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74화 (173/197)

왕국의 깃발 아래 (4)

멀리 포나우 강 이남에 자리한 브렌도르프와 란츠베르크 영지 사이에 군사적 긴장감이 하늘 높은지 모르고 치솟고 있던 그때,

“대, 대공 전하를 뵙게 되어 가문의... 아니, 이 땅 모든 이의 영광이옵니다!!!”

값비싼 비단으로 만들어진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 흙바닥에 오체투지의 자세로 엎어져 있는 사내.

루테니아의 남동쪽에 경계를 맞대고 자리 잡은 영지, 트란베르크(Tranberg)의 영주인 베른 파보르텐(Bern Pavorten) 남작이었다.

“... 만나게 되어 반갑군, 트란베르크 남작.”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트란베르크 남작의 뒤통수로 차가운 목소리가 내리꽂힌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국왕 요제프를 잡기 위해 루테니아로 군사를 휘몰아 북상 중인 베겐스바흐 대공 루트비히.

그의 차가운 목소리엔 명백한 질책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얼마 전 왕도 카를리온을 탈출해 다닐렌츠 남작의 영지로 도망친 국왕 요제프.

분명 그 과정에서 트란베르크를 지날 수밖에 없었을 텐데, 왜 국왕의 도주를 막지 못했느냐는 분노 섞인 물음.

바닥에 엎어진 트란베르크 남작은 공포에 질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가까스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저 역시도 국왕의 도주를 저지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사, 사... 사자기사단이 그의 곁을 물샐 틈 없이 지키고 있는 통에 도저히...”

“사자... 기사단...”

그 이름을 들은 루트비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어린 조카를 사로잡을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추격에 나섰던 암흑기사단 3조를 몰살시키고 사라진 그들.

펠리노어 왕국 국왕 친위대, 사자기사단.

지난 몇 년간 제대로 된 실전 투입도 없이 귀족가 도련님들의 친목 도모 모임 정도로 격하되었던 그들이 과거의 빛나는 명성을 떠올리게 만드는 활약을 선보였다.

자신을 따르는 대공 친위대, 암흑기사단을 최고로 여기던 루트비히의 입장에선 속이 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그래서, 사자기사단의 이름값에 짓눌려 아무것도 안 했다는 건가? 겁 먹은 똥개 새끼처럼?”

“저, 전하! 용서를...!”

분을 참지 못한 듯, 바닥에 납작 엎드려 죄를 구하는 트란베르크 남작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루트비히.

바닥에 닿아 있는 그의 머리통을 그대로 짓밟아 버리고 싶은 충동에 루트비히의 두 눈이 번들거렸다.

바로 그때,

“전하, 노기를 가라앉히시지요.”

“...!”

루트비히의 앞을 가로막는 누군가.

대공파의 2인자, 로텐바인 백작 귄터 에슬링이었다.

“아무리 과거만 못하다고는 하나 한번 사자는 영원한 사자, 트란베르크 남작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귄터의 차분한 목소리가 루트비히에게로 향한다.

그의 성격이 자비로워서 트란베르크 남작을 도와주는 걸까?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듯, 귄터 에슬링의 독심(毒心)은 그의 주군인 루트비히보다 더하면 더 했지 그보다 못하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가 지금 트란베르크 남작을 감싸주는 이유는 혹시 모를 대공파 소속 귀족들의 이탈을 걱정해서였다.

아무리 과거만 못하다고는 하나 여전히 왕국 내에 명성이 자자한 국왕 친위대, 사자기사단이었다.

그런 이들과의 전투를 피했다는 이유로 처벌한다면, 대공을 향한 다른 귀족들의 충성심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하여 귄터는 앞으로 나섰다.

주군인 루트비히의 면을 세워주기 위한, 그럴듯한 말과 함께

“그러니 전하, 이번만큼은 그의 사정을 헤아려주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 어떨는지? 그리 한다면, 트란베르크 남작 또한 전하의 관대함에 감격할 것입니다.”

“... 그러지.”

여전히 가슴 속은 분노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트란베르크 남작에게 화풀이를 해봤자 달라질 것이 하나 없다는 것을 루트비히 역시 잘 알았다.

그렇기에, 참기로 했다.

“일어나게, 트란베르크 남작.”

“예, 예!”

그때까지도 바닥에 납작 엎드려있던 트란베르크 남작이 루트비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입고 있던 옷은 물론이고 이마와 뺨에도 흙모래가 묻어 있었지만, 감히 그것을 털어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였다.

“영주성으로 가지. 행군을 오래 했더니 꽤 고단하군.”

