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79화 (178/197)

암흑은 사라지고 (1)

“하아!!!”

콰직! 푸화악!

병사의 이마 정중앙에 꽂혔던 검이 다시 뽑혀 나오자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뿜어진다.

“흡!”

다시, 이마에서 뽑아낸 검을 휘두른다.

부드럽고, 쾌속하며, 어마어마한 힘이 느껴지는 움직임.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표범처럼 재빠르게 움직이며 적의 목숨을 노린다.

카앙- 촤르르르릉! 푸화악!!!

“카학! 끄르르르륵...!”

그 검을 막아보려 했던 상대는 결국 목울대를 베이며 무너져 내렸다.

기량도 기량이었지만, 힘의 차이가 너무나 명백했던 탓이다.

“이런 씨발!”

“개새끼야, 뒤져!!!”

“으아아아아!”

이번엔 서너 명이나 되는 적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전투에 잔뼈가 굵은 베테랑 병사들과 기사까지 포함된 조합.

하지만,

푸화아악-!

덤벼들었던 병사들의 목이 모두 떨어지고, 홀로 남아 있던 기사의 머리통이 수직으로 쪼개지는 데까지 고작 차 한잔 마실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단장님, 적의 좌익이 무너졌습니다!”

“음.”

단숨에 기사와 병사들을 도륙해낸 사내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검푸른 갑주의 기사 하나.

그의 말을 들은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한다.

“그대로, 적의 두 번째 방어선까지 밀고 들어간다.”

“예, 알겠습니다.”

베겐스바흐 대공국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검, 검독수리 기사단이 거칠 것 없는 전진을 시작했다.

***

루테니아, 프롤린_

“대공파의 병력이 1차 방어선을 뚫었습니다!”

“적의 병력은 3천 이상! 적의 선봉은 검독수리 기사단입니다!”

“아직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암흑 기사단의 참전 역시 확인되었습니다!”

국왕 요제프 3세가 머무르고 있는 관계로 왕국의 임시 왕성이 된 프롤린 성(城)에 전선의 소식이 숨 가쁘게 날아들었다.

“흐음...”

그리고,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이 소식을 듣고 있는 한 소년.

펠리노어 왕국의 39대 국왕,

요제프 레나투스 피오 카를 폰 펠린느.

연이어 닥쳐온 끔찍한 일들로 인해 부쩍 거칠어진 분위기를 갖게 된 그 소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예상대로군요.”

놀랍게도, 소년은 이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모든 게 다닐렌츠 백작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군요. 레오덴 요새 전선으로 모여든 대공파 병력을 이용해 시간을 끌고, 대공의 진짜 주력들을 우회시켜 나를 노릴 것이라는 말... 모두 다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어요.”

“예, 맞습니다.”

“다닐렌츠 남작이 이 모든 것을 예상했으니, 그에 대한 대비도 세워놓았... 겠지요?”

간절함과 기대를 가득 담고 있는 국왕의 목소리.

군주로서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 애써 노력하고 있었으나, 그 목소리 끝이 떨리는 것은 숨기지 못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그리고 그런 요제프를 안심시키는 목소리의 주인공.

“그래서, 다닐렌츠 백작이 저를 이곳에 둔 것입니다.”

다닐렌츠 백작의 가신 중 단연 최강의 검이라 불리는 사나이.

기사 겔베르트 로이터(Gelwert Reuter)가 바다처럼 깊고 푸른 두 눈을 들어 소년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이틀 후,

프롤린 도시 외곽 평야 지대, 국왕파의 2차 방어선이 펼쳐져 있는 곳.

“저건가? 국왕파 놈들의 진영이?”

왕국을 상징하는 깃발이 수두룩하게 꽂힌 주둔지를 바라보는 사내.

그가 바로 검독수리 기사단의 수장, 야닉 카이달(Jannick Kaidal)이었다.

“맞습니다, 단장님. 저 방어선만 넘어서면, 곧바로 프롤린의 성벽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좋은 소식이군.”

얼마 전 상급 기사의 경지에 오른 야닉.

‘초인(超人)의 경계선’이라 불리는 상급 기사의 벽을 넘어서자, 지금까지 알던 것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비가 오는 날,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살필 수 있게 되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의 세세한 잎맥, 날아다니는 나비의 날갯짓을 볼 수 있었다.

눈만 좋아진 것이 아니다.

