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탈출 (10)
“커흑!”
마지막 순간, 위기를 감지하고 몸의 방향을 비틀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추격대 병사의 가슴팍을 뚫고 나온 창이 카르스텐의 옆구리가 아니라 복부 한복판에 박혔을 거다.
“으으윽!”
하지만, 창이 배가 아니라 옆구리에 박혔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뼈가 상하거나 장기(臟器)가 다치는 일은 피했지만, 옆구리에 족히 손가락 서너 개는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끔찍한 고통은 둘째치고 출혈이 어마어마한 수준이라 빨리 치료를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
“크윽, 으으으!”
하지만 카르스텐은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 세운 후, 자신의 옆구리에 박힌 창을 왼손으로 단단히 붙잡은 채 검을 휘둘렀고...
“흐아아아아!!!”
휘웅- 터어엉!!!
사방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함성과 함께, 그는 자신의 옆구리에 틀어박힌 창날을 제외한 나머지 창대 부분을 잘라내 버렸다.
“큽!”
검이 창대를 베어내는 순간 상처에 가해진 충격에 정신이 아찔해진 카르스텐이 이를 악물었다.
이제는 아프다는 표현을 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을 정도의 격통이 전신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쓰러지지 않았다.
아니, 쓰러질 수 없었다.
그의 뒤에서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는 작은 소년, 국왕 요제프를 지켜야 했으니까.
“저런 미친놈...!”
“와... 독한 새끼, 저걸 안 쓰러지고 버텨?!”
“와, 씨발! 나 같으면 창 맞았을 때 그냥 기절했다!”
그 모습을 본 대공의 병사들을 저마다 진저리를 치며 경악했다.
더불어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존경의 말을 수도 없이 내뱉었다.
‘적이지만 실로 대단하다!’
‘저런 게 정말 기사지...!’
‘시발, 대공은 이렇게까지 해가면서 왕이 되고 싶은 건가?’
‘제 조카한테 이렇게 까지...!’
체력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고 무엇보다 돌파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죽음이라는 결론밖에 남아있지 않는 최악의 상황.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기사로서의 명예와 긍지를 지키기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투지(鬪志)를 불태우는 모습을 보였다.
그 숭고한 모습이 추격대 병사들의 가슴 속에 커다란 울림을 만들고 있었다.
***
한편, 소름 끼칠 만큼 정확한 투창 실력으로 인질로 잡혀 있던 추격대의 병사를 죽이고 카르스텐에게 치명상을 안긴 사나이.
“저걸 버텨? 제법이군.”
베겐스바흐 대공의 친위대, 암흑기사단의 3조장 발데마르 가우더(Waldemar Gauder)가 흥미롭다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말을 몰아 다가왔다.
“... 가우더 경, 드디어 오셨군요.”
발데마르의 등장을 확인한 국왕 추격대의 대장 우베 발(Uwe Bahl)이 억지로 반가운 척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상대가 기사이긴 하지만 우베 역시 베겐스바흐 대공국 내에서 군 지휘관으로 명성이 높은 인물.
그런 그가 존댓말을 써 가며 인사를 했음에도, 발데마르는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별말 없이 턱만 까닥일 뿐이었다.
‘이런 싸가지 없는 시발 새끼 같으니!’
우베는 속에서 천불이 일었지만, 별수 없었다.
발데마르의 직책은 무려 대공의 친위대인 암흑기사단의 여섯 조장 중 하나.
그의 위치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국왕 체포 작전의 미진함을 물어 우베의 목을 친다 하여도 별 탈이 없을 터였다.
하여 우베는 자신의 속마음을 숨긴 채 억지 미소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 많이도 죽었군.”
고목 앞에 즐비하게 늘어선 추격대 병사들의 시체를 본 발데마르가 한심하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얼핏 보아도 스물이 훌쩍 넘는 시체의 수.
그리고, 그 너머에 두 눈으로 푸르른 귀기(鬼氣)를 내뿜으며 버티고 서 있는 한 명의 사내.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인간이라면, 그리고 같은 검의 길을 걷는 기사라면 그 처절한 분투(奮鬪)에 조금이라도 존경의 마음이 들 테지만, 발데마르는 그저 조롱 섞인 말투로 이렇게 지껄일 뿐이었다.
“평소에 얼마나 훈련을 안 했으면 다 죽어가는 저런 새끼 하나를 못 잡아서 저 꼴이 되나? 한심하군.”
“...”
발데마르의 폭언에 주변에 있던 추격대 병사들이 고개를 떨군다.
