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의 깃발 아래 (8)
물론, 내가 지금 향하는 대공파의 지휘 막사 안에 대공파의 진짜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베겐스바흐 대공과 그의 핵심 가신들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레오덴 요새 안쪽에서 머물고 있을 터.
단단한 성벽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위험한 이곳 지휘 막사엔 그저 대공의 줄을 잡아보려는 얼치기 귀족들이나 머물러 있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대공파의 거물급 인사들을 사냥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얼치기 귀족들을 사냥하는 것도 꽤 의미 있는 일이다.
귀족들을 사로잡으면 받게 될 몸값 때문이냐고?
아니, 전혀 아니지.
‘그깟 몸값, 몇 푼이나 된다고...’
귀족들 잡아서 해당 영지에 뜯어내는 몸값을 노리기엔 내가 가진 돈이 너무 많았다.
그깟 푼돈보다 내게 더 중요한 건, 감히 왕국의 주인인 왕실을 배신하고 대공에게 들러붙은 놈들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 세상에 똑똑히 보여주는 것.
“흐아아아아아!!!”
새로이 마련한 나의 독문무기, 유일 등급의 도끼창 ‘낙뢰(落雷)’를 치켜든 채로, 나는 대공파의 지휘 막사를 향해 돌진했다.
휘우우웅- 콰직! 퍼억! 퍽! 푸화악!!!
거칠게 휘둘러지는 낙뢰의 궤도를 따라 대공파 병사들의 머리통이 터져나간다.
“으억! 저 자식 이쪽으로 오잖아!!!”
“막아라, 막아! 다들 뭐 하고 있어!”
“이런 시발, 내 말을 끌고 와라! 빨리 데려와! 빨리!”
“뭐해 이 새끼들아! 막아! 막으라고오오오!!!”
속도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 나의 돌진에 기겁한 대공파의 귀족들이 휘하 봉신 기사들을 닦달했다.
그 난리통에 등 떠밀려 지휘 막사 밖으로 튀어나온 몇몇 기사들이 각자의 검을 뽑아들고 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니, 가로막으려 했다.
“멈춰라! 나는 슈벤하임의...”
퍼어어억!!!
이름조차 제대로 듣지 못한 슈벤하임의 기사의 머리통이 터져나가고, 뒤이어 덤벼들었던 기사들 역시 순식간에 토막난 고깃덩이가 되어 피를 뿌렸다.
“키히이이이이이잉!!!”
나의 애마, 블리츠의 포효와 함께 나는 지휘 막사 주변을 둘러친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터턱!
“흐어윽!!!”
“와, 왔다!!!”
“경비병! 호, 호위병! 이런 씨... 아무도 없어?!”
마침내 눈앞에 등장한 나의 모습에 사신(死神)이라도 본 듯 질겁하는 대공파의 귀족들.
몇몇 안면이 있는 귀족들은 나에게 아는 척을 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잠깐! 잠깐만! 다닐렌츠 백작, 우리 얘기를...!”
“백작! 사, 살려주시오!”
“어쩔 수 없었던 거요! 대공이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우릴 죽이겠다고 얘기...”
퍼억!
가장 앞에서 떠들던 귀족 놈의 머리통이 터져나간다.
나는 놈들의 쓸데없는 변명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고, 손에 쥔 낙뢰를 휘두르는 것으로 그 생각을 증명했다.
“으아아아악!!!”
“다, 다닐렌츠 백작! 진정하시오!”
“이 개새끼야! 시발!!!”
어떤 놈은 소리를 지르고, 어떤 놈은 끝까지 나를 설득하려고 들었으며, 어떤 놈은 눈을 뒤집고 욕설을 토해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이들을 상대로,
“모두 지옥을 가라, 더러운 반역자 놈들아!!!”
한 명도 빠짐없이, 공평한 죽음을 선사해 주었다.
***
“후우우...”
뜨겁게 달궈진 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는 중년의 사내.
사자기사단장, 빌헬름 리벤트로프.
그의 주변엔 분노한 사자들의 송곳니에 물리고 찢긴 대공파 병사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단장님! 대승입니다!!!”