“제가 모시겠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트란베르크 남작이 다급한 발걸음으로 달려가 자신의 말 위에 올랐다.

오늘 저녁 연회는 그 어느 때보다 성대하게 치러낼 것이라 다짐하면서.

***

루테니아, 프롤린_

“대공의 병력이 트란베르크의 주도 트레빈에 입성했습니다.”

다닐렌츠 정보부 장교가 전한 소식을 들으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력 규모는?”

“지금까지 들어온 규모에 의하면 8천 정도로 추산됩니다. 다만, 계속해서 대공파 귀족들의 증원군이 트란베르크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음...”

“트란베르크 지역에서 활동하던 우리 측 정보원들의 숫자가 애초부터 많지 않았던 터라 첩보 수집에 애로사항이 많습니다. 급하게 다닐렌츠 본령(本領)에 정보원 추가 파견 요청을 하였지만, 단시간 배치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건 뭐, 당연한 소리지. 이 난리통에 적진으로 숨어 들어가기가 쉽나. 이해한다.”

그 뒤로도 한참을 책상 위에 놓인 수많은 보고서를 뒤적거리며 정보부 장교와 전략 회의를 거듭하던 그때...

“대장님.”

“음?”

고개를 들어 나를 부르는 이의 얼굴을 확인해보니, 국왕 요제프의 호위에 붙여둔 왕실근위대의 기사였다.

“폐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속히 가보심이...”

“폐하께서?”

“예.”

“무슨 일로... 알았다, 바로 가겠다.”

회의도 중요했지만, 주군인 국왕의 부름보다 우선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정보부 장교와 나누던 회의 내용을 급히 마무리 짓고 방을 나서 국왕의 거처로 향했다.

“폐하, 찾으셨습니까.”

“오, 근위대장. 오셨습니까?”

밝은 얼굴로 나를 맞이해주는 국왕 요제프.

평생 왕도를 떠나 생활해본 적이 없는 그였기에, 처음에는 조금 어색해하는 듯한 느낌이 있었는데 이제는 제집처럼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쁜 데 내가 괜히 부른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아닙니다, 폐하. 제가 그 무슨 일을 하건, 폐하의 부름에 응하는 것보다 더 중한 일은 없사옵니다.”

“하하하, 그리 말해주니 고맙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요제프의 두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

단순히 신임하는 가신을 바라보는 주군의 시선이 아니라 마치 피를 나눈 가족를 바라보는 듯한 모습.

‘하긴... 내가 큰 형 정도의 나이는 될 테니.’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저 멀리 왕국 북부의 친정에 떨어져 있으며, 숙부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기가 막힌 상황.

그런 와중에 목숨을 걸고 자신을 위해 싸우고 있는 큰 형님 같은 내게 인간적인 호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겠지.

“다름이 아니라... 이것을 전해주려 불렀습니다.”

“...?”

별안간 내게 양피지로 만든 두루마리 하나를 내미는 국왕.

순간 이게 뭔가 싶었지만, 일단은 왕이 주는 것이기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공손히 두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았다.

“확인해보시오, 근위대장.”

“예, 폐하.”

안 그래도 그 내용이 궁금했기에, 사양하지 않고 두루마리를 끌러 그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곳엔, 정말로 예상치 못했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

“...!”

앞뒤에 쓰인 미사여구를 생략하면, 두루마리에 담긴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남작령 다닐렌츠의 지위를 백작령으로 승급하며, 카릴베르크 가문의 장자 데미언에게 다닐렌츠 백작의 작위를 내린다.

- 카릴베르크 가문의 장자 데미언에게 루테니아 남작의 작위를 내린다.

- 카릴베르크 가문의 장자 데미언에게 바렌부르크 남작의 작위를 내린다.

지금까지 펠린느 왕실에서 인정해준 나의 귀족 작위는 ‘다닐렌츠 남작’ 하나뿐이었다.

때문에 그동안 소금 전쟁의 승리로 얻은 두 지역, 바렌부르크와 루테니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음에도 대외적으로는 그 땅의 주인임을 내세우지 못했던 거다.

“폐하 이것은...”

“이미 오래전에 바렌부르크와 루테니아, 두 곳의 남작령을 승계받았음을 인정해달라는 요청을 왕실에 했었다지요?”

“아, 예. 그렇습니다.”

