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탈출 (9)
“저쪽이다!!! 저쪽으로 도망쳤다!!!”
퓌우우우웅-!!!
퓌유웅!!!
사방에서 효시(嚆矢)가 날아오른다.
사냥매의 인도를 따라 국왕 요제프가 숨어 있는 숲속으로 들이닥친 대공의 병사들.
무려 백여 명 남짓한 숫자의 병사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자 숲속의 동물들이 깜짝 놀라 사방으로 흩어지며 도망쳤다.
“저기다! 쏴라!!!”
퉁! 퉁! 퉁!
장교의 명령을 받은 석궁수들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쐐애액-!!!
섬뜩한 파공성을 내며 날아가는 십수 발의 볼트들.
파팍! 파파팍!
목표물에 적중시키지는 못했지만, 거의 근접한 거리에 벼락처럼 볼트가 내리꽂힌다.
“이런 썅! 놈들을 쫓아라!!!”
성과 없는 첫 번째 공격에 열 받은 장교가 발을 구르며 호통을 쳤다.
펠리노어 왕국의 절대자인 국왕을 상대로 ‘이놈, 저놈’ 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꼴이 황당했지만, 이 공간의 누구도 그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들은 펠리노어 왕국이 아닌 베겐스바흐 대공국 소속의 병사들.
더욱이 자신들의 군주인 베겐스바흐 대공이 펠리노어 왕국의 왕좌를 노리는 지금의 상황에선 더더욱 거리낄 것이 없었다.
“국왕을 산 채로 잡아 오는 놈에게 대장님께서 100골드의 포상을 약속하셨다! 죽을 힘을 다해 뛰어라!!!”
“와아아아아!!!”
거기에 더해 평생 일해도 만져볼까 말까 한 거액의 포상금까지 걸렸으니, 병사들은 눈이 뒤집혀 달려들 수밖에.
한편, 물욕과 출세욕에 사로잡힌 백여 명의 병사들에게 쫓기는 표적, 국왕 요제프와 그의 호위 카르스텐은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몰려 있었다.
“허억! 허어억! 쿠웨에엑! 허억!!!”
당장이라도 피를 토하며 쓰러질 듯한 모습의 카르스텐.
그의 등엔 죽음에 대한 공포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국왕 요제프가 업혀 있었다.
벌써 30분 가까이 이어진 병사들의 추격.
그 시간 내내, 카르스텐은 어린 주군을 등에 업은 채로 거친 숲길을 내달렸다.
아무리 그가 인간의 육체적 한계치에 도달한 엘리트 기사라고 해도 지칠 수밖에 없는 상황.
뛰는 중간중간 헛구역질을 할 정도로 그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하지만 카르스텐은 그야말로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육신을 지탱하며 도주를 이어가고 있었다.
투웅! 퉁! 퉁! 투웅!
“!?”
등 뒤에서 들려온 섬뜩한 소리를 들은 카르스텐의 몸이 일순간 달리던 방향을 바꾼다.
지칠대로 지친 다리 근육을 쥐어짜 급격하게 만들어 낸 방향 전환.
파파파파팍!!!
곧, 카르스텐과 그의 등에 업힌 요제프가 있던 자리에 무수히 많은 볼트가 날아와 박힌다.
조금만 늦었다면 그의 두 다리가 벌집이 되었으리라.
“커흐윽! 웨엑!”
연신 헛구역질을 하며 눈앞에 보이는 바위를 타 넘고, 수풀을 헤쳐나가던 카르스텐은 생각했다.
‘... 이제 한계다.’
자신의 몸은 자신이 잘 알았다.
더는 뛸 수가 없었다.
나약한 스스로의 능력에 눈물이 치밀어 오르고, 자신을 믿고 이 중요한 임무를 맡겨준 왕실근위대장 데미언 카릴베르크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다 망쳤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
카르스텐의 앞에 안쪽이 텅 빈 상태로 말라죽은 거대한 고목(枯木) 한 그루가 나타났다.
곰처럼 커다란 들짐승이 들어가 살아도 충분할 만큼 큰 크기였다.
‘저기다!’
희망의 끈을 놓으려던 순간, 새로운 희망이 나타났다.
카르스텐은 이 또한 주 아르닌의 안배인 것이라 속으로 생각하며 황급히 고목 앞으로 달려가 등에 업고 있던 국왕 요제프를 내려놓았다.
“폐하, 이 고목 안쪽으로 들어가십시오!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몸을 숨기셔야 합니다!”
“바익스 경...!”
국왕 요제프 역시 카르스텐과 마찬가지로 더는 도망치기가 힘들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던 차였다.
차라리 도주를 멈추고 추격대의 수장에게 카르스텐의 목숨을 살려달라 부탁하는 게 어떨까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별안간 나타난 고목 안으로 자신을 들어가라고 하다니...
“바익스 경! 안된다! 무리한 싸움이다! 차라리 내가 나서서 항복을 한다면 그대의 목숨을 살려달라 말해볼 수...”
