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83화 (182/197)

암흑은 사라지고 (5)

“이,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뭐라고 말 좀 해봐라! 누구든 설명을 해보란 말이다!!!”

대공파 진영의 중심부에 자리한 화려한 외관의 지휘 막사 앞에 대공파의 수뇌부들이 모여 있었다.

그 한가운데, 대공파 세력의 핵심 인물이자, 그 자체로 대공파의 존재 이유가 되는 인물, 베겐스바흐 대공 루트비히 베르너 이그나티우스가 서 있다.

한데 그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 어떤 순간에도 특유의 오만하고 자신만만한 눈빛을 잃지 않던 그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얼굴을 한 채 주변의 수하들에게 핏대를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 대공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전하! 귀한 몸에 무리가 갈까 염려되옵니다, 일단 진정하시...”

퍽!

“으헉!”

곁에서 루트비히를 달래던 귀족 하나가 얼굴을 감싸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들끓는 분노를 참지 못한 루트비히가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친 탓이었다.

“지인-정? 지금 진정이라고 말했나? 이 상황을 보고도 그런 말을 입에 담아?”

촤아앙-!

분노가 더 큰 분노를 부른 것일까?

가신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은 것도 모자라 아예 검을 뽑은 루트비히였다.

“저, 전하!!!”

“진정하십시오! 전하아아!!!”

“분노를 가라앉히십시오!”

루트비히의 손에 들린 값비싼 보검이 사방으로 예기(銳氣)를 흩뿌리자 겁에 질린 가신들이 뒷걸음질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한번 화가 나면 끝없이 폭주하는 주군의 괴악한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같은 루트비히의 폭주를 진정시킬 유일한 방법은 그를 분노하게 만든 원인을 제거하는 것.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루트비히를 분노하게 만든 원인은 대공파의 가신들로선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어째서, 어째서...!”

일렁이는 분노의 감정 아래, 더욱 크게 출렁이는 경악의 눈빛으로 루트비히가 소리쳤다.

“... 암흑 기사단이 저놈들에게 밀리고 있는 것이냐? 대체, 왜!!!”

***

카아앙-!!!

“흐으윽!”

단번에 몸통을 꿰뚫어 버릴 기세로 뻗어진 강철 장창을 가까스로 받아낸 암흑기사단의 기사가 이를 악문다.

‘미, 미친! 무슨 힘이...!’

단 한 번의 격돌이었을 뿐인데, 팔이 저릿하고 어깨가 쑤셨다.

지금껏 온갖 곳에서 갖은 적들과 격전을 펼쳐온 암흑기사단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 그들 앞에 등장한 적은 달랐다.

무엇이 다르냐고?

휘잉- 푸우욱! 촤악!!!

“커흑!”

번개같이 날아든 강철 장창에 가슴을 찔린 암흑기사단의 기사가 말 위에 몸을 뒤집으며 추락한다.

그는 얼마 전 죽은 암흑기사단 3조장, 발데마르 가우더(Waldemar Gauder)의 뒤를 이어 새로운 조장으로 선발될 것이 확실시되던 실력자.

한데 그런 이가 오늘 처음으로 세상에 등장한 신생기사단의 기사가 휘두른 창에 찔려 말 아래로 추락했다.

머리부터 떨어진 후 조금의 미동도 없었으니, 그 결과야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사방에서 정신없이 뻗어지는 공격을 받아내던 암흑기사단의 기사가 원통하다는 듯 마음속으로 외쳤다.

자신들은 무적이었다.

베겐스바흐 대공국을 대표하는 최강의 검(劍).

그 누구도 자신들을 막을 수 없었고, 그 누구도 자신들의 검 앞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지금껏 그랬고, 앞으로도 그래야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개 같은 상황이냔 말이다!”

치밀어 오르는 위기감에 입 밖으로 나와버린 마음의 소리.

왜일까.

그 목소리를 들은 강철 투구 너머의 얼굴이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것은.

심지어,

“암흑기사단의 역사는 오늘로 끝이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뜨겁게 달군 나움가르트 산 강철을 수백, 수천 번 두드려 만들어진, 잿빛의 안면 가리개(Visor) 너머에서 들려온 상대의 목소리.

마치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선언하는 듯한 그 말에, 암흑기사단의 기사는 잔뜩 독이 오른 음성으로 소리쳤다.