맨주먹으로 바윗돌을 부수고, 힘을 주어 바닥을 박차면 2층짜리 건물의 지붕 위로 단숨에 뛰어오를 수 있었다.

그전에도 검독수리 기사단의 지휘관이자 제일가는 기사로서 살아왔던 야닉 카이달.

하지만 그 기억들이 다 우습게 느껴질 만큼, 상급 기사의 경지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현재 기사단의 전력 상황은 어떻지?”

“예, 단장님. 총원 일백이십칠 명 중 지난 전투로 아홉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아홉 명 모두 평단원이며 현재 전투 투입 가능한 인원은 단장님과 부단장을 포함해 일백십팔 명입니다.”

“으흠, 예비대 1개 조를 제외한 나머지 4개 조를 모두 전투에 투입한다. 오늘 해가 지기 전 2차 방어선을 뚫는다.”

“예, 알겠습니다!”

한편, 자신들의 주둔지로 접근 중인 대공파의 병력을 바라보는 국왕파의 진영에선...

“저 새끼들이, 검독수리 기사단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하얀 산맥 너머에서 꽤 날리는 놈들이라지?”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재밌겠네.”

“예? 뭐가...”

의아해하는 부하 기사의 목소리에, 임시 프롤린 방위군 사령관이 된 겔베르트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재밌겠다고. 쳐 죽이는 재미 말이야.”

***

전투의 시작을 알린 것은, 대공파 측의 일제 사격이었다.

“쏴라!!!”

투투투투투둥! 투둥! 퉁! 퉁! 투둥!

대공파가 쏘아 올린 화살이 푸른 하늘을 시커멓게 물들이며 국왕파의 진영으로 날아들었다.

“전원 방패들어어어어엇!!!”

“하!!!”

국왕파의 반응은 재빨랐다.

미리 준비해두었던 방패를 들어 화살 공격에 대비했던 것.

곧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린 화살들이 국왕파 병사들이 든 방패 위로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터텅! 터터터터터터텅! 터터텅! 터엉! 텅! 텅!

“하, 씹새끼들... 영 쓸데없는 짓들을 하고 있네?”

휭- 카카캉! 카앙!

방패 대신 들고 있던 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화살들을 손쉽게 튕겨낸 겔베르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가 쓸데없는 짓이라 표현한 이유.

대공파의 일제 사격으로 인한 국왕파 측의 피해가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어디 백날 쏴봐라. 이 방패가 뚫리나.”

주변 병사들이 들고 있는 커다란 방패를 슬쩍 바라본 겔베르트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수십 발의 화살이 내리꽂혔음에도 흔들림 없이 단단한 국왕파의 방패.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본 대공파 지휘관들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저 새끼들... 대체 뭐야?”

“방패가 무슨?! 금속으로 만든 건가?”

“아니야, 금속으로 만든 방패였으면 아예 화살이 박히질 않았겠지!”

“그건 그렇네? 근데... 대체 왜 부서지질 않는 거야? 화살이 저렇게 많이 박혔는데!”

기사나 고위급 장교도 아니고, 일개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보급품 방패가 저 정도의 견고함을 지니고 있다니?

대공파 지휘관과 병사의 입장에선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 이해가 안 가는 광경이 국왕파, 정확히는 다닐렌츠 영지군 내에선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그림이었다.

터텅! 터터터터텅! 텅! 터어엉! 텅!

“크크크! 이 더러운 반역자 새끼들아! 아무리 쏴 갈겨봐라, 이 방패가 부서지나!”

“그러니까 말이야. 이게 뭘로 만든 건지도 모르고... 푸흣!”

방패 위로 쏟아지는 대공파의 화살 공격을 비웃는 다닐렌츠 영지군의 병사들.

다닐렌츠 영지군의 군복을 입은 이들에게 무조건 하나씩 지급되는 이 방패는 나움가르트의 장인들이 질 좋은 참나무를 골라 만든 것으로, 방패의 겉에 오크의 가죽을 둘러 만들어졌다.

무구를 만드는 장인들에게 있어 오크의 가죽은 꽤 귀한 자재였지만, 다닐렌츠 영지에선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만큼이나 많은 것이 바로 오크의 가죽이었다.

가죽이 주는 고급스러운 느낌은 명백히 떨어지지만, 그 질김과 내구성 면에선 소나 돼지가죽이 감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크의 가죽.

