 신분을 지녔지만, 육체적으로만 본다면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아니 오히려 평균에도 못 미치는 수준.
지금까지 앞길을 밝혀주었던 등불을 꺼트리자 곧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고, 요제프의 시야는 완전히 차단되어 버렸다.
저벅, 저벅-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고 어둠 속을 걸어나가는 카르스텐과 국왕 요제프.
그리 격한 움직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치밀어오르는 긴장감에 두 사람은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 출구가 보입니다.”
그렇게 5분 정도를 이동하자, 동굴 입구가 가까워진 듯 주변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카르스텐 뿐 아니라 요제프도 주변을 살필 수 있을 정도.
비로소 요제프는 카르스텐의 등에서 손을 떼고 조금 여유로운 자세로 걷기 시작한다.
“도착한 것 같습니다, 폐하.”
“... 나도 보았다.”
마침내 확연하게 보이는 밝은 빛.
출구에 도착했다.
***
두두두두두두두!!!
하늘로 날아오르는 거센 흙먼지.
왕도 카를리온의 서문(西門)을 벗어난 한 떼의 인마가 무서운 속도로 가도를 따라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1조와 2조는 저쪽 평야로 가 수색한다. 3, 4조는 오른편에 보이는 산으로 가라. 그리고 5, 6조.”
“예!”
“너희는 나를 따라간다.”
“알겠습니다.”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거다. 수상한 자들이 보이면 빠짐없이 수색해라.”
“예, 명을 받듭니다!”
우렁찬 복창과 함께 세 방향으로 갈라져 나아가는 검은 갑주의 무리들.
베겐스바흐 대공의 친위대이자 대공파의 최대 전력, 암흑기사단과 수많은 병력들이 국왕 요제프를 사로잡기 위한 추적을 개시했다.
***
바스락-
“크워어?”
근처에서 나는 인기척에 뒤쪽을 돌아보는 오크 한 마리.
소속 부족의 정찰병 역할을 하는 녀석으로, 먹잇감을 찾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왕도 근처까지 내려온 참이었다.
휘잉- 콰지직!!!
“쿠억!!!”
짧은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오크 정찰병.
단 한 번의 칼질로 오크의 머리통을 쪼개버린 사내, 카르스텐 바익스가 쓰러지는 오크를 일별한 채 날카로운 시선으로 다음 상대를 바라본다.
“크륵?! 크와아아악!!!”
정찰 나온 오크는 모두 세 마리였는데, 남은 두 마리는 동료가 쓰러지자마자 들고 있던 도끼를 치켜들며 거센 반격을 펼치기 시작했다.
“크롸락!!!”
휘우웅- 휭! 휘잉!
오크의 근력은 인간의 수준을 한참 넘어선 막강한 수준이었기에, 휘두르는 도끼 한 방 한 방에 어마어마한 힘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그런 오크를 상대하는 카르스텐의 얼굴엔 조금의 당황이나 두려움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아무리 강력한 공격이라 한들, 상대에게 맞추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것.
날렵한 몸놀림으로 두 마리 오크의 도끼 공격을 피해낸 카르스텐의 검이 섬전 같은 속도로 오크의 목덜미를 베어냈다.
쉬이이잉- 촤아악! 촥!!!
“끄르르르륵!!!”
“크웍! 컥...!”
순식간에 당한 오크 두 마리가 피가 철철 흐르는 목을 손으로 부여잡으며 주저앉는다.
워낙 깊게 베인지라 손으로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출혈이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모습이다.
“... 잘가라.”
담담한 목소리로 오크들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리는 카르스텐.
콰직! 푸화악!!!
한 녀석은 먼저 간 동료처럼 머리통이 쪼개졌고, 또 다른 한 녀석은 목이 완전히 베여 머리통이 분리되었다.
몇십 초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오크 정찰병 셋을 베어낸 카르스텐.
그가 숨 한번 헐떡이지 않는 차분한 모습으로, 나직히 입을 열었다.
“... 폐하, 정리했습니다. 다시 이동하겠습니다.”
카르스텐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쪽에서 들리는 마른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렸다.
바스락, 바스락-
눈에 띄게 초췌해진 몰골로 뒤쪽의 무성한 수풀 속에서 걸어 나오는 국왕 요제프.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지쳐 있었지만, 소년의 눈엔 전에 없는 독기가 어려 있었다.
경험해본 적 없던 고난이 말랑했던 소년의 가슴 속에 단단함을 심어준 모양이었다.
“...?!”
순간, 카르스텐이 걸음을 멈춘다.
요제프는 느끼지 못했지만, 예민한 기사의 감각을 지닌 그는 본능적인 위협을 느낀 것이다.
