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84화 (183/197)

암흑은 사라지고 (6)

지금 이 순간만을 노리며 참고, 또 참았던 겔베르트였다.

암흑기사단의 단장 리하르트 그라나흐는 객관적인 전력에서 그가 넘어설 수 없는 강적(强敵).

겔베르트 역시 상급 기사의 경지에 올라있는 인물이나 리하르트의 기량은 명백히 그보다 몇 수 위에 있었다.

이른바, 초절정(超絶頂)에 달한 기사랄까.

하지만...

‘내가 사자기사단과 함께 움직여 트란베르크로 나아가면, 대공은 분명 자신의 주요 병력을 우회시켜 프롤린의 국왕 폐하를 노릴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공의 주요 병력이란 암흑기사단과 검독수리 기사단, 베겐스바흐 중장보병대가 되겠죠.’

‘검독수리 기사단과 중장보병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들 정도는 우리 다닐렌츠 영지군 전력에 로이터 경이 가세한 것만으로도 넉넉히 처리할 수 있을 터이니.’

‘허나, 암흑기사단은 다릅니다.’

‘키르헨에서 출발한 증원군이 전장에 당도하기 전까지는 암흑기사단과의 정면 승부를 피하십시오.’

‘암흑기사단의 단장인 리하르트 그라나흐는 냉정히 말해 로이터 경보다 몇 수는 위에 있는 기사입니다.’

‘절대, 그를 상대로 이기는 싸움을 하려들지 마십시오.’

‘버티고, 또 버티십시오.’

‘치명상을 피하고, 버텨내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분명 기회가 올 겁니다,’

겔베르트를 이곳으로 보낸 주군, 다닐렌츠 백작 데미언 카릴베르크의 충고.

그는 리하르트와의 싸움에서 이기려 들지 말고 무조건 버티라는 말을 전했다.

그러다 보면, 분명히 반전의 기회가 올 거라는 말도 함께였다.

‘... 영주님의 말이 맞았다!’

뒤쪽에서 공격해온 메이슨에게 정신이 팔려 훤히 등을 드러낸 리하르트.

그는 겔베르트가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상태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비틀거리는 겔베르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전투 불능의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 기만 전술이다, 이 새끼야!’

분명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지만, 리하르트를 속이려 일부러 더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겔베르트.

실제로 팔다리가 덜덜 떨리고, 시야가 어지러웠지만 지금 이 순간 겔베르트는 그 모든 것을 다 잊었다.

“하아아아아아!!!”

언제 팔다리가 떨렸냐는 듯, 힘차게 땅을 박차고 나아간 겔베르트의 검이,

푸우욱!!!

우람하기 그지없는 리하르트의 등판 깊숙이 틀어박혔다.

***

“커흐윽!!!”

리하르트는 시뻘겋게 달군 쇳덩이가 살가죽을 헤집고 몸 깊숙이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눈이 뒤집히는 듯한 극렬한 통증!

“크아아아악!!!”

비명인지 함성인지 모를 괴성을 토해내며 몸을 뒤집은 리하르트가 자신의 독문무기, 도끼창 ‘슈탈 로제(Stahl Rose)’를 휘둘렀다.

자신의 등에 검을 꽂아 넣은, 그 누군가를 두 조각 내기 위해서.

하지만,

휘이이이이이잉!!!

없다.

슈탈 로제의 도끼날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공허함에 리하르트가 당혹감을 느끼던 그 순간,

“후아! 진짜 뒤질 뻔했네, 으흐흐흐!”

지금껏 리하르트의 속을 열심히 뒤집던 ‘그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 너!”

“흐흐, 왜? 다 죽어가는 시체인 줄 알았냐?”

분노로 벌겋게 달아오른 리하르트의 얼굴을 마주한 피투성이의 겔베르트가 웃는다.

리하르트의 등에 검을 꽂아 넣은 탓에 그는 지금 아무것도 들지 않은 빈손.

그 자체로 너무나 위험한 상황임에도 여한 없는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마치,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죽여버리겠다!!!”

겔베르트를 향해 맹수처럼 달려드는 리하르트.

그러나, 그의 적은 이제 겔베르트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휘잉- 휘잉-

카아앙!!!

“크읏!”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한 자루의 손도끼를 급하게 걷어내는 리하르트.

분노에 찬 그의 시선에 무서운 속도로 접근하는 검은 피부의 근육질 사내가 보였다.

“대장한테 가려거든 나부터 쓰러뜨리고 가라! 흐아앗!”

“이름도 없는 잡병 새끼가!”

카캉! 카아앙!!!

메이슨의 검을 도끼창을 휘둘러 막아내는 리하르트.

메이슨이 아직 상급 기사에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공격 정도는 리하르트가 코웃음을 치며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야 했는데...