부끄럽거나 창피해서 고개를 숙인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끓어오르는 분노의 감정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저놈 이름이 뭐라고?”
“왕실근위대의 기사 카르스텐 바익스라고 합니다. 왕실근위대장인 다닐렌츠 남작의 부관이라고...”
“오호, 왕실근위대장의 부관이라?”
실력이 남다르다 했더니, 과연 그럴만한 녀석이었다.
생각 이상으로 먹음직스러운 이름의 등장에 발데마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주변 사람들이 ‘승냥이 같다’고 표현하는, 발데마르 특유의 미소였다.
“안드레아스.”
“예, 조장.”
“가서 저놈의 목을 나한테 가져와라. 되도록 빨리.”
“예, 알겠습니다.”
휙- 철컹!
발데마르의 명령을 받은 암흑기사단 3조 소속의 기사, 안드레아스가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가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 암흑기사단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묵빛의 플레이트 아머가 서로 부딪치며 둔탁한 쇳소리를 냈다.
터엉-!
이어, 그는 머리 위에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 바닥에 집어 던졌다.
강철로 만들어져 얼굴 전체를 가리는 면갑(面甲)이 달린, 암흑기사단 특유의 묵빛 제식 투구였다.
투구 따위는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리라.
저벅, 저벅- 촤아아앙!!!
카르스텐이 서 있는 고목 앞으로 걸어가며 허리춤의 검을 뽑아내는 안드레아스.
명성 높은 암흑기사단 소속의 기사답게 검을 뽑아내는 동작에 일체의 군더더기도 묻어 있지 않다.
“자, 어디...”
천천히 걸어나가는 부하의 모습을 보며, 발데마르가 비릿한 미소를 흘린다.
“... 왕실근위대, 실력 좀 볼까?”
***
카캉! 캉! 휘이잉- 카아앙!!!
암흑기사단의 기사, 안드레아스의 공격을 겨우겨우 막아내는 카르스텐.
카르스텐은 분명 훌륭한 실력을 지닌 엘리트 기사였지만, 상대는 그런 카르스텐을 압도하는 수준의 강자였다.
‘젠장, 뭔 놈의 힘이 이렇게...!’
손목을 넘어 팔과 어깨, 전신을 바위로 짓누르는 듯한 충격.
‘이게 암흑기사단...!’
안드레아스의 검은 변화가 단순했지만, 눈부시게 빠르고 또한 무지막지하게 강한 힘을 담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바닥 이곳저곳에 추격대 병사들의 시체가 깔려 있어 자칫 잘못하면 발이 걸려 넘어질 상황에서도 상대는 마치 발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완벽한 보법을 구사하며 카르스텐을 몰아붙였다.
오히려 발이 꼬인 것은 카르스텐 쪽이었다.
체력의 저하, 계속되는 출혈에 실력까지 차이까지 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결과.
턱-
“큽!”
결국, 바닥에 엎어져 있던 시체의 머리에 발이 걸린 카르스텐이 몸의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리고 상대인 안드레아스는 그런 적의 위기 상황을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는 사내가 아니었다.
휘이잉-
휘청거리는 카르스텐에게 번개같이 검을 내리친 안드레아스.
“흐읍!”
카아앙-!
몸의 중심을 잃은 상황에서도 검을 휘둘러 머리로 떨어지는 상대의 검을 막아낸 카르스텐이었으나, 곧바로 이어진 상대의 공격에는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퍼어억-!
안드레아스의 공격은 지독하고, 또 집요했다.
그는 발데마르의 투창 공격으로 입은 카르스텐의 옆구리 상처를 향해 잽싸게 발차기를 가했고, 보기 좋게 공격을 성공시켰다.
으득-
“크허윽!!!”
발차기를 맞는 순간, 카르스텐은 자신의 갈비뼈가 부러졌다는 것을 알았다.
뼈를 부러뜨릴 정도의 공격이니, 그 발차기에 실린 힘이 얼마나 강하겠는가.
발차기를 맞는 순간 카르스텐의 몸 전체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순식간에 뒤집히며 바닥에 처박힌다.
“허읍! 허으윽!”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의 고통을 느끼며 바닥에 엎어진 카르스텐이 허우적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하지만...
“그냥 누워 있어, 이 새끼야.”
퍼억! 탱그렁-
“커억!”
순식간에 곁으로 다가온 안드레아스가 일어서려는 카르스텐의 얼굴을 발로 걷어차 버렸고, 카르스텐은 손에 쥔 검을 놓칠 정도의 큰 충격을 받으며 바닥을 굴렀다.