“안됩니다, 폐하!”
누적된 피로로 눈이 벌겋게 충혈된 카르스텐이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절대... 절대로 이 보잘것없는 놈의 목숨을 구명하고자 적에게 항복하지 마십시오! 신 카르스텐 바익스, 주군의 긍지를 팔아 목숨을 연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왕국의 기사로서, 그리고 폐하의 기사답게 이 자리에서 죽겠습니다!”
“...!”
촤아아아앙!!!
그 말을 마치고 뒤로 돌아선 카르스텐이 허리춤의 검을 뽑아내었다.
이미 지척까지 다가와 있는 적들.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그들의 눈을 보며, 카르스텐이 외쳤다.
“와라! 내가 바로 폐하를 보위하는 왕실근위대의 기사, 카르스텐 바익스다!!!”
***
“저런 미친...”
국왕 추격대를 이끌던 지휘관, 우베 발(Uwe Bahl)이 치미는 당혹감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국왕을 등에 업고 죽어라 도망치던 왕실근위대 소속의 기사.
그놈이 죽음을 각오하고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는데, 그 불길에 자신의 부하들이 속절없이 타죽고 있었다.
“흐아아아아!!!”
“뒈져, 이 새끼야!!!”
카캉! 촤르르릉- 푸화악! 촤악!!!
이번엔 두 명이다.
검을 치켜들고 각기 다른 방향에서 달려들었던 병사 두 명이 놈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동시에 목이 떨어졌다.
“시발... 또 죽어?! 하아...!”
그 모습을 본 우베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긴 한숨을 토해낸다.
대체 몇 명이나 죽은 건지, 국왕 요제프를 숨긴 고목 앞엔 놈에게 덤벼들었다가 역으로 당해 죽은 부하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심지어 그게 하나둘 쌓이다 보니 동선을 방해하는 장애물의 역할을 해 추격대의 진입을 점점 더 어렵게 하고 있었다.
“이런 썅! 그냥 석궁을 쏴서 죽여버려! 쏴! 빨리 쏘라고!”
“하지만 대장님, 그랬다간 나무 안쪽에 숨어 있는 국왕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아... 아으, 이런 시발! 개 같은! 아까는 잘만 쐈잖아!!! 근데 왜 이제와서...”
“그, 그때는 거리가 멀어서 쐈던 것인데, 지금 여긴 거리가 너무 가깝습니다. 국왕이 맞으면, 바로 죽을 겁니다!”
부하의 일리 있는 지적에 울분이 터진 우베가 연신 욕설을 토했다.
베겐스바흐 대공이 ‘가급적 국왕을 살려서 잡아오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혹시라도 국왕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도 있는 근거리 사격을 할 수가 없었던 것.
그 점을 파악한 것인지, 왕실근위대의 기사는 고목 앞 서너 걸음 정도의 범위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사실 말로 표현하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사방에서 덤벼드는 적들과 싸우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건 말 그대로 상대와 비교해 압도적인 기량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같은 무(武)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 감탄할 만한 광경이었지만, 아쉽게도 상대는 적이었고 그 사실은 우베를 점점 더 미치게 만들었다.
‘제기랄, 이제 시간도 별로 없는데...!’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연락을 받고 우르르 몰려올 그 망할 암흑기사단 놈들에게 공을 빼앗길 수도 있었다.
한마디로 ‘죽 쒀서 개 주는’ 상황이 될 수도 있는 상황.
치밀어 오르는 초조함으로 얼굴이 벌겋게 변한 우베가 포위망을 유지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는 부하들을 향해 소리친다.
“으으, 야! 너, 너, 너! 그리고 너! 한꺼번에 덤벼! 빨리 치고 들어가라고! 움직여 이 새끼들아!!!”
“아, 알겠습니다!”
우베의 지적을 받은 네 명의 병사가 한꺼번에 나섰다.
각자 들고 있는 무기가 달랐는데, 두 명은 창을 들고 있었고 남은 둘은 검이었다.
기사, 그것도 왕실근위대에 소속된 초(超) 엘리트 급의 기사인 카르스텐과 비교할 순 없었지만, 그들 역시 고된 훈련을 통과하고 적지 않은 경험을 쌓은 베테랑 병사들.
그들은 자연스럽게 각기 다른 방향을 점유하며 서서히 상대와의 거리를 좁혀나가기 시작했다.
***
“후우...”
팔다리가 욱신거리고, 온몸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목에선 비릿한 피 내음이 느껴진 지 오래.
잠깐이라도 눈을 감으면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 수도 있을 만큼 카르스텐은 지쳐 있었다.
하지만...
‘...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그는 전신에서 느껴지는 막대한 피로감을 기사로서의 사명감과 끓어오르는 투지로 이겨내며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다.
눈앞에 즐비한 적들의 시체.
그 시체의 수가 열을 넘어간 순간부터 적들은 함부로 덤비기를 주저하기 시작했고, 그로 이해 카르스텐은 약간의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허나, 그 여유는 금세 사라졌다.
