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의 깃발 아래 (3)
“...”
시종일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한 채 말 위에 올라타 들판을 가로지르는 중년의 사내.
그의 뒤로,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늘어선 인마(人馬)의 무리가 따라오고 있다.
나부끼는 깃발과 통일된 복색.
멀리서 봐도 기치창검이 정연한 것이, 제대로 된 지휘관 아래서 오래 훈련받은 강병임을 느낄 수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을 이동했다는 걸 증명하듯, 중년의 사내와 그가 이끄는 병력 모두의 갑옷 위에 뽀얀 흙먼지가 내려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뒤 사람과의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하며 이동 중인 것이 눈에 띄었다.
두두두두두-!!!
그때, 저 멀리에서 보이는 커다란 도시의 정문에서부터 다급히 달려오는 한 떼의 기마병들.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모두가 그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지만, 이쪽의 숫자가 워낙 압도적인 탓에 쓸데없는 긴장 따윈 하지 않았다.
히이이잉- 터억! 털썩! 털썩!
“오셨습니까!”
중년 사내의 앞에 도착한 기마병들이 약속한 것처럼 일제히 말에서 뛰어내려 고개를 숙인다.
“...”
사내는 잔뜩 기합이 들어간 기마병의 인사를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받아냈다.
이름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굳이 힘들여 스스로를 설명하지 않아도 대륙 남부에서 검을 든 이라면 사내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까.
그의 위상이 그토록 대단했기 때문일까?
사내의 무뚝뚝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기마병들은 극히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영주님께서 진즉부터 경의 도착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저희가 안내하겠습니다.”
“... 음.”
기마병들의 말을 들은 사내가 한쪽으로 고개를 비뚜름하게 기울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 모습을 본 기마병들이 조심스럽게 몇 마디를 더 보탠다.
“적지 않은 거리를 쉬지 않고 이동하셨으니 여독이 쌓이셨을 터, 영주성으로 가셔서 휴식을 취하시고 성대하게 준비한 저녁 연회를...”
허나, 기마병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백작 각하께 받은 임무가 중하니, 영주성에 들를 여유가 없다. 전장으로 바로 갈 것이다. 영주님께 예의를 차리지 못함을 죄송하다 전해라.”
“예...? 아니, 그, 그게...!”
사내의 대답에 놀라 되묻는 병사였으나, 이내 상대의 눈빛에 짓눌려 고개를 숙였다.
감히 뭐라 반박할 수 없는, 거대한 위엄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 아, 알겠습니다. 영주님께는 그리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하지.”
다각, 다각, 다각-
발 딛고 선 땅의 주인인 영주의 초청을 말 몇 마디로 거절해버린 그가 잠시 멈췄던 행군을 다시 시작한다.
사자의 머리를 형상화한 은빛의 강철 투구.
잘 단련된 팔다리와 날카로운 눈매, 견실한 턱을 지닌 장신의 기사(騎士).
“바이펠베르크 백작이라...”
지난 수십 년간 ‘왕국제일검’이라 불리던 절대무적의 기사를 상대하기 위해 바쁘게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의 이름은,
‘바덴하임의 사자(獅子)’ 에리히 프라이슬러였다.
***
루테니아, 프롤린_
“영주님, 급보입니다!”
헐레벌떡 달려온 다닐렌츠 정보부 장교가 내게 전한 뜻밖의 소식.
“... 바덴하임이 움직였다고?”
그것은 바로, 왕국에서 가장 부유한 영지로 불리는 백작령 바덴하임이 군사를 움직였다는 소식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뜻밖은 아닌가?’
<로스트 킹덤> 소설 원작에서도 바덴하임 백작령은 대공파의 주요 세력 중 하나였다.
달리 ‘황금백(黃金伯)’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바덴하임 백작 헤르만 바이츠제커.
그는 자신의 영지가 자리한 대륙 남부에서만큼은 왕도 부럽지 않을 만큼의 대단한 권세를 누리고 있었으나, 그에 만족하지 않고 평생 중앙 정계로의 진출을 열망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황금백의 가슴에 불을 지핀 것은 왕국 전역 돈의 흐름을 통제하는 재무대신의 자리.
