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은 사라지고 (3)
왕국 남부, 남작령 브렌도르프(Brendorf)와 남작령 란츠베르크(Landsberg)의 접경지대_
콰직-!!!
“커흐윽!!!”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친위대이자, 영지 최강의 전력으로 불리는 백검기사단의 수장 헬무트 파펜(Helmuth Papen).
그가, 자신의 가슴팍에 깊이 틀어박힌 검의 모습을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으으...”
헬무트가 버둥거리며 어떻게든 가슴에 뽑힌 검을 뽑으려 했지만, 상대는 그런 그의 팔을 붙잡아 제압했다.
결국,
“컥! 쿠엑!”
주르륵!
헬무트의 입에서 울컥거리며 쏟아져 내리는 핏물들.
피의 색깔은 헬무트의 생(生)이 다 했음을 알려주듯 검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대, 대단... 대단하군... 바덴... 커흑! 하... 하임의 사자...”
“...”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와중에도 자신의 가슴에 검을 박아넣은 상대, ‘바덴하임의 사자(獅子)’ 에리히 프라이슬러의 실력을 칭찬하는 헬무트.
그가 죽어가면서도 감탄을 금치 못할 만큼 에리히의 검은 강했다.
헬무트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 생각했던 주군, 바이펠베르크 백작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를 생각나게 할 정도로.
“그... 그대 같은... 강자에게 죽을 수 있... 어서, 여... 영광... 이다.”
눈이 가물거리는 와중에도 상대에 대한 존경의 발언을 놓치지 않는 헬무트.
그 말을 들은 에리히 역시 점점 빛을 잃어가는 헬무트의 눈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편히 가십시오, 파펜 경. 멋진 승부였습니다.”
상대에 대한 무한한 존경을 담은, 정중하고 진심 어린 목소리였다.
***
바이펠베르크의 주도(主都), 쾨니히슈타인_
“그게... 정말인가?”
“예, 각하! 헬무트 파펜 경을 비롯한 백검기사단의 주요 간부들이 모두 전사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4조장 흐베르흐 경이 몇몇 생존자들을 수습해 퇴각했다는 보고입니다!”
주군, 바이펠베르크 백작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의 물음에 전장의 소식을 가져온 연락 장교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삼키며 겨우겨우 대답했다.
“... 허!”
털썩!
앉아있던 집무실 의자 등받이에 무너지듯 몸을 기대며 여러 가지 감정이 담긴 숨을 토해내는 디트리히.
너무 큰 충격에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헬무트, 헬무트가... 그 친구가...”
죽었다.
‘바덴하임의 사자’라 불리는 사내, 에리히 프라이슬러에 의해서.
“... 어째서, 놈과 검을 겨루게 된 건가? 충돌을 피하고 그저 바덴하임 측의 움직임만 견제하라고 전선으로 투입한 것인데.”
“그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묻는 디트리히에게 연락 장교의 침착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바덴하임 군이 새벽 야음을 틈타 기습을 했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백검기사단을 노리고 치고 들어왔다는데... 자세한 전투 상황은 이 보고서에 적혀 있습니다.”
연락 장교가 건넨 보고서를 빠르게 훑은 디트리히가 탄식을 토해낸다.
“... 처음부터 헬무트를 노린 거군.”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꾸깃-
손에 쥔 보고서를 사정없이 구긴 디트리히가 으르렁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나를 전장으로 불러내려는 수작이야. 바덴하임의 사자... 자신감이 대단하군.”
“각하! 안 됩니다!”
주군이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짐작한 연락 장교가 기겁하며 소리쳤지만...
“아끼던 수하의 피로 쓴 도전장을 받았으니, 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겠지. 사내로서, 기사로서, 그리고 헬무트의 주군으로서 말이야.”
“하, 하지만 각하! 좀 더 가신들과 상의를 해보심이...!”
“아니, 이미 나는 결정을 내렸다.”
드르륵-
의자를 뒤로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난 디트리히가 선언한다.
“제장들을 소집해라! 내가 직접 브렌도르프 전선(戰線)으로 향할 것이다!”
마침내, 사자의 도전장을 받은 왕국제일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왕국 북서부 트란베르크(Tranberg), 북부 레오덴(Leoden) 요새_
“성문이 뚫렸다!!!”
“돌입해라! 보병대, 돌겨어어억!!!”
“와아아아아아!!!”
마침내 무너진 레오덴 요새의 성문.