각각 다른 방향에서 무기를 치켜들고 조심스레 접근하는 네 명의 적들.
카르스텐의 입장에선 그들 넷 모두 한두 번의 칼질로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의 별 볼 일 없는 실력을 지닌 이들이었다.
하지만 등 뒤에 지켜야 할 국왕이 있었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지친 몸 상태에선 조금의 방심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에 카르스텐은 심호흡을 하며 전신의 긴장을 끌어올렸다.
“지금! 쳐라아!!!”
다가오던 이들 중 선임인 자의 외침에 네 방향에서의 공격이 동시에 시작되었다.
“와아아아!!!”
“죽엇! 이 시발놈아아!!!”
“대공 전하 만세!”
각기 다른 외침, 각기 다른 공격.
두 자루의 창과 두 자루의 검이 동시에 날아들며 카르스텐의 전신을 노렸다.
얼핏 보기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을 듯 보였으나...
“흐읍!”
카르스텐은, 그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뭣?!”
콰악!
왼쪽으로 크게 발을 내디딘 카르스텐이 옆구리를 노리고 찔러온 장창을 절묘한 몸놀림으로 피해냈고, 이어 비어 있는 왼손으로 그 창대를 단단히 붙잡았다.
카캉!
동시에 머리와 가슴을 노리고 찔러진 두 자루의 검을 오른손에 든 검을 휘둘려 위쪽으로 쳐냈다.
다른 방향으로 쳐냈다가 혹시라도 뒤쪽에 있는 국왕 요제프에게 위협이 될 것을 방지한 것이다.
카르스텐의 몸이 왼쪽으로 쏠린 탓에, 오른쪽에서 밀고 들어오던 병사의 창은 허공을 찌르는 꼴이 되었다.
“흐아아앗!!!”
한 번의 움직임으로 네 방향에서 가해진 적의 공격을 분쇄한 카르스텐이 있는 힘껏 몸을 회전시켰다.
동시에 왼손으로 붙잡았던 왼편 병사의 창을 오른편 병사의 가슴팍에 쑤셔 박았다.
퍼어억!
“쿠엑!!!”
창날에 심장을 정확히 꿰뚫린 오른편의 병사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뒤쪽으로 튀어나갔다.
순간적으로 몸이 붕 떠서 밀려날 정도였으니, 창에 실린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이런 씨...!”
쉬이잉!!! 푸확! 촤아악!!!
카르스텐의 손에 들린 검이 또다시 번뜩이며 정면에서 달려들었던 두 병사의 목을 베어냈다.
한 명은 제대로 목이 베여 머리가 떨어졌고, 한 명은 어깨로 들어간 검이 그대로 몸을 베고 지나가 반대편 가슴으로 나왔다.
형태는 달랐지만, 결론은 똑같은 끔찍한 죽음.
한순간에 세 명의 적을 처리한 카르스텐의 발 앞으로 들고 있던 창을 빼앗긴 왼편의 병사가 허우적거리며 엎어진다.
“어흐윽! 허억!!!”
바닥에 엎어졌던 병사는 다급하게 몸을 뒤로 빼며 일어서려 했지만, 어느새 목덜미에 닿은 검날의 차가운 예기(銳氣)를 느끼고 그대로 몸이 굳었다.
뚝... 뚝...
동료들의 목을 베어내며 묻은 붉은 피가 검날에서 떨어져 병사의 목덜미를 적신다.
그 서늘한 감각에 바닥에 엎드린 병사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라.”
“예, 예엣!”
죽음의 공포에 덜덜 떨며 자리에서 일어난 병사의 등 뒤에 선 카르스텐이 들고 있던 검을 병사의 목울대 쪽으로 옮긴다.
“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이놈의 목을 베겠다!”
“...!”
추격대의 병사를 붙들고 때아닌 인질극을 벌이기 시작하는 카르스텐.
추격대가 냉정함을 잃고 석궁 공격을 퍼부어 댈 것을 고려해 일종의 ‘방패’를 세운 거였다.
“사, 살려주십시오! 대장님! 제발!”
“으으으! 이런 개 같은 새끼가!!!”
살려달라며 울부짖는 병사의 모습을 본 우베는 미치고 팔딱 뛸 지경이었다.
아직 남아 있는 병사의 수는 충분했지만, 어차피 국왕이 숨어 있는 고목 주변의 지형 특성상 넷 이상이 한꺼번에 달려들 수는 없었다.
계속 병사들을 투입해봤자 희생자만 늘 뿐이고, 그렇다고 석궁을 쏠 수도 없다.
그야말로 답이 없는 상황.
‘국왕 체포’라는 눈부신 군공을 날려버릴 위기에 처한 우베가 이를 갈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던 그때...
슈아아아아아-
어디선가 날아온 묵빛의 장창 한 자루가,
“!?”
퍼어어어억!!!
“끄에엑!!!”
고목 앞에 서 있던 추격대 병사의 가슴팍을 관통하여,
“커흑!”
그 등 뒤에 서 있던 카르스텐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