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75화 (174/197)

왕국의 깃발 아래 (5)

남작령 트란베르크의 북부에 자리한 레오덴(Leoden) 요새의 앞으로 넓게 펼쳐진 평야 지대.

엄혹했던 겨울이 지나 초봄의 푸릇함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는 그 너른 벌판을 사이에 두고 국왕파와 대공파, 왕국의 주인을 자처하는 두 세력이 마주했다.

“역시, 대부분의 병력이 바깥에 진을 치고 있군요.”

멀리 보이는 대공파의 진영을 확인한 내가 함께 국왕파의 군사를 이끌고 있는 사자기사단장 빌헬름 리벤트로프에게 말했다.

“예, 아무래도 레오덴 요새의 규모 자체가 협소하니까요. 저 정도 대군을 한꺼번에 수용할 능력이 되질 않습니다.”

빌헬름의 말 그대로였다.

요새의 규모가 협소한 터라 베겐스바흐 대공을 비롯한 대공파의 몇몇 중요 수뇌부들만 요새 안에 머물고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요새 바깥에 주둔 중인 상황이었다.

“주둔지의 형태가 엉망이군요. 전술 개념이 없는 놈들이 마구잡이로 몰려와 막사를 설치한 꼴입니다.”

“맞습니다. 제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군요.”

다닐렌츠 영주 자리에 오른 이후 수년간 현존하는 모든 종류의 병법서(兵法書)를 탐독하며 부족한 군사적 지식을 채운 나였다.

거기에 히든 피스를 통해 흡수한 검성(劍聖)의 기억까지 더하니 적의 진형을 슬쩍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파훼법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리벤트로프 경.”

“예, 각하.”

내가 국왕으로부터 다닐렌츠 백작의 작위를 받은 후 나를 부르는 호칭이 바뀐 빌헬름이었다.

나보다 족히 스무 살이나 연배가 높은 양반에게 깍듯한 존대를 받게 된 상황이었지만, 이제 귀족들의 법도에 대해 숨 쉬듯 자연스러워진 나는 그런 빌헬름의 변화를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기선 제압, 확실하게 해주셔야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대공파라는 이름 아래 뭉쳐 있었으나 각자의 소속도, 원하는 바도 다른 느슨한 연합군의 형태.

거기에 더해 숫적 우위를 믿고 한껏 느슨해져 있는 놈들의 분위기.

나는 바로 그 점을 노려 과감한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했고, 빌헬름 또한 내 생각에 군말 없이 동의를 표했다.

잠시 후,

뿌우우우우우우우-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뿔나팔 소리와 함께, 집채만 한 군마에 올라탄 사자기사단이 돌격을 시작했다.

“가자, 사자들아! 왕국의 적들을 물어뜯어라!!!”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국왕 폐하에게 승리를! 펠리노어 왕국에 영광을!”

“아르닌이시여! 그대의 전사들을 지켜주소서!!!”

“자, 가자아아아!!!”

“이랴앗!!!”

“돌겨어어어어억!!!”

콰콰콰콰콰콰!!!

성난 군마들의 말발굽에 패인 시커먼 흙덩이가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왕국의 주인인 국왕에게 검을 치켜든 반역도들의 행태에 분노한 사자들의 맹렬한 돌진!

“적들을 분쇄하라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

선두에 선 빌헬름의 목소리에 뒤지지 않는 사자들의 함성이 너른 들판을 순식간에 메워나가고 있었다.

***

한편, 사자기사단의 돌격을 확인한 대공파의 주둔지에서는 일대 혼란이 빚어지고 있었다.

“저, 적이다! 적들의 공격이 시작됐다아아아!!!”

“뭐해 이 새끼들아! 빨리 갑옷 챙겨 입어!”

“이런 미친 새끼들이?! 전력 차이가 이렇게 나는데 달려든다고?”

“내, 내 검 어딨지? 어디다 뒀더라?!”

“이 병신 같은 새끼들아, 뭐해! 빨리 튀어나와!”

설마하니 국왕파 측에서 이렇게 과감한 공격을 시도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대공파의 귀족들이었다.

국왕파의 병력이 프롤린을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대공파의 병력은 1만2천 정도였다.

하지만 트란베르크까지 이동하는 동한 대공파의 병력을 더 늘어서 현재 1만5천을 상회하는 대군이 되어 있었다.

국왕파의 병력이 8천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거의 2배에 가까운 전력 차.

이처럼 양측의 전력 차가 확연했기 때문에 대공파는 감히 국왕파가 먼저 덤벼들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거다.

전투를 예상하지 못했으니, 마음이 풀어져 있던 것은 당연지사.

