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끝 (2)
파르트바흐(Partbach) 협곡 맞은편 입구에서 등장한 사내의 모습을 발견한 루트비히는 말 그대로 사고가 ‘정지’하는 느낌을 받았다.
휘날리는 금발, 아름다운 녹색의 눈동자.
언제, 어디서 봐도 자신만만한 특유의 눈빛.
틀림없다.
“... 다닐렌츠 백작?”
퀭한 눈빛으로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이름을 말하는 루트비히.
그 직후 루트비히는 자신의 행동에 깜짝 놀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뭐지?’
‘피곤하긴 한 가 보군. 하다하다 헛것을 다 보고...’
‘그래, 다닐렌츠 백작이 이곳에 나타날 리가 없이 않은가?’
하지만 바로 그때, 낯이 익은 목소리가 루트비히의 귀에 들렸다.
“드디어 왔군, 루트비히. 기다리느라 제법 지루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루트비히는 속으로 생각했다.
‘... 이제 환청까지 들리는가? 허, 천하의 루트비히가 많이 약해졌군.’
그래, 몸이 너무 힘들다 보니 그럴 수 있다.
젊었을 적, 한창 왕국의 기사로서 전쟁터에 나아가 혹독한 생활을 할 때도 그랬다.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식사도 챙기지 못한 채 적과 싸우고, 길바닥에 쓰러져 잠드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면 몸이 너무 지쳐서 지금처럼 환청이 들리고, 평소 안 보이던 헛것이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의 정리를 마친 루트비히가 거친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정신을 차리려는데...
“어제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늦게 왔군.”
“...!?”
“난 더 빨리 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뭐랄까... 아직 절박함이 부족한 건가? 아니면 상황 파악이 안 되어서?”
루트비히로서도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눈앞의 저 사내는, 헛것 따위가 아니라 그와 같은 뼈와 살로 이루어진 진짜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닐렌츠... 백작?”
“그래, 나다.”
다그닥-
이제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 입 모양을 보고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한 상대였다.
사람도 사람이었지만, 저 괴물 같은 체구를 지닌 검은 군마(軍馬)를 보니 더욱 확실해진다.
다닐렌츠 백작, 데미언 카릴베르크.
평생에 걸친 루트비히의 꿈을 산산이 깨뜨린 사내.
그 저주스러운 이름의 주인공이 이곳, 미르텐부르크의 골짜기에 나타난 것이다.
***
“어떻게... 어떻게 네 놈이 여길...!”
“신기한가? 하긴, 그럴 만도 할 테지.”
나는 흔들리는 루트비히의 눈빛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대체 어떻게 알고 내가 여길 찾아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를 위해, 나는 천천히 입을 열어 우리가 만나게 된 과정을 설명해주었다.
“뭔가 오해를 하는 모양이군. 내가 여기를 찾아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
“... 뭐라?”
혼란스러운 루트비히의 눈빛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조소를 지었다.
“루트비히, 네가 죽을 자리를 네 발로 찾아온 것이다.”
“...!”
그제야 이 상황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눈치챈 루트비히가 입술을 짓씹는다.
“이... 이이!”
“루트비히, 너는 내 부하들에게 몰이를 당해 이곳으로 온 것이다. 마치 목동들에게 몰이 당하는 목장의 양들처럼 말이지.”
이어 나는 일부러 과장된 손짓으로 주변의 경관을 가리키며 루트비히에게 물었다.
“파트르바흐 협곡, 오래전부터 너의 무덤으로 점찍어 두었던 곳이다. 어때, 마음에 드나?”
“닥쳐라! 그 입 닥쳐!!!”
맹수의 울음과도 같은 외침을 토해낸 루트비히가 수하들을 둘러보며 날뛰기 시작한다.
“죽여! 당장 저놈을 죽여라!!!”
그런 루트비히의 말에, 주변에 있던 몇몇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소리치며 달려 나왔다.
“아, 알겠습니다!”
“돌격! 모두 돌격해라!!!”
“다닐렌츠 백작을 죽여라!!!”
“와아아아아아!!!”
하나 같이 지쳐 있는 모습에 퀭한 눈빛을 하고서 물먹은 솜처럼 있던 그들.
저렇게 엉망인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상관의 명령에 빠르게 반응하는 것이 대단하긴 했다.