재무(財務)의 실익과 대신(大臣)의 명예를 모두 손안에 쥐고픈 노귀족의 욕망은 결국 왕실과 맺은 봉신(封臣)의 맹세조차 저버리도록 만들었다.
‘... 원작 스토리를 그대로 따라가겠다는 거지?’
물론, 원작의 흐름을 워낙 많이 뒤틀어 놓은 탓에 소설의 내용과 똑같이 진행되지는 않겠지.
하지만 결국 바덴하임이 왕국을 배신하고 대공의 밑으로 기어들어 간 것은 똑같으니, 어차피 그게 그거다.
“세부 내용, 보고해봐.”
“예, 영주님.”
바짝 긴장한 얼굴로 몸가짐을 바로 한 정보부 장교가 들고 있었던 문서를 내게 건네며 보고를 시작한다.
“현재 바덴하임을 떠난 영지군 병력이 바덴하임 백작의 봉신 영지인 란츠베르크와 브렌도르프의 변경지대에 집결해 있다고 합니다.”
“란츠베르크라... 병력 숫자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1만 명 정도인 것으로 추산됩니다.”
“1만? 1만이라고?”
정보부 장교가 전한 바덴하임 군의 규모에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답했다.
병력이 1만이라니.
그게 다 정규군일 리는 없고, 절반 이상은 돈을 주고 끌어모은 용병대 병력일 테지만 그걸 고려해도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 아니, 아무리 어중이떠중이 병력을 섞었다고 해도 창검을 든 사내 1만 명이면 무시무시한 전력이지.’
1만 명이 뭔가.
그 절반인 5천 명만 되어도 어지간한 중소 영지 따윈 하룻밤 사이에 밀어버릴 수 있었다.
과연 황금으로 산을 쌓을 만큼 돈이 많다는 바덴하임 영지다운 병력 동원 능력이었다.
“혹, 놈들이 영지 경계선을 넘었나?”
나의 질문에 정보부 장교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현재 놈들은 란츠베르크 남서부의 변경지대에 머물며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 대충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군.”
정보부 장교의 보고를 들으며 지도를 살피니, 대충 바덴하임 군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란츠베르크(Landsberg).
대륙 남부에 자리한 바덴하임의 여러 봉신 영지 중 하나로, 남서쪽으로 바이펠베르크의 봉신 영지인 브렌도르프와 접해있고, 북쪽으로는 ‘왕국의 젖줄’이라 불리는 포나우 강과 맞닿아 있는 곳이다.
바덴하임 놈들이 그런 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버티고 있다는 건...
“... 바이펠베르크의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한 포석이군.”
“맞습니다. 저희 정보부에서도 그렇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나와 정보부의 의견이 일치했다.
무려 1만에 달하는 바덴하임 군이 란츠베르크에 웅크리고 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나의 장인어른이신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대공이 우리 다닐렌츠를 치기 위해 왕도를 비우고 나오면 바이펠베르크 측에서 그 틈을 노려 왕도를 노릴까 봐, 그걸 대비하기 위해 바덴하임 군이 나선 것이다.
“적 지휘관은 누구지? 파악이 되었나?”
“예, 영주님. 파악되었습니다. 여기, 뒷장에...”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냉큼 대답하며 내가 들고 있던 보고서의 뒷장을 넘겨주는 정보부 장교.
그곳에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낯익은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 예상했던 대로군.”
‘바덴하임의 사자(獅子)’, 에리히 프라이슬러
지금으로부터 7년 전, 저 멀리 대륙 남부 끝에 자리한 도시 리트렌의 성벽 위에서 내게 쓰라린 패배의 기억을 안겨주었던 사내의 이름이 그곳에 있었다.
“하긴, 이 정도의 이름이 아니라면 장인어른에게 부담을 줄 수 없겠지.”
바덴하임이 동원한 1만의 병력이 대단하긴 했지만, 사실 바이펠베르크 역시 같은 백작령으로서 만만치 않은 저력을 지닌 영지였다.
지금 당장 전쟁을 일으킨다고 해도 족히 6, 7천 명 정도의 병력을 일으킬 수 있었고, 무엇보다 그 병력을 지휘하는 인물이 ‘왕국제일검’이라 불리는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였다.