피를 토하듯 소리치는 지휘관의 명령을 받은 국왕파의 병사들이 무너진 요새의 성문을 향해 밀물처럼 무섭게 달려들었다.
커다란 군마 위에 올라타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자기사단장, 빌헬름 리벤트로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마침내 요새를 떨어뜨렸군요.”
“예, 해냈습니다.”
나는 빌헬름의 말에 가볍게 대답하며 천천히 성벽 위로 올라가는 펠린느 왕실의 문장기(紋章旗)를 바라보았다.
본래 그 자리에 있던 베겐스바흐 대공국의 깃발은 사정없이 찢긴 채로 요새 성벽 아래에 처박혀 있었다.
그 모습이 무언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아 유독 눈에 들어왔다.
“대강 반나절 정도 걸렸군요, 요새를 떨어뜨리는데.”
“그렇습니다.”
“요새 안에 대공 휘하의 주력 병력이 얼마나 남아있었는지,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예, 각하.”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완전히 점령이 완료된 레오덴 요새 내부의 사령관 회의실에서 사로잡은 적 포로들로부터 얻어낸 정보를 보고 받았다.
“요새 내에 주둔 중이었던 베겐스바흐 대공의 직속 병력은 중장보병대 약 3개 중대와 검독수리 기사단 2개 조, 그 외에 대공파 소속 기사단이 둘이었습니다.”
“흐음, 결국 대공파의 주력 중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암흑기사단은 다 끌고 북상했다는 얘긴데...”
턱을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내뱉는 네게 빌헬름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진다.
“백작 각하의 말씀을 믿고 우선 눈앞의 요새를 떨어뜨리는데 집중하긴 했으나... 정말 프롤린에 남겨둔 병력으로 대공의 주력 병력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가봐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빌헬름의 걱정은 일견 타당한 것이었다.
암흑기사단이 어떤 이들인가.
빌헬름 자신이 이끄는 펠리노어 국왕 친위대인 사자기사단과 함께 왕국의 3대 기사단이라 불리는 최정예 무력집단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근 몇 년간의 행보만 놓고 본다면 사자기사단보다 월등한 전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 이들.
국왕파의 최대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나와 사자기사단 전원이 이곳 레오덴 요새에 발이 묶여 있던 상황에서 프롤린에 있는 병력만으로 암흑 기사단을 상대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그였다.
하지만...
“암흑기사단, 잡을 수 있습니다.”
“...!”
“분명 쉽지 않겠지요. 하지만, 저는 믿고 있습니다.”
“어떤...?”
여전히 불안함이 가시지 않는 빌헬름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빙긋 미소지었다.
“저와 함께 다닐렌츠의 기적을 일구어낸 영웅들의 저력을 믿어보시죠.”
***
루테니아의 주도(主都) 프롤린 외곽_
콰아앙-!!!
“크흐읍!”
들고 있던 검 위로 가해진 강렬한 충격에 겔베르트의 몸이 휘청인다.
상급 기사의 경지에 도달한 후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힘과 균형 감각을 지닌 그로서도 버텨낼 수 없는 무지막지한 공격.
그런 공격을 한 번도 아니고 수십 번이나 받아낸 탓에 현재 겔베르트의 온몸의 관절과 근육은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어딜 보고 있나,”
“?!”
순식간에 겔베르트의 등 뒤를 점한 상대의 묵빛 도끼창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듯 날아왔다.
휘우우우웅- 카앙!!!
다행히 있는 힘껏 몸의 방향을 뒤틀며 검을 휘둘러 그 공격을 받아낸 겔베르트.
콰당탕!
“어흐윽!”
하지만 도끼창에 실린 힘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했기에, 겔베르트는 바닥에 엎어지며 몇 번이나 몸을 굴려야 했다.
“하아, 진짜 뒈질 뻔했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방금은 정말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시퍼런 도끼날이 겔베르트의 얼굴과 손가락 한두 마디 차이로 빗겨나갔으니 말이다.
하마터면 머리통이 그대로 쪼개질 뻔했던 순간.
하지만, 그토록 살 떨리는 격전의 와중에도 겔베르트는 특유의 여유를 잃지 않았다.