“끄흐읍...!”

어찌어찌 메이슨의 검을 막아내고는 있으나, 눈에 띄게 힘들어하는 리하르트.

아무리 그가 초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기사라고는 하지만 등 한복판에 검을 꽂은 상태에서 평소와 똑같은 기량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한편, 메이슨이 리하르트를 붙잡고 있는 사이 주변에 떨어진 주인 잃은 검 한 자루를 주워든 겔베르트가 전투에 합류해 힘을 보태기 시작한다.

“하! 등에 칼을 꽂고도 잘 싸우는구나? 암흑기사단 대가리의 이름값을 하는 것이냐?”

“이노옴!!!”

겔베르트에 도발에 분노한 리하르트가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하려는 듯 더욱 거세게 도끼창을 휘둘렀다.

투콰캉!!!

“크흡!”

그 압도적인 힘에 직격당한 겔베르트가 들고 있던 검과 함께 부웅- 하고 뒤쪽으로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실로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하지만, 탁월한 방어 초식을 펼쳐 이번에도 치명상을 피해낸 겔베르트가 핏물 섞인 침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친 곰탱이 같으니... 등은 괜찮냐? 응? 그렇게 무리할 때가 아닐텐데?”

“끄으...”

겔베르트의 조롱 섞인 말처럼, 리하르트는 방금의 무리한 동작으로 인해 등 쪽의 상처가 더욱 벌어졌는지 도끼창을 바닥에 박아넣은 채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깊이 박힌 것인지, 그 와중에도 겔베르트의 검은 여전히 등에 꽂혀 있는 모습이다.

휘잉- 휘이잉-

잊을 만하면 날아드는 메이슨의 손도끼.

하지만, 이번엔 리하르트의 반응이 조금 늦었다.

태에엥- 콰직!

“큭!”

앞서와 같이 도끼창을 휘둘러 날아오는 손도끼를 쳐내려 했지만, 반응이 조금 늦었던 탓에 제대로 타점이 맞지 않았다.

하여, 바닥에 떨어지는 대신 방향만 살짝 뒤틀리며 날아든 손도끼가 리하르트의 허벅지에 꽂혔다.

휘청이는 리하르트의 신형.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겔베르트와 메이슨, 전직(前職) 푸른 방패 용병대의 두 지휘관이 각자의 검을 흔들며 돌진한다.

“죽어라, 루트비히의 개새끼야!”

“흐아아앗!!!”

목숨이 위협받는 명백한 위기 상황.

“크흡, 크아아아!”

푸화악!

자신의 허벅지에 꽂힌 손도끼를 뽑아 던져낸 리하르트가 처절한 목소리로 포효한다.

“내가 바로 베겐스바흐의 리하르트! 암흑기사단의 수장이다아아!!!”

카카캉!!!

***

“어떻게... 이 내가, 이 루트비히가!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어!!!”

다닐렌츠가 꼭꼭 숨겨두었던 비장의 한 수, 늑대기사단의 날카로움을 버텨내지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지는 암흑기사단을 보며 루트비히가 울부짖는다.

자신의 영지, 베겐스바흐 대공국이 지난 십수 년간 천금을 쏟아부어 키워낸 최강의 검, 최강의 기사단이 저리도 쉽게 쓰러지다니?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광경에 루트비히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분노와 절망감을 느꼈다.

“대체 저놈들이 들고 있는 창은 뭐냐? 암흑기사단의 묵갑이 저렇게 형편없이 꿰뚫리다니, 그럴 수가 없다! 그럴 수가 없어!”

묵갑은 암흑기사단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으로, 어지간한 창검으로는 뚫거나 베어낼 수 없는 암흑기사단의 제식 갑옷을 칭하는 단어였다.

대륙 최고라 불리는 타마르쿠스 강철(Tamarcus Steel)로 만들어 그 단단함이 감히 다른 강철제 갑옷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던 것.

하지만 다닐렌츠 기사들이 들고 있는 장창의 날카로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어서, 그런 묵갑을 싸구려 가죽 갑옷 찢어내듯 했다.

대체, 무엇으로 만든 것이기에?

억울하고 원통해 두 눈에 핏발이 선 루트비히의 양옆으로 우르르 몰려온 가신들이 다급하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전하! 피하셔야 합니다! 전열이 무너졌습니다! 지금 퇴각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맞습니다, 전하! 더 늦었다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지금 가셔야 합니다! 어서 말 위에 오르소서!!!”

“다닐렌츠 백작! 이노오오오오옴!!!”

이 자리에 없는,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설계한 다닐렌츠 백작을 부르며 분노하는 루트비히.

몇 년 전까지 왕국의 변방에서나 조금 알려졌을 뿐 중앙 정계엔 발끝 하나 담그지 못했던 녀석이 자신의 오랜 대계(大計)를 망쳐버렸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그였다.