“무슨 개소릴...!”

두두두두두두! 콰직!!!

“커허어억!!!”

그 순간, 그의 목을 꿰뚫고 잿빛의 강철 창날이 튀어나왔다.

뒤쪽에서 말을 타고 달려든 다른 늑대기사단이 습격을 한 것이다.

“끄르륵...! 비, 비열한...!”

예상 못 한 공격에 속절없이 당해버린 그가 원통한 눈빛을 한 채 말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그 모습을 보며, 강철 안면 가리개 속의 사내가 말했다.

“병신, 싸움에 비열한 게 어딨냐?”

***

암흑의 전설이 무너진다.

지난 십여 년간 왕국의 동부 전선에서 제국 이교도들의 더운 피로 쌓아 올린 암흑기사단의 명성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오늘 처음으로 세상에 등장한, 신생(新生) 기사단에 의해서.

“암흑기사단 전원 집결하라! 한데 뭉쳐서 전열을 유지해!!!”

“빌어먹을! 이 새끼들 대체 뭐야?!”

“뒤로 빠져! 전열을 정비해!!!”

예상 밖으로 흘러가는 전투 상황에 크게 당황한 암흑기사단이 엉망으로 흐트러진 진형을 정비하려 애썼다.

늑대기사단이라고 했던가?

다닐렌츠가 지금껏 꼭꼭 숨겨두었던 비장의 한 수.

그래 봤자 별거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그들은 암흑기사단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전투에 임하는 주요 전략, 기사단원들의 소소한 전투 습관, 기사단의 전투를 지휘할 때 사용하는 지휘 체계까지.

마치 잘 훈련된 사냥꾼을 보는 듯한 움직임.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에 의한 소름.

암흑기사단의 구성원들이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감정.

머릿속 깊은 곳에 묵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잠들어 있던 그 감정의 이름은 명백한 ‘공포(恐怖)’였다.

‘이 자들, 마치 우리를 잡기 위해 키워진 놈들 같지 않은가...!?’

말도 안 되는 상상 같지만, 현재의 돌아가는 판을 보고 있자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토록 일방적인 싸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으아악!!!”

눈앞에서 또 한 명의 암흑기사단원이 사냥당한다.

전후좌우에서 뻗어진 적들의 장창 세례에 등과 옆구리, 가슴이 꿰뚫려서.

특유의 절륜한 방어력으로 암흑기사단원들을 목숨을 여러 번 지켜주었던 묵빛의 플레이트 아머도 저 잿빛의 창날 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었다.

늑대기사단의 제식 무기인 잿빛 장창은 대체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 질 좋은 강철을 두드려 만든 암흑기사단의 묵갑을 마치 종이처럼 찢고 베어냈다.

때문에 갑옷의 남다른 방호력을 믿고 어지간한 공격은 대충 몸으로 받아내며 싸우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던 암흑기사단은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단장님은?! 단장님은 어디 계시냐!”

“크흑! 저기, 언덕 너머에 계십니까! 아까부터 적의 지휘관 급 기사를 상대하고 계신 데, 쉽게 결착이 나지 않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돌아온 수하의 대답에 암흑기사단의 간부 사내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소리쳤다.

“다닐렌츠 백작도 아니고, 사자기사단장도 여기 없는데 대체 어떤 놈이 단장님의 도끼창을 받아낸단 말이냐? 대체 누가!”

***

“나는, 다닐렌츠의... 기사, 겔베르트 로이터다아아!!!”

콰앙!!!

“쿠엑!”

무릎이 꺾인 겔베르트가 피를 토하며 흙바닥을 나뒹굴었다.

직전 큰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기세를 올리던 것이 민망할 정도의 참담한 모습이었다.

자신에게 날아든 상대의 공격을 가까스로 받아냈으나, 검을 타고 밀려드는 충격까지는 버텨낼 수 없었던 탓이다.

“크으으...”

하지만 겔베르트는 이미 다 죽어가는 시체와 같은 몰골을 한 채 비척비척 일어나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아직... 아직 안 끝났다, 이 새끼야!”

그의 팔다리엔 베이고 찔린 상처가 가득했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사방이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에 담긴 투지의 불꽃은 여전히 뜨거웠다.