“우리가 이겼습니다! 대공파 새끼들, 우리가 완전 찢어버렸습니다!”
선봉에 나선 다닐렌츠 백작 데미언 카릴베르크의 뒤를 따라 함께 돌격한 사자기사단.
그들은 다닐렌츠 백작이 무너뜨린 대공파의 전열을 마음껏 헤집으며 검을 휘둘렀다.
가뜩이나 하나로 응집되지 못했던 대공파의 병사들은 국왕파의 연이은 강공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결국 비참할 정도로 지리멸렬하며 사방으로 도망쳤다.
압도적인 군세를 자랑하며 기세를 올리던 것을 생각하면 허망하게 느껴질 정도의 최후였다.
하지만, 역사에 기록될 정도의 대단한 승리를 거두고도 빌헬름의 표정을 밝지 못했다.
“너무... 쉬운데?”
말 그대로, 너무 쉬웠다.
대공파의 병력이 아무리 국왕파에 비해 질적인 면에서 열세라고는 하나, 이토록 쉽게 붕괴하다니?
‘... 선봉으로 나섰던 백작 각하의 무용(武勇)이 실로 초인적이라고는 하나, 뭔가 이상하다.’
그렇게, 빌헬름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불안감을 곱씹던 그때 온몸에 적의 피를 뒤집어쓴 다닐렌츠 백작이 말을 몰아 다가왔다.
그의 등장에 머릿속 생각을 잠시 제쳐둔 빌헬름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각하!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대승입니다!”
“후우... 리벤트로프 경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는 부하들이 건네준 손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뒤덮은 진득한 피를 닦아내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적들을 죽인 것인지, 피가 튀었다기보다는 아예 피로 가득 채워진 웅덩이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리벤트로프 경과 사자기사단이 뒤에서 잘 받쳐준 덕분에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대공파 놈들의 전열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각하. 각하께서 앞장서서 활약해주신 덕분에 저희가 편한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데미언이 늘어놓는 치하의 말에 고개를 흔들며 겸손을 차리는 빌헬름.
일견 국왕파의 총사령관인 다닐렌츠 백작을 상대로 예의를 차린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게 아니라는 건 당사자인 빌헬름은 물론이고 주변의 모든 이들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잇었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각하!”
“어떻게 그런 돌파를... 감히 따라할 수조차 없는 경지에 올라 계십니다!”
“하하하! 왕국제일검의 사위가 되면 똑같이 왕국제일검이 되는 겁니까? 정말 감탄했습니다! 그야말로 눈부신 돌파였습니다!”
“그 도끼창... 낙뢰라고 하셨습니까? 제가 군문(軍門)에 든 뒤 본 무기 중 단연 제일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한 번만 살펴보아도 될는지...”
“역시 영주님이십니다! 다닐렌츠 만세! 데미언 카릴베르크 영주님 만세에!!!”
역사에 기록될 대승을 이끈 사자기사단의 기사들과 다닐렌츠 영지군의 여러 기사들이 달려와 앞을 다투어 찬사의 말을 쏟아냈다.
몸에 묻은 적의 피를 어느 정도 닦아내고 제법 ‘사람의 몰골(?)’이 된 다닐렌츠 백작이 자신을 향해 열광하는 국왕파 장병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들 고맙다! 오늘의 승리는 나 개인의 활약이 아니라, 오늘 이 전투에 참여한 모든 장병의 용기와 헌신이 모여 만들어낸 것이다!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마음껏 승리의 기쁨을 즐겨라!!!”
“와아아아아아아아!!!”
적의 본진(本陣)이라 할 수 있는 레오덴 요새의 성벽 위엔 여전히 대공파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지만, 국왕파의 병사들은 요새 안의 적들이 들으라는 듯 일부러 더 소리를 높여 승리를 노래했다.
비록 요새를 떨어뜨리진 못했지만, 요새 밖에 우글거리던 대공파의 떨거지들을 싹 쓸어버린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전과였으니까.
“다닐렌츠 백작 만세! 국왕 폐하 만세에에에!!!”