바이펠베르크 백작 단 한 명의 존재만으로도 평범한 병사 2, 3천 명의 차이 정도는 메꿀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
그러니, 바덴하임의 입장에서도 그들이 지닌 최강의 검을 뽑아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7년 전 리트렌에서 싸울 때 레벨이 88이었던 것 같은데, 그동안 얼마나 더 강해졌으려나...”
“예? 지금 무슨 말씀을...”
“음? 아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혼잣말이었어. 그보다, 더 보고할 게 있나?”
“아닙니다. 제가 가져온 건 여기까지입니다.”
충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정보부 장교에게 가벼운 치하의 말을 건넨 후 돌려보냈다.
이어 나는 아껴 쓰는 고급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들고 장인어른께 보내는 서신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미사여구가 많았지만,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장인어른, 바덴하임의 사자는 제가 잡도록 해주십시오.’
***
바이펠베르크, 쾨니히슈타인_
바이펠베르크의 주도(主都), 쾨니히슈타인은 며칠 전부터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바이펠베르크의 동쪽에 자리한 봉신 영지, 브렌도르프.
그리고 그 브렌도르프와 서로의 경계를 맞대고 있는 란츠베르크에 무려 1만 명이나 되는 병력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해당 병력의 소속은 다름 아닌 백작령 바덴하임.
선대 국왕인 하인리히 4세의 죽음 이후 공공연히 대공파로의 합류 의사를 내비쳤던 그들이 이제 노골적으로 반역(反逆)의 의사를 내비치고 있었다.
“바덴하임 놈들의 움직임은?”
“여전히 별다른 변화가 없습니다. 브렌도르프와 란츠베르크의 월경지에 주둔하며 군사적 긴장감만 돋우고 있습니다.”
“건방진... 감히, 이 디트리히를 상대로 가당치 않은 겁박을 하겠다는 건가?”
쾨니히슈타인 중심에 자리한 영주성, 그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영지 수뇌부들의 회의실.
상석에 자리한 바이펠베르크의 영주, 백작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20여 년간 지키고 있던 왕실근위대장의 무거운 책무를 사위에게 물려주고 고향이자 자신의 영지로 돌아온 그였다.
하지만 돌아온 바이펠베르크에서 그는 영주로서의 이름만 유지하고 있을 뿐, 사실상 첫째 아들인 로이스 그뢰네마이어 자작에게 영주로서의 모든 권한을 넘겨준 후 여유로운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 국왕 요제프 3세가 자신의 숙부인 베겐스바흐 대공이 일으킨 반란을 피해 왕도에서 탈출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고, 그 일 이후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는 일선으로 복귀해 다시금 영지를 이끌고 있었다.
“브렌도르프 측의 준비 상황은? 들어온 게 있나?”
“예, 브렌도르프 남작이 직접 영지군 병력을 이끌고 란츠베르크와의 접경지로 향했습니다. 병력은 약 3천, 브렌도르프 영지군 2천에 급히 긁어모은 용병 1천을 더해 나섰다고 합니다.”
“... 라이너가 직접?”
브렌도르프 남작이 직접 병력을 몰고 나섰다는 소식을 들은 디트리히가 인상을 구긴다.
브렌도르프 남작, 라이너 클루게(Rainer Kluge).
그는 디트리히가 믿고 신뢰하는 충직한 봉신 영주 중의 한 사람이었다.
젊었을 적 꽤 이름을 날리던 기사였고, 지금 역시도 죽지 않은 실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 그래도, 바덴하임 놈들과 충돌은 최대한 피하라고 전해. 에리히 그놈이랑 부딪치면 승산이 없으니. 애초에 병력도 밀리지 않나.”
“예, 각하.”
“바덴하임 놈들과 전면전은 최대한 피해야 해. 어차피 저놈들도 붙을 생각으로 기어 나온 건 아닐 테니...”
이어진 가신들과의 회의를 통해, 디트리히는 영지의 병력을 투입해 충직한 봉신의 어깨에 힘을 실어주기로 한다.
“헬무트.”
“예, 각하.”
“백검기사단 전원을 이끌고 브렌도르프로 가라. 가서, 바덴하임 놈들이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디트리히의 명령에 바이펠베르크가 자랑하는 가장 날카로운 검, 백작 친위대 백검기사단 전원이 전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