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끝 (1)
“아직도 따라붙고 있습니다!”
“지독한 놈들...!”
멀리서 흙먼지를 피워올리며 추격 중인 국왕파 병력의 모습에 루트비히는 이를 갈았다.
장장 이틀째 계속되는 추격.
하루 넘게 따라왔으면 포기할 만도 한데, 저놈들은 여전히 눈에 보이는 거리에 있었다.
털썩-!
뒤쪽에서 따라오던 루트비히의 가신 하나가 정신을 잃고 말에서 떨어진다.
이틀 내내 제대로 된 식사도, 휴식도 없이 계속해서 말을 달리다 보니 완전히 탈진한 탓이다.
“괘, 괜찮으시오?”
“사람이 떨어졌다! 사람이 떨어졌어!”
“잠시만 기다리시오! 피룬하임 남작이 낙마했소!”
함께 사선을 넘나들며 싸운 동료에게 일어난 사고에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달리던 속도를 늦추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뒤쪽에서 일어난 소란을 눈치챈 루트비히가 고개를 돌리며 큰 소리로 윽박질렀다.
“이런 멍청한 새끼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냐?”
“...!”
“떨어진 놈은 버려라! 지금 국왕파 놈들이 따라붙고 있다! 한 걸음이라도 더 거리를 벌려야 한다!”
“하, 하지만!”
당혹스러워하는 가신들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루트비히는 말에서 떨어진 가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낙오자는 버려라! 지금은 앞으로 가야 할 때다!”
두두두두두두두!!!
그렇게, 냉혹한 말을 남긴 채 달려나가는 루트비히.
그 모습을 보는 나머지 대공파 가신들의 눈빛이 변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
“정말 잘 도망치는군요.”
오랫동안 자신을 믿고 따르던 부하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도망칠 만큼 정신없이 패주(敗走) 중인 베겐스바흐 대공 루트비히.
그런 루트비히를 멀찌감치에서 추격 중인 국왕파 병력의 지휘관, 에르발트 베링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그러게요. 도망치는 거 하나만큼은 왕국 최강 수준이에요.”
그런 에르발트의 말을 받는 건, 그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며 루트비히를 추격 중인 다닐렌츠의 기사 아이린 그뢰네마이어.
두 사람은 프롤린 전투의 패배 이후 왕도를 향해 도망치는 루트비히를 추격하고 있었다.
한데, 그 추격의 방식이 조금 특이했다.
“잡을 듯 말 듯 거리 두고 따라가는 게 쉬운 게 아니군요.”
“맞아요. 너무 접근하면 놈들이 반전해서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 수도 있는 법!”
“궁지에 몰린 쥐라... 쥐 치고는 좀 크네요.”
“호호, 그러게요.”
에르발트의 농담에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싱그러운 미소를 보인 아이린이 다시 시선을 전방으로 돌렸다.
“슬슬 속도 올리죠. 거리가 벌어지고 있어요.”
“그럴까요?”
아이린의 말을 들은 에르발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전군, 속도를 높인다! 나를 따르라아아아!!!”
***
트란베르크, 레오덴 요새_
얼마 전까지 대공파의 주둔지로 쓰였던 레오덴 요새.
하지만 이제 이곳은 명백한 국왕파의 점령지가 되었다.
현재 국왕파의 핵심 중의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나와 사자기사단장 빌헬름 리벤트로프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 땅이 국왕파의 세력권에 속해있다는 증명이 되어주었다.
거기에 더해,
“배, 백작 각하! 간밤엔 평안하셨습니까? 혹 불편한 점은 없으셨는지요?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바로 움직여 처리토록 하겠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내가 거하는 레오덴 요새의 지휘관 침소 앞으로 찾아와 연신 허리를 굽히고 있는 이 사내.
그가 바로 트란베르크의 영주, 베른 파보르텐(Bern Pavorten) 남작이었다.
며칠 전, 나와 사자기사단은 레오덴 요새에 웅크리고 있던 대공파의 병력을 완전히 궤멸시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공의 줄을 잡았던 여러 왕국의 귀족들을 냉혹하게 숙청했다.
반역자들에게 베풀 관대함?