그런 오크 가죽을 가뜩이나 단단한 참나무 방패에 둘러쳤으니, 그 방패가 지닌 견고함이야 굳이 두 번 세 번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아마도 비슷한 수준의 물건을 돈 주고 사려 한다면 족히 금화 한두 개 정도는 필요할 터.

하지만 다닐렌츠 영지군은 갓 입대한 신병들까지 그런 방패를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 다닐렌츠 영지는 방패의 내구성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바로 윗선에서 새 물건으로 교환을 해주니, 병사들의 입장에선 여벌의 목숨이 생긴 듯 든든할 수밖에.

텅- 터텅! 텅!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끝도 없이 쏟아질 것 같던 화살비가 멈추자, 본격적인 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보병대 전진!!!”

“가자!!!”

“와아아아아아!!!”

뿌우우우우우-!!!

둥! 둥! 둥!

대공파의 중앙으로 배치된 이천여 명의 중장보병이 뿔 나팔과 북소리에 맞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 많은 화살을 쏟아붓고도 별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정면 승부로 끝을 내주지!’

자신들이 질 리가 없다는 단단한 믿음으로 무장한 채 발걸음을 내딛는 중장보병대.

그들은 멀리 하얀 산맥 너머의 베겐스바흐 대공국에서 대공을 따라 이곳까지 종군해온 병력으로, 제국군과의 치열했던 격전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정예 중의 정예였다.

뿐인가, 그 중장보병대의 오른편, 즉 우익(右翼)에 선 이들은 다름 아닌 검독수리 기사단.

대공이 자랑하는 베겐스바흐의 정예군이 총출동하였으니 허약한 국왕파의 떨거지들 따위는 잘 익은 과일을 짓뭉개듯 손쉬운 일이 될 터였다.

“속도를 올려라!!! 우리가 먼저 놈들의 몸에 칼을 꽂을 것이다!!!”

“가자아아아아아!!!”

“돌겨어어어어어어어억!!!”

우익의 선두에 선 수장 야닉 카이달의 외침에 검독수리 기사단의 단원들이 호응하며 군마의 돌진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

앞서 국왕파 측에서 급하게 용병들을 끌어모아 구성한 1차 방어선을 완벽하게 짓밟았던 검독수리 기사단의 돌진 공격.

그들은 이번에도 같은 전술을 펼쳐 승리를 따내기로 마음먹는다.

‘우리가... 아니, 내가 이긴다!’

상급 기사의 경지에 오른 후, 지는 법을 잊은 야닉이었다.

홀로 수십, 아니 수백 명의 국왕파 병사들을 쓰러뜨린 지난 1차 방어선 전투의 승리가 그의 넘치는 자신감에 힘을 더해주었다.

“하아아아아!!! 덤벼라! 내가 바로 검독수리의 수장, 야닉 카이...!”

국왕파의 기세부터 꺾고 들어가겠다는 듯 함성을 내지르던 야닉의 눈에, 적진에서 홀로 말을 달려 나오는 한 사람이 보였다.

단단히 갖춰 입은 갑주와 손에 든 기다란 마상용 장창을 보아하니 국왕파에 적을 둔 기사 임이 분명했다.

두두두두두!!!

상대는 뭐라 입 한번 열지 않은 채로 야닉을 향한 묵묵한 돌진을 감행했다.

“웬 미친놈이냐!!! 이름을 밝혀라!!!”

상대를 향해 마주 말을 달려나가며, 야닉은 꾸짖듯 호통쳤다.

감히 이름조차 밝히지 못할 만큼 볼품없는 기사가 자신을 향해 마주 말을 달려오는 것이 불쾌하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아닛?!”

순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가속한 상대 기사가 들고 있던 마상창을 마치 투창처럼 집어던졌고,

슈우우우우우웅-!!!

“이런 미친?!”

휘잉- 카아아앙!!!

야닉은 자신의 가슴팍을 노리고 순식간에 육박해온 그 마상창을 검을 휘둘러 간신히 튕겨내었다.

순간적으로 몸의 중심을 잃고 말에서 떨어질 뻔했지만, 겨우 말의 고삐를 잡아채 낙마를 면했다.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이겨낸 야닉이 이를 갈며 다시 정면을 바라보는데...

“잘 가라.”

“?!”

휘우우웅- 푸화악!!!

마치 매가 사냥감을 낚아채듯, 순식간에 야닉의 앞으로 달려온 상대가 검을 휘둘러 야닉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