“폐하, 잠시만...”
요제프의 걸음을 멈추게 한 후, 카르스텐은 가까운 곳에 자리한 나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딱히 도구의 도움을 받지 않았음에도 쭉쭉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모습이 마치 고양잇과의 맹수처럼 표홀했다.
그렇게, 나무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 확인한 주변의 경관.
멀리 왕도 카를리온 방면에서 뿌연 흙먼지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 젠장.”
아직은 거리가 멀어 확실한 소속을 알 수는 없었지만, 카르스텐은 저 흙먼지의 원인이 되는 이들이 자신과 어린 주군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 직감했다.
마음이 급해지니 차분하게 내려갈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나무 꼭대기에서 그대로 손을 놓고 뛰어내리는 카르스텐.
휘이익- 터억!!!
마치 고양이의 착지처럼 부드럽게 바닥으로 떨어진 카르스텐이 곧바로 일어서며 말했다.
“폐하, 죄송하지만... 제가 옥체에 손을 대도록 하겠습니다.”
“...!”
카르스텐의 얼굴에 떠오른 급박함을 알아챈 요제프가 곧바로 대답한다.
“그리하라.”
“예, 폐하.”
곧, 요제프를 등에 업은 카르스텐이 빠른 속도로 숲속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
빼애애애애액-!!!
“...?!”
하늘에 띄운 사냥매가 날카로운 울음을 터트렸다.
곧, 지상에서 그 울음을 들은 수색대의 지휘관이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사냥매를 따라 북쪽으로 이동한다. 서둘러라! 도망친 국왕이 그쪽에 있다!”
“대장님, 암흑기사단 측에도 방향을 알릴까요?”
“암흑기사단?”
부하의 질문을 받은 수색대 지휘관이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린다.
평소 눈앞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함부로 행동하던 암흑기사단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재수 없는 새끼들, 내가 군대에서 먹은 짬밥이 얼마인데...’
그는 베겐스바흐 지역이 대공의 영지로 주어지기 훨씬 전부터 영지군의 장교로 복무해온 사람이었다.
나이와 계급, 심지어 군 경력까지 모든 면에서 암흑기사단 소속 인원들보다 앞섰다.
하지만 대공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암흑기사단의 인물들은 사사건건 그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했다.
그때마다 속이 뒤집히는 것처럼 분노가 치밀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암흑기사단이 대공파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그 정도로 거대했기 때문이다.
‘내가 기껏 발견한 걸 그 싸가지 없는 새끼들이랑 나눠 먹을 필요가 있나?’
평소에 쌓인 감정이 워낙 좋지 않았기에, 그게 뭐든 기회만 된다면 암흑기사단에게 불이익을 주려 했던 수색대의 지휘관.
하여 그는 국왕 요제프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암흑기사단에게 알리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아니, 알리지 않는다. 국왕은 우리끼리만 추적해서 잡는 거로 하지.”
“?!”
지휘관의 대답에 놀란 부하의 눈이 커진다.
“하, 하지만... 암흑기사단 측에서 추후에 이 일을 걸고넘어지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걸고넘어질 게 뭐가 있나? 그냥 우리가 국왕을 잡아서 대공 전하 앞으로 끌고 가면 될 일인데.”
“만에 하나라도 국왕을 놓칠까 봐 드리는 말씀입니다.”
“...!”
부하의 대답을 들은 지휘관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진다.
국왕 확보라는 일생일대의 군공(軍功)을 세울 생각에 반대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저희가 생각한 대로 요제프 국왕을 문제없이 잡아낸다면 좋겠지만, 놓친다면 큰 문제가 될 겁니다. 분명 왜 암흑기사단 측에 보고하지 않았냐는 말이 나올 것이고, 대공 전하께서도 그 부분에 크게 노하실 겁니다.”
“...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건가? 이대로 그 재수 없는 암흑기사단 새끼들한테 보고를 하자는 거야?”
“예. 보고를 해야합니다.”
“이런 시발!”
성질이 난 지휘관이 걸쭉한 욕설을 내뱉으며 씩씩거린다.
하지만, 아직 부하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보고의 시간을 좀 늦출 수는 있겠지요.”
“보고의 시간을... 늦춘다?”
“예. 그럼 만약에 일이 잘못되더라도 추후 있을 책임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흐음...”
부하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주억거린 지휘관이 잠시 후 결정을 내린다.
“지금으로부터 1시간, 딱 1시간 후에 암흑기사단에 보고를 하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그 전에 무조건 국왕을 잡는다. 암흑기사단, 그 아래위 없는 개자식들에게 이 공을 넘겨줄 수 없지.”
“예, 반드시 국왕을 잡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