그런 건, 애초부터 없었다.
프롤린에 있는 요제프 국왕에게 출병(出兵)을 보고하던 날.
나는 어린 주군에게 왕국의 배신자들을 ‘단호하게 처리’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요제프 국왕 또한 그리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반역자들을 처단하는 나의 손속에 거리낌이 없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레오덴 요새를 점령한 후, 나는 포로로 잡힌 대공파 귀족들의 목을 거침없이 베었다.
어떤 놈들은 울면서 용서를 빌었고 개중의 몇 놈은 분노를 토했다.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지만, 그들 모두가 똑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딱 한 명, 이곳 트란베르크의 영주인 베른 파보르텐 남작만이 내 검에 목이 떨어지는 신세를 피할 수 있었는데 여기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사실, 그는 본래 대공파에 가담한 귀족이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군사를 끌고 몰려온 베겐스바흐 대공의 위세에 짓눌려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영지와 요새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
그 사정을 참작하여, 나는 트란베르크 남작의 목을 그의 몸에 붙여두었다.
대신 추후 왕도로 가서 이번 일에 관련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 재판의 결과는 아마도 내가 할 증언의 내용에 달려있을 것이고.
트란베르크 남작이 아침 댓바람부터 나의 침소에 찾아와 저 난리를 피우고 있는 이유였다.
“덕분에 편안하게 잘 쉬었소, 남작.”
“아, 그러시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하하하!”
어색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남발하며 친한 척을 하는 트란베르크 남작.
그가 파리처럼 손바닥을 비비며 말을 이어나간다.
“각하, 제가 주도에 있는 제 요리사들을 직접 데려왔습니다. 그들이 앞으로 각하의 식사를 챙길 겁니다.”
“아, 그래요?”
“예! 당장 오늘 아침 식사부터 달라진 식사 분위기를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맛은 뭐, 직접 확인해보시죠! 아주 만족하실...”
“각하! 각하아아아!!!”
트란베르크 남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열린 문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슥 고개를 돌려 확인해보니, 매일 같이 전선의 상황을 내게 보고하는 다닐렌츠 정보부 소속의 연락 장교다.
고개를 끄덕여 그에게 발언을 허락하니, 곧 그의 입에서 반가운 소식이 쏟아져 나온다.
“대승입니다! 프롤린의 아군이 대공의 병력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습니다!!!”
“오!”
“프롤린에 주둔 중이던 국왕파 병력과 키르헨에서 넘어온 다닐렌츠의 증원 병력이 합세하여 베겐스바흐 중장보병대와 암흑 기사단, 검독수리 기사단 모두를 궤멸시켰다는 보고입니다.”
“궤멸(潰滅)이라...”
그것 참, 듣기 좋은 소리군.
프롤린에서의 전투가 내 생각대로 잘 마무리되었다는 보고에 아직 남아 있던 잠이 싹 깨는 기분이었다.
“루트비히는, 사로잡았나?”
“아쉽게도 루트비히는 사로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
루트비히를 놓쳤다는 말에 옆에서 연락 장교의 보고를 함께 듣고 있던 트렌베르크 남작이 탄식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와 달리 나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을 뿐, 그다지 아쉬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
내겐 대공을 사로잡는 것에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한 다음 계획도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추격은, 시작했나?”
“예, 각하. 베링 경과 그뢰네마이어 경... 아니, 영주 부인께서 직접 추격에 나섰다는 보고입니다.”
“아이린이?”
이건 뜻밖이군.
사랑하는 부인이 직접 적을 추격하러 나섰다는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부인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걱정부터 됐겠지만, 나의 부인인 아이린 그뢰네마이어는 보통의 범위를 진작에 초월한 사람.
그런 사람이 고작 한 줌밖에 되지 않는 패잔병들에게 무슨 일을 당하겠는가.
거기에 더해 백전노장인 에르발트 베링이 함께 추격에 나섰다고 했으니, 걱정할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리벤트로프 경에게 연락해 출병 준비를 하라 일러라.”
“출병... 말입니까?”
“그래. 이제부터 우린...”
나는 걱정 없이 내 할 일을 할 뿐이다.
“... 대공을 잡으러 간다. 준비해라.”