국왕 요제프의 말처럼, 나는 소금 전쟁의 승전 직후 바렌부르크와 루테니아, 두 남작령의 주인으로 인정해달라는 요청을 왕실 측에 전한 바 있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그 요청에 대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려 세 개 영지를 한꺼번에 손에 쥐고 다스리는 새로운 대귀족의 출현을 기존 귀족 세력들이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선왕 폐하, 저의 아버님께서 귀족 세력들과의 충돌을 피하려 부득이하게 그 요청을 들어주시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저는 다르지요.”

거기까지 말한 후 잠시 처연한 표정을 짓는 국왕 요제프.

곧, 허탈함이 담긴 목소리로 그가 하려던 말을 마무리 짓는다.

“어차피, 저는 왕도에서도 쫓겨난 상황 아닙니까? 눈치 볼 귀족들조차 곁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으니, 이제야 비로소 그대의 청을 들어줄 수 있게 되었군요.”

“폐하...”

“하하!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근위대... 아니지, 이젠 이렇게 부를까요?”

얼굴에 떠올라 있던 처연함을 지워내고, 그 나이 또래의 소년에게 어울릴 미소를 지은 국왕 요제프가 내게 말한다.

“다닐렌츠, 백작.”

“...!”

“앞으로, 나와 우리 왕실을 위해 애써주세요. 그대만 믿겠습니다.”

***

국왕으로부터 예상치도 못한 큰 선물을 받은 다음 날.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던가, 꽤 유쾌해진 마음으로 돌아온 내 앞에 던져진 것은 영 좋지 못한 소식이었다.

“대공의 병력이 트란베르크 북부 레오덴 요새 방면으로 진군을 시작했습니다! 총 병력 1만2천 규모로 보이며 계속 늘어나는 중입니다!”

“... 그새 4천이 늘었나? 총력전이군.”

나는 보고서의 내용을 훑으며 쓴 입맛을 다셨다.

포나우 강 이남에서 대기 중인 바덴하임 군을 제외하고, 자신들이 지닌 모든 힘(總力)을 한데 끌어모은 대공 루트비히가 마침내 실력행사에 나선 것이다.

“격문을 보낸 국왕파 귀족들의 반응은?”

“그게... 생각보다 훨씬 더 응원군 파견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국왕을 잡고 대공 루트비히가 이끄는 새로운 왕국을 만들기 위해 무섭게 세를 결집 중인 대공파와 달리 국왕파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왕도에서 출병한 대공의 병력이 왕국 북서부 트란베르크 영지까지 밀고 올라올 동안 이곳 루테니아에 도착한 국왕파의 응원군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너무한 것 같습니다. 국왕 폐하께서 이토록 큰 위기에 처해 계신 데, 다들 자신들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있으니...”

“비열한 새끼들 같으니! 평소 왕국의 충신입네 떠들던 놈들도 상황이 이리 되니 죄다 발을 빼는 모양새입니다!”

원통해 미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 없는 국왕파의 귀족들을 욕하는 부하들.

회의실 가득 비분(悲憤)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던 그때,

“다들 조용히 해라.”

유일하게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고 있던 내가 한마디 말로 소란스러운 회의실의 분위기를 다잡았다.

“... 여긴 전쟁을 승리로 이끌 방안을 논의하는 곳이지, 비겁한 겁쟁이들을 두고 욕지거리를 나누는 술집이 아니다.”

“... 죄송합니다.”

“왕국 북부가 바인야르 놈들의 침공으로 발이 묶이고, 바이펠베르크 백작령이 바덴하임 군과 대치 중인 상황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를 도우러 올 이는 없다고 생각하고, 전략을 짠다.”

“알겠습니다!”

그 이후로 한동안 진행된 전략 회의.

마침내 나온 결론을 들고, 나는 국왕 요제프를 찾았다.

“... 생각한 것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이군요.”

“예. 그러나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이, 그리고 빌헬름 경을 비롯한 왕국의 충신들이 폐하를 반드시 왕도로 모실 것입니다.”

나의 목소리에 담긴 단단한 의지를 느낀 것일까?

얼굴에 서린 어두움을 털어낸 국왕 요제프가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린다.

“다닐렌츠 백작과 사자기사단장, 두 사람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트란베르크로 나아가 왕국의 적과 싸우시오!”

“예, 폐하! 반드시 승리를 거두도록 하겠습니다!”

“사자기사단의 명예를 걸고, 기필코 역도들을 소탕하겠나이다!”

***

신성력(神聖歷) 789년 3월 4일,

다닐렌츠 백작, 데미언 카릴베르크가 이끄는 8천의 다닐렌츠 영지군과 국왕 친위대 사자기사단.

루테니아 남동부, 트란베르크 남작령의 레오덴 요새를 향해 출병(出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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