“이런 씨... 야! 넌 뭘 처먹었길래 이렇게 힘이 세냐? 끄응!”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상대와 거리를 벌린 겔베르트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눈앞에 선 검은 갑주의 거한, 리하르트 그라나흐(Richard Granach)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상대는 ‘강철 장미(Stahl Rose, 슈탈 로제)’란 이명으로 불리는 묵빛의 도끼창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제법이군, 다닐렌츠의 기사. 이번엔 분명 그 머리통이 피를 뿜는 걸 보리라 생각했건만... 기대 이상의 실력이다.”
“지랄하네, 네가 뭔데 내 실력에 기대를 하고 말고 하는 거냐? 나이도 한참 어린 새끼가 건방지게... 아, 더럽게 힘드네.”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퉷, 힘을 뱉는 겔베르트.
‘... 이런.’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침에 붉은 핏물이 섞여 있는 것을 확인한 겔베르트가 남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뭐... 영주님이랑 싸우는 것 같네.’
리하르트를 상대하며 겔베르트는 그의 젊은 주군, 다닐렌츠 백작 데미언 카릴베르크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이와 생김새, 싸우는 방식까지 모든 면에서 비슷한 점이 없는 데미언과 리하르트였지만, 한 가지 만큼은 똑같았다.
바로, 겔베르트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것.
‘... 아예 비집고 들어갈 틈이 안 보이네, 젠장.’
이건 마치 눈앞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다란 바윗돌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는 느낌이랄까?
‘암흑기사단 이름만 들어도 제국 이교도 놈들이 꽁지를 뺀다더니, 과연 그럴만하네.’
겔베르트가 시도하는 모든 공격이 허무하리만큼 쉽게 가로막히고 있었다.
상대인 리하르트는 마치 겔베르트가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정신없이 찌르고 베어오는 검을 그 커다란 도끼창을 휘둘러 여유롭게 막아냈다.
아득하리만큼 멀게 느껴지는 상대와의 실력 차.
두 사람 사이에 흩뿌려진 붉은 피가 모두 한 사람, 즉 겔베르트에게서만 흘러나왔다는 사실이 잔혹하리만큼 명백한 실력의 차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한편, 리하르트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다닐렌츠 기사의 분투에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진작 목을 떨어뜨렸어야 맞는 것인데.’
겔베르트가 느끼고 있는 것처럼, 리하르트 역시 자신의 실력이 상대를 압도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상대는 기이하리만큼 끈덕진 움직임으로 치명상을 피해내고 있었다.
마치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와의 싸움에 이골이 난듯한 모습.
문득, 리하르트의 머릿속에 왕도에서 몇 번 마주했던 다닐렌츠 백작의 모습이 떠오른다.
“... 그랬군.”
“응? 그러긴 뭐가 그래 이 새끼야? 아으, 쓰라려.”
리하르트의 공격을 피하려 바닥을 구르다 돌에 찍힌 가슴의 상처를 쓰다듬으며 겔베르트가 물었다.
“네 놈의 주군, 다닐렌츠 백작이 가르쳐 준건가? 자신보다 훨씬 강한 상대에게서 살아남는 법 말이다.”
“뭐?”
“나이도 한참 어린놈에게 개처럼 얻어터지며 갈고닦은 실력이 제법 쓸만하군.”
“...”
“하긴, 칼 맞고 뒈지는 것보다야 개새끼 흉내를 내는 것이 낫겠지. 크큭!”
음산한 목소리로 겔베르트에게 도발적인 말을 건네는 리하르트.
하지만, 겔베르트의 반응은 그가 기대하는 것과는 영 딴판이었다.
“아, 용케 눈치챘네?”
“...?!”
“우리 영주님, 진짜 지독하긴 하지? 이래 봬도 내가 예전 용병대 시절엔 자기 먹여주고 재워주던 대장이었는데 말이야, 그런 사람을 매일 같이 개처럼 굴리고... 어휴!”
“...”
“그래도, 덕분에 지금 내가 안 죽고 살아있잖아?”
툭툭, 뺨에 묻은 흙먼지를 손으로 털어내며 겔베르트가 말한다.
“그러니까 계속해봐, 이 덩치 큰 곰 새끼야. 난 이 짓거리, 하루 종일도 할 수 있거든. 왜, 자신 없냐?”
“... 감히!”
“빨리하는 게 좋을 거야. 왜냐면...”
천천히 도끼창을 치켜드는 리하르트를 향해 겔베르트 뭐라 말을 하려던 그때,
뿌우우우우우우-!!!
전장을 떨쳐 울리는 뿔나팔 소리와 함께, 대공파 진영의 뒤쪽에서 무수히 많은 깃발이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