장교건 병사건 가리지 않고 막사 안에 처박혀 낮잠을 자고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던 그 순간 적의 피에 목마른 맹수들이 들이닥쳤다.

콰콰콰콰콰쾅!!!

“끄아아아악!!!”

“사, 살려! 크엑!!!”

어설프게 바닥에 박아두었던 말뚝 몇 개로는 성난 사자들의 돌진을 막지 못했다.

화단에 조그맣게 자란 수풀을 지나치듯, 주둔지 앞에 꽂아놓은 대(對) 기병용 말뚝을 가볍게 뛰어넘어 대공파 귀족들의 주둔지로 난입한 사자기사단.

그 선두에 선 빌헬름의 입에서 냉혹한 명령이 떨어진다.

“왕국의 역도들이다!!! 모조리 죽여라!!!”

“죽어라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그들은 일치단결하여 자신들을 막기는커녕 저들끼리도 손발이 맞지 않아 어수선하기 그지없는 대공파의 병사들을 상대로 마음껏 자신들의 실력을 발휘했다.

푸욱! 푸푸푹!

“끄헉! 끄어어...!”

“아아악! 살려줘어어어어!!!”

사방에 깔린 적들을 향해 닥치는 대로 찔러댄 사자기사단의 랜스(Lance, 기병창)가 금세 적들의 붉은 피로 물들었다.

으지직! 콰직!

충격이 누적되었기 때문인지, 사자기사단의 손에 들려 있던 랜스가 하나둘 부러져 나간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마치 이런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달리는 상태에서 부러진 창을 재빨리 집어던진 그들은 번개 같은 속도로 허리춤의 검을 꺼내 들고 전투를 이어나갔다.

“이런 개새끼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기어들어 오느냐!!”

거의 대다수가 등을 보이며 정신없이 도망치는 와중에 빠른 몸놀림으로 갑주를 차려입고 달려 나온 이들도 몇 명 있었다.

허수아비처럼 쓰러지는 병사들과 달리 제법 안정된 자세로 창검을 겨누며 덤벼드는 그들은 대공파 귀족들을 따르는 봉신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좆까, 이 반역자 새끼들아!!!”

푸화아악!!!

그래 봤자, 왕국 3대 기사단이라 불리는 사자기사단의 공격을 막아내기엔 손색이 있었다.

애초에 사자기사단에 이름을 올린 이들은 어렸을 적부터 남다른 재능으로 유명했던 이들.

그런 이들이 국왕 친위대에게만 주어지는 혈통부터 다른 명마에 올라 명장이 만들어낸 검을 휘두르니 이름 없는 시골 영지에서 기사랍시고 거들먹거리는 실력 정도로는 버텨낼 수가 없었다.

카아앙-!

“막아? 이것도 막아봐, 이 반역자 새끼야!!!”

“이런 씨... 커억!”

푹- 촤아아악!!!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우수수 쓰러지는 대공파의 기사와 병사들의 머리.

최근 몇 달간 절정의 실력을 지닌 검사, 왕실근위대장 데미언 카릴베르크에게 혹독한 지도를 받은 사자기사단의 검끝은 그 어느때보다 매서웠다.

“속도를 유지해라!!! 이 속도 그대로 나를 따라와라!!!”

“예!!!”

선두에서 말을 달리며 수하들을 이끌던 빌헬름이 말머리를 좌측으로 틀었다.

공격을 개시하기 전, 다닐렌츠 백작이 일러준 공격 전개 방향을 그대로 따르는 움직임이었다.

‘과연, 다닐렌츠 백작!’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쉴새 없이 베어내며 달리는 빌헬름의 머릿속엔 다닐렌츠 백작에 대한 감탄으로 가득했다.

그는 들판에 넓게 늘어선 대공파의 병력을 몇 번 살펴보는 것만으로 진형의 약점을 파악했고, 그 부실한 부분을 철저하게 노리는 식으로 순식간에 공격 전술을 마련해냈다.

그리고 그 전술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는 것은 지금 빌헬름과 그의 부하들이 증명하고 있었고.

“퇴각! 퇴가아아아악!!! 이대로 적진을 빠져나가 아군 진영으로 돌아간 뒤 재정비해서 나온다! 나를 따르라!!!”

“알겠습니다!!!”

콰콰콰콰콰콰!!!

***

“이런 씨발! 저 새끼들 뭐야?!”

대공파의 주둔지로 돌진해 들어왔던 사자기사단이 다시 빠져나가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5분여.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다치고 죽은 대공파의 병력은 족히 수백 명에 달했다.