마치 죽음만이 자신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듯, 강렬한 전의(戰意)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반면 겔베르트를 그 지경까지 몰아넣은 상대, 암흑기사단장 리하르트 그라나흐는 한없이 길어지는 대결에 조금 지친 기색만 있을 뿐 몸에 치명적이라 불릴 정도의 큰 상처를 입지 않은 상태였다.

명확하게 대비되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압도적인 실력의 차이가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미친, 새끼가...”

비척비척 검을 쥐고 일어서는 겔베르트를 질린 얼굴로 바라보는 리하르트.

그의 상식으로, 겔베르트는 이미 한참 전에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겔베르트는 피를 토하고, 갖은 비명을 내지르며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다시 검을 들었다.

“끄후우... 이번 거, 앞에 것보다 덜 아픈데? 힘이 빠진 거냐?”

“이런 개새끼가...”

“크흑, 진짜 실망인데? 대(大) 암흑기사단을 이끄는 대장 나으리의 검이 이렇게 약해서야... 쿨럭!”

“그 아가리를 찢어주마!”

“흐, 몇 번 맞아보니까 이제 알겠네. 네놈들이 싸워서 이겼다고 자랑했던 제국 이교도 놈들, 알고보니 그 새끼들 순 약골이었다는 걸 말이야.”

엉망이 된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절대 멈추지 않는 겔베르트의 도발.

저 혓바닥에서 쏟아지는 말 때문에 리하르트는 시간이 갈수록 평상시의 냉정한 태도를 잃어가고 있었다.

“개 같은 새끼,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숨통을 끊어주마!”

“크으... 글쎄, 그게 되려나 모르겠네? 그 실력으로 말이야. 흐흐흐!”

입가에서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웃음을 보이는 겔베르트.

리하르트의 눈에 일렁이는 분노만큼이나 겔베르트의 눈에 서린 광기(狂氣)도 만만치 않았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그 어느 때보다 높고 힘차게 자신의 도끼창을 치켜든 리하르트.

“이제 그만 뒈져라!”

그가 이 길고 길었던 싸움을 끝나기 위한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던 그때,

“대장, 괜찮으십니까!”

“...!?”

리하르트의 뒤편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키는 그리 크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깎아놓은 듯 단단한 근육질의 몸을 지닌 한 사내가 검을 든 채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과거 그는 어깨까지 내려오도록 길게 땋아 내린 머리를 지녔었으나, 이제는 둥근 두상이 그대로 느껴질 만큼 짧게 자른 머리가 되었다.

과거 겔베르트와 호흡 맞추며 푸른 방패 용병대의 부대장으로서 빛나는 활약을 보여주었던 동물적 감각의 전사.

“이거나 먹어랏!”

다닐렌츠의 기사 ‘메이슨 아르히펠트(Mason Archfeld)’가 자신을 바라보는 리하르트를 향해 두 자루의 손도끼를 연달아 집어던졌다.

휭! 휘잉!

“이런 하찮은 잔재주 따위!”

카앙- 캉!

생각지 못한 기습이었으나, 리하르트는 당황하지 않고 도끼창을 휘둘러 자신에게 날아드는 손도끼 두 자루를 모두 튕겨내었다.

이어 겔베르트를 바라보던 몸의 방향을 완전히 돌려 자신에게 육박해오는 메이슨에게 공격을 가했다.

슈아아앙-!!!

단번에 자신의 머리통을 쪼갤 기세로 떨어지는 리하르트의 도끼창을 본 메이슨.

“흐읏!”

그는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려 바닥을 구르는 것으로 그 공격을 피해냈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그 공격을 피해 없이 막아낼 수 없으리란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콰아아앙!!!

곧, 메이슨이 있던 자리에 내리꽂힌 리하르트의 도끼창이 살벌한 소리를 내며 흙먼지를 피워올렸다.

도끼날의 절반 정도가 바닥에 틀어박힐 만큼 어마어마한 힘이 담긴 일격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렇게 느려서 저놈을 잡겠냐?”

“?!”

심한 부상을 입어 더는 전투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던 겔베르트.

그는 메이슨을 상대하느라 잠시 시선을 돌린 리하르트의 사각(死角)으로 순식간에 접근하여,

푸우욱!!!

“큭!”

그의 등에 자신의 검을 찔러 넣었다.

상대가 방심하는 순간만을 노려 끈덕지게 기다렸던, 겔베르트의 필살 전략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