***
남작령 미르텐부르크(Mirtenburg)는 루테니아 동쪽에 자리한 영지였다.
영지의 크기가 작고 농사짓기에 적당한 평야 지대가 많지 않아서 늘 먹고 사는 형편이 좋지 못한 곳.
하지만 미르텐부르크의 그 거친 지형이 지금의 루트비히에겐 가뭄 속의 단비처럼 반갑게 느껴졌다.
“허억! 허억! 저 골짜기로 들어가자! 어서!!!”
“예!!!”
거친 숨을 몰아쉬며 좁은 협곡 사이로 말을 달리는 루트비히.
프롤린 전투의 패배 직후 약 팔백 명에 달했던 그의 일행은 현재 오십여 명 남짓한 숫자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도 거르며 도망치는 가혹한 도주 행렬 속에 그를 따르던 가신과 병사들이 줄지어 이탈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엔 몸이 더는 버티지 못해서 낙오한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자발적으로 대공의 뒤를 따르기를 거부한 거였다.
그러한 이들의 행동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베겐스바흐 대공은 끝났다’
그의 왕권 찬탈 시도는 명백한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목숨을 건져야겠다 생각한 이들이 대공의 곁을 떠나는 선택을 한 것이다.
베겐스바흐 대공국에서부터 함께 따라온 오랜 충신들을 제외하면, ‘대공파’라는 이름 아래 모인 대부분의 이들은 애초에 권력의 부스러기를 주워 먹기 위해 모였던 이들.
그런 이들이 더는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대공의 곁에서 떠나가는 것은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조용, 조용히 해라! 쉬이잇!!!”
“말에게 재갈을 물려라! 고개 숙이고 다들 조용히 해!”
오랜 도주로 몰골이 엉망이 된 기사들이 주변의 병사들을 다그쳤다.
루트비히가 발견한 골짜기는 현지인들에게 파르트바흐(Partbach) 협곡이라 불리는 곳으로, 한쪽으로는 깎아지듯 높은 절벽, 다른 한쪽으로는 야트막한 언덕 위 빽빽하게 나무가 자라나 있었다.
절벽과 언덕의 간격은 사람 셋 정도가 겨우 늘어설 수 있을 정도로 좁았고, 굳이 방향을 틀어 이 길을 찾아들어 오지 않는다면 사람의 흔적을 발견하기 쉽지 않은 지형.
이곳에서, 루트비히와 부하들은 자신들의 흔적을 숨기고 추격자들의 눈을 피할 생각이었다.
‘... 어차피 더는 도망칠 수도 없다.’
사람뿐만 아니라 타고 있는 말도 형편없이 지쳐있었다.
입가에 허옇게 거품이 말라붙어 있고, 걱정될 정도로 숨이 거칠어진 모습.
이러다간 사람 때문이 아니라 말이 내뿜는 숨소리에 추격자들에게 들키는 것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왕도에만 돌아가면... 그럼, 모든 게 다 해결된다.”
왕도 카를리온엔 약 1만에 가까운 베겐스바흐의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루트비히 그 자신이 왕도를 떠나 있을 동안 혹시 모를 국왕파의 공격이 가해질 것을 우려해 남겨놓은 병력이었다.
비록 암흑기사단과 검독수리 기사단 등 베겐스바흐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병력을 잃었지만, 1만에 달하는 많은 병사들과 카를리온의 두꺼운 성벽에 기대어 버틴다면 하얀 산맥 너머 베겐스바흐에서 넘어올 증원군을 더해 다시금 대계(大計)를 도모할 수 있었다.
그렇게, 루트비히가 거친 숨을 고르며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고 있는데...
“드디어 왔군, 루트비히. 기다리느라 제법 지루했다.”
“...?!”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선 이의 목소리.
아니, 낯선 게 아니었다.
분명 루트비히의 기억에 남아 있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 다닐렌츠, 백작?”
“그래, 나다.”
루덴도르프 변경백의 죽음 이후 실질적인 국왕파의 수장이 된 사나이,
다닐렌츠 백작, 데미언 카릴베르크가 특유의 금발을 휘날리며 맞은편 골짜기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