“무엇하느냐! 어서 전하를 모셔라! 어서!!!”

“전하께서 빠져나가신다! 퇴로를 확보해라!!!”

호위병들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군마 위에 오른 루트비히가 붉은색 망토를 휘날리며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목격한 다닐렌츠 증원군의 최고 지휘관 에르발트 베링은 전장 구석구석까지 들릴만한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저길 보아라! 루트비히가 도망친다! 개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꼴이 우습구나!!!”

“와아아아아아아아!!!”

에르발트의 목소리를 들은 국왕파 병력과 다닐렌츠 증원군 모두가 함성을 내지른다.

그것은 승리를 직감한 이들의 자신감이 담긴 외침이었고, 상대인 대공파 병사의 입장에선 무기를 든 손에서 힘을 빠지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콰직!!!

“크허억!!!”

한 마리 짐승처럼, 날렵하게 상대의 사각을 파고든 메이슨의 검이 리하르트의 옆구리에 틀어박힌다.

도끼창을 휘둘러 공격하기엔 너무나 가까운 거리.

이를 악문 리하르트가 주먹을 휘둘러 메이슨을 후려치려 했지만,

휘잉- 푸화악!!!

“크아아악!!!”

기다렸다는 듯 접근해 휘둘러진 겔베르트의 검에 의해 메이슨에게 뻗어지던 리하르트의 왼팔이 팔꿈치 아래로 뎅겅 잘려나갔다.

“이 대 일은 힘들지? 이 곰탱이 새끼야!”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은 겔베르트가 그대로 검의 손잡이 부분을 휘둘러 일그러진 리하르트의 얼굴을 내리찍었다.

콰직!

“컥!”

핏물이 튀고, 코가 완전히 뭉그러진 리하르트가 무릎을 꺾으며 주저앉는다.

그 순간, 리하르트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던 검을 뽑아낸 메이슨.

깨진 코를 잡으며 뒤로 쓰러지는 리하르트의 가슴에 다시 그 검을 쑤셔 넣는다.

푸우욱!

“컥! 캬르륵...”

폐를 관통당한 것일까?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피거품만 뱉어내는 리하르트.

그 와중에도 오른손에 쥔 도끼창을 휘둘러 창대로 메이슨의 머리를 가격하려 들었으나,

“이제 그만 발악하고, 지옥이나 가라! 흐아아아아!!!”

슈우욱- 푸화아악!!!

낙뢰처럼 떨어진 겔베르트의 검이, 수직으로 리하르트의 목에 내리꽂혔다.

그동안 베겐스바흐 대공의 명령 아래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던 악인(惡人)에게 어울리는 비참한 최후였다.

***

“후우우...”

적의 피로 흠뻑 젖은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아이린이 전장을 살핀다.

지난 십수 년간 제국을 상대로 대등한 싸움을 이어왔던 강군(强軍), 베겐스바흐 대공국 중장보병대의 시신이 사방에 그득했다.

뿐인가, 이 시대 전장의 지배자라 할 수 있는 기사단의 시신 역시 눈 닿는 곳마다 놓여 있다.

“저건 검독수리 기사단이고...”

암흑기사단과 함께 베겐스바흐를 대표하던 무력 집단, 검독수리 기사단은 다닐렌츠 기병대의 전투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녹아버렸다.

“... 암흑기사단, 별거 없군.”

만신창이가 된 묵갑을 입은 채로 널브러진 암흑기사단의 모습을 본 아이린이 뿌듯한 미소를 짓는다.

오랜 시간 동안 ‘동부 전선의 악마’로 불리며 명성을 떨쳤던 암흑기사단.

허나 그 명성은 다닐렌츠가 키워낸 비장의 한 수, 늑대기사단의 압도적인 활약 속에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아이린은 이 승리의 순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지난 몇 년간 각고의 노력을 들여 늑대기사단을 키워낸 한 사람을 떠올렸다.

다닐렌츠 백작, 데미언 카릴베르크.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대단한 업적을 세운 그 금발의 미남자를 떠올리며 아이린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대단해. 하긴, 누구 남편인데!”

혹시 누가 들었을까 부끄러웠는지, 빠르게 좌우를 살피던 그녀가 천천히 말머리를 돌려 야트막한 언덕 위로 나아간다.

이번 전투에서 상급 기사로서의 위용을 뽐내며 수많은 적의 기사를 쓰러뜨린 그녀, 다닐렌츠의 기사 아이린 그뢰네마이어.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 끝, 멀리 비참한 모습으로 패주(敗走) 중인 대공파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후우...”

많은 의미를 담은 한숨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짧지만 강렬했던, 이 전쟁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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