“벨푸르트 남작!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요? 빨리 흑곰 기사단을 내보내지 않고! 벨푸르트 병력이 주둔했던 쪽이 가까웠잖아!”

“뭐어? 아니, 왜 우리한테만 뭐라고 하는 건데? 바로 옆에 헤렌도르프의 병력도 있었다고! 심지어 그쪽은 기사단 병력이 바로 옆에 있었어! 그, 청십자 기사단인지 적십자 기사단인지 하는 친구들, 아니야?”

“처, 청십자 기사단은 지금 바로 나설 수 없는 사정이 좀 있어서...”

“사정은 씨발, 전쟁터에 나와서 뭔 사정을 찾고 지랄이야?”

“아니, 그래서 흑곰 기사단은 왜 움직이지 않은 게요? 흑곰 기사단이 제때 나서서 버텨줬더라면 사자기사단 놈들을 잡을 수 있었소!”

“뭐야? 이 새끼가 지금 우리 애들한테 칼받이 하라는 거냐?”

“허어! 칼받이라니! 무슨 말을 그따위로...”

“그따위는 시발 네가 지금 말하는 게 그따위고! 너 지금 우리 애들이 용병 출신이라고 무시하는 거지? 어?”

“벨푸르트 남작 말조심하시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반말을 지껄이고...”

“어디긴 시발아, 전쟁터지. 여기가 무슨 점잖 떠는 연회장이냐?”

“벨푸르트 남작, 헤렌도르프 남작! 두 분 다 진정하시고!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지 않소! 이 상황을 수습할 생각을 해야지!”

“대공 전하께서는 별말씀이 없으신가?! 요새 안에서 아무 연락 없냐 이 말이야!”

엉망진창이었다.

제대로 된 체계 없이 사방에서 몰려들어 그저 머릿수만 채우고 있었던 대공파의 귀족들.

전쟁 후 얻어낼 잿밥에만 관심이 있어 몰려들었던 그들은 막상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사자기사단의 돌격을 보자 심장이 오그라들어 서로의 등만 떠밀다가 잔뜩 피해만 입고 말았다.

바로 그때,

“늙은 사자의 이빨이 썩어 문드러진 게 언제인데, 아직도 그런 허명에 짓눌려 계십니까?”

서로 먼저 나가라며 등을 떠미는 귀족들을 상대로 한심하다는 듯 호통치며 자리에서 일어난 한 사나이.

그의 얼굴을 본 몇몇 귀족들이 놀란 눈을 하며 소리쳤다.

“제, 제바스티안 벨리치!!!”

“부이텐베르크의 철인(鐵人)!”

사내의 이름은 제바스티안 벨리치(Sebastian Belitzsch).

대공파의 귀족 중 하나인 부이텐베르크 남작의 봉신 기사 중 하나로, 영주의 친위대인 철쇄기사단(鐵鎖騎士團)의 수장이었다.

철쇄기사단은 왕국에서 명성 높기로 따졌을 때 능히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이들.

그런 조직의 우두머리라는 자부심이 있으니, 사자기사단이라는 강적을 앞에 두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겠지.

“영주님! 저를 보내주십시오! 저와 철쇄기사단이 사자인지 고양인지 하는 놈들을 때려잡아 영주님 앞으로 끌고 오겠습니다!”

“오오!”

“역시 철쇄기사단!”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자신의 주군인 부이텐베르크 남작에게 출진을 요구하는 제바스티안.

그 모습에 한껏 뿌듯함을 느낀 부이텐베르크 남작이 고개를 끄덕인다.

“좋다, 가서 사자기사단의 이름이 한물간 것이라는 걸 증명해라!”

“예, 영주님!”

주군의 허락을 받고 보무도 당당하게 지휘 막사 박으로 걸어 나온 제바스티안이 철쇄기사단의 수하들을 이끌고 재빠르게 군영을 벗어난다.

“철쇄기사단!!! 가서 늙은 사자의 머릿가죽을 벗겨오는 거다! 가자아아아!!!”

“돌겨어어어어억!!!”

“가자아아아!!!”

거칠게 말을 달린 그들이 국왕파의 진영을 향해 똑바로 나아간다.

그 모습을 본 사자기사단 역시 피하지 않고 마주 달려 나오는가 싶었는데...

“저, 저건 뭐야?!”

자신만만하게 돌진해오던 철쇄기사단의 앞으로 순식간에 날아드는 무언가.

슈슈슈슈슈슉!!!

순식간에 공간을 꿰뚫고 날아온 그것들이,

푹! 푸푸푹! 푸푹!

“으아악!”

“커윽!”

“크에엑!!!”

달려오던 철쇄기사단의 머리와 몸통에 틀어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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