“왕국이여 영원하라아아아아!!!”
***
나는 쏟아지는 장병들의 환호성을 뒤로하고 국왕파의 지휘 막사로 돌아왔다.
어마어마하게 격렬한 전투를 치른 후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몸 상태는 전투 전과 별반 다르지가 않았다.
전투 시의 체력 소모를 무려 90%나 감소시켜주는 히든 피스, ‘사자심왕(獅子心王)’ 카델린의 아뮬렛(The Amulet Of Cadelin) 덕분이었다.
“후우... 아이고, 죽겠네.”
한편, 나와 달리 급격한 체력 저하의 여파로 눈꺼풀이 잘게 떨리기 시작하는 사자기사단장 빌헬름.
그는 빠르게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미리 지휘 천막 안에 마련해 놓은 간단한 음식과 과일을 집어 먹으며 내게 말했다.
“어후, 백작 각하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무지막지한 돌파를 해내시고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으시는 건지... 힘들지 않으십니까?”
그런 그의 물음에 나는 가볍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뭐, 아직 젊어서 그런지 괜찮습니다.”
“젊어서 그렇다라... 글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백작 각하의 나이일 때를 생각하면, 영 달랐던 것 같습니다. 아니, 애초에 각하처럼 싸우지도 못했겠지만...”
“하하하!”
나이 많은 선배의 칭찬에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어 민망한 웃음을 터트리는데...
“각하,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한없이 무겁게 변한 빌헬름의 얼굴.
나는 그가 심상치 않은 말을 꺼내려 한다는 걸 직감했다.
“이상하다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대공파... 너무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음...”
“물론 각하의 무용이 실로 어마어마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공파의 대응이 너무나 형편없었습니다.”
혹시 자신의 말이 무인(武人)으로서의 내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않을까 싶어 대단히 조심스럽게 말하는 빌헬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들은 후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나 역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생각도 리벤트로프 경과 같습니다. 대공파... 물론 요새 밖 군영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들이 정예가 아닌 이유가 컸겠지만, 그걸 생각해도 너무 쉽게 무너진 것은 사실입니다.”
“역시, 각하께서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군요.”
“예. 그리고 리벤트로프 경도 느끼셨겠지만, 대공의 직속 기사단들은 한번도 전장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암흑기사단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검독수리 기사단도 보이질 않더군요.”
검독수리 기사단은 대공의 친위대인 암흑기사단의 뒤를 잇는 베겐스바흐 대공국의 대표 무력집단이었다.
개개인의 실력은 암흑기사단만 못하지만, 조직의 규모 자체가 훨씬 커서 어지간한 국지전 정도엔 기사단 단독으로 투입되어도 작전 수행이 가능할 정도였다.
“그럼 혹시...”
“예, 아마 리벤트로프 경도 지금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군요.”
경악으로 점점 커지는 빌헬름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사, 사령관님!!!”
거의 숨이 넘어 갈듯한 모습으로 지휘 막사에 나타난 연락 장교가 우리의 불길한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무슨 일이냐.”
“보, 보고 드리겠습니다! 레오덴 요새 전선을 크게 우회한 베겐스바흐 대공의 병력이 프롤린 근방에 나타났다는 소식입니다!!!”
“무어라!!!”
연락 장교가 전한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빌헬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루테니아의 주도 프롤린에, 바로 국왕 요제프 3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의 주력은 암흑기사단과 검독수리 기사단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약 3천 규모의 병력이 따라붙어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가, 각하! 지금 당장 프롤린으로 회군해야 합니다! 국왕 폐하께서 위험합니다!”
국왕파의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는 국왕 요제프가 적에게 사로잡힐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에 질겁한 빌헬름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빌헬름과 달리 별다른 변화가 없는 얼굴로 태연하게 손짓해 연락 장교를 지휘 막사 바깥으로 물렸다.
“수고했다. 나가보도록.”
“각하...?”
그런 모습에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음을 직감한 빌헬름.
그의 떨리는 눈빛을 향해,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미 이런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했던 이의 여유가 담긴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