“어흐윽... 큭...”
안드레아스가 신고 있는 강철 부츠에 얼굴을 제대로 걷어차인 카르스텐.
그는 추격대 병사들이 흘린 피가 뒤섞여 진창이 된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움직이지 못했다.
“꺼흐윽... 끅...”
아직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었지만, 시야가 가물거리고 머릿속이 뿌옇게 변했다.
“폐... 폐하... 폐하...”
겨우겨우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는 카르스텐.
코가 깨지고, 입술이 터져 피가 줄줄 흐른다.
얼굴에 묻은 더러운 진흙들이 입을 틀어막아 말로 제대로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카르스텐은 그 엉망이 된 얼굴을 들어 어떻게든 고목 안쪽에 있을 국왕 요제프의 얼굴을 보고자 했다.
“죄... 죄송합...”
기사로서 끝까지 주군을 지키지 못한 죄를 용서받기 위함이었다.
“조장님. 이놈, 어떻게 할까요?”
바닥에 엎어져 헐떡거리는 카르스텐의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안드레아스가 고개를 돌려 상관인 발데마르에게 물었다.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그냥 죽여 버려. 살려둬 봤자 짐만 된다.”
“알겠습니다.”
집에 나타난 벌레를 죽이라는 듯, 심드렁한 발데마르의 목소리.
그 대답을 들은 국왕 추격대의 모두가 이를 악물었다.
비록 적이었으나, 존중받아 마땅할 훌륭한 기사를 함부로 대하는 그의 모습에 반감이 일은 탓이다.
하지만 대공의 수하 조직 중에서도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암흑기사단의 간부급 인물에게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모두가 안타까운 심정으로 카르스텐을 바라보았다.
존경받아 마땅한 기사의 최후를 기억하기 위해서.
“폐... 하, 구, 국왕... 폐하...”
“시끄럽군. 쓸데없는 소리 그만 지껄이고, 조용히 가라.”
쉬이잉-
날이 바닥을 향하도록 역으로 틀어쥔 검을 치켜들어 카르스텐의 목을 겨누는 안드레아스.
그가 그대로 검을 내리찍어 카르스텐의 숨통을 끊으려던 찰나,
휘우우우우우웅!!!
어디선가 날아온 커다란 투창 한 자루가,
퍼어억!!!
“!!!”
안드레아스의 머리통을 꿰뚫어 버렸다.
“누구냐!!!”
촤아앙-!
그 끔찍한 광경에 모두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단 한 사람, 암흑기사단의 3조장 발데마르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순식간에 검을 뽑으며 투창이 날아온 쪽을 노려보는 발데마르.
그런 그에게 분노(忿怒)의 감정이 철철 흘러넘치는 목소리로 누군가가 소리쳤다.
“간악한 침탈자의 무리가 감히 왕국의 충신을 핍박하느냐!!!”
장내의 모두가 순간 몸이 굳는 것을 느낄 정도로 천둥 같은 외침이었다.
“...!?”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본 발데마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처음 이곳에 등장한 이후로부터 단 한 번도 여유를 잃지 않은 그였으나, 저 사나이 앞에서만큼은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암흑기사단 3조의 모든 기사들이 한꺼번에 덤벼들어도 감히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사나이.
펠리노어 왕국의 국왕 친위대, 사자기사단의 수장(首長) 베를하임 남작 빌헬름 리벤트로프가 자신의 검을 치켜들며 소리치고 있었다.
“루트비히의 개새끼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얼쩡대는 것이냐! 내 오늘 이 자리에서 사리분별 못하고 함부로 날뛰는 개새끼들을 때려잡고 그 주인에게 죄를 물을 것이다!!!”
암흑기사단의 묵빛 갑옷을 보고도 움츠러들기는커녕 더욱 목소리를 끌어올리는 빌헬름이다.
“사자기사단!”
“하-!!!”
다시 한번 장내에 천둥이 몰아친다.
그것은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을 드러낸 왕국의 사자들이 한꺼번에 내지른 맹렬한 포효(咆哮)의 결과.
이어 빌헬름은 적에 대한 분노와 투지로 벌겋게 달아오른 사자들의 목줄을 힘차게 풀어버린다.
“국왕 폐하를 구하라! 모든 적들을 주살하라!!!”
“왕국의 적들에게 죽음을!!!”
“주 아르닌이여, 국왕을 지키소서!!!”
“가자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처절한 실패로 마무리될 것 같았던 국왕 요제프의 왕도 탈출 작전이 성공이란 결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