하지만,
“쓸데없는 짓을...”
그 의지가 대단하긴 한데, 그게 꼭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휘우우웅- 푸화악!!!
가장 앞장서서 달려들던 기사의 몸이 두 조각으로 갈라지며 붉은 피를 뿌린다.
나의 독문무기, 유일(Unique) 등급의 도끼창 ‘낙뢰(落雷)’에 제대로 얻어맞은 탓이다.
“루트비히의 개들아!”
얼핏 보아도 열 명이 넘는 기사와 병사들이 뒤엉켜 내게 달려들었지만, 나를 쓰러뜨리기엔 너무나 부족했다.
“어디 한 번, 발버둥 쳐 봐라!!!”
휘잉- 촤아악! 푸확!!!
낙뢰의 도끼날에 걸린 적들의 살가죽이 찢기고, 뼈가 부서진다.
사람뿐만 아니라 그들이 탄 말과 손에 쥔 철제 무기마저 갈기갈기 찢는 위력에, 앞서 달려나간 동료의 뒤를 따라 내게 돌격하려던 병사들의 발이 땅에 못 박힌 듯 멈춰섰다.
“으으...!”
“저게, 저게 뭐야...?!”
“암흑기사단장보다 더하잖아?”
“미친... 사람이 아냐!”
“괴물이다, 괴물!”
내가 만들어낸 끔찍한 풍경에 질려버린 병사들이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들고 있던 무기를 내던지고, 몇몇은 아예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내가 덤벼들었던 십여 명의 기사와 병사들이 순식간에 시체가 되어 바닥에 눕는 꼴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대한 폭력과 잔혹함에 완전히 짓눌려버린 그들의 눈빛을 오연히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터억- 콰직!
내가 애마 블리츠의 등에서 내려섬과 동시에, 그 아래 있던 어떤 이의 손목이 짓밟히며 핏물을 뿜어냈다.
손목의 주인은 이미 생을 달리했기에, 비명 따윈 들리지 않았다.
저벅, 저벅-
천천히, 그러나 묵직한 걸음으로 나는 정면의 루트비히를 응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으으, 으으으!”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의 모습을 본 루트비히가 발작하듯 몸을 떨며 말 위에 오르려 애썼다.
그러나,
휘웅- 휘웅- 휘웅- 콰직!!!
“키히이이잉!!!”
루트비히가 올라타자마자, 말의 머리 한복판에 내가 던진 손도끼가 틀어박혔다.
구슬픈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 군마.
당연히, 그 위에 올라타 있던 루트비히는 몸을 뒤집으며 다시 바닥으로 굴러떨어져야 했다.
철퍼덕!
“끄허윽...!”
바닥에 떨어진 루트비히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버둥거린다.
왼쪽 어깨를 붙잡고 신음을 흘리는 모습을 보니 아마도 떨어질 때 부상을 입은 듯했다.
“저, 전하!!!”
그런 루트비히의 모습을 본 찌든 몰골의 기사 한 명이 급히 달려와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휘우웅- 푸확!!!
그의 손이 루트비히의 몸에 닿기도 전에 머리통이 쪼개지며 피분수를 뿌렸다.
촤아악! 후드드득!!!
“흐읍!”
바닥에 엎어져 있다가 졸지에 부하의 피를 뒤집어쓰게 된 루트비히가 이를 악물며 버둥거렸다.
뜨겁고 비릿한 피가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우엑! 푸흐읍! 쿨럭!!!”
비처럼 쏟아진 피가 그의 눈과 코, 입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끔찍하고 괴로운 광경.
하지만 나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냉혹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루트비히에게 다가가는 놈은 방금 그놈처럼 머리통이 쪼개질 거다. 뒈지기 싫으면 그 자리에 그대로 가만히 있어라.”
“...!”
그렇게, 말 한마디로 주변 모든 이들의 발을 묶어버린 나는 바닥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루트비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루트비히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찼다.
퍼억! 우드득-!
“커흐억!!!”
발끝에 느껴지는 감각만으로도 놈의 갈비뼈가 부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고도 없이 가해진 발길질에 속절없이 걷어차인 루트비히가 얼굴을 바닥에 처박고 울부짖는다.
“으흐윽! 다닐렌츠 백자아아악!!! 네 놈이 감히!!!”
퍼억!
“끄워억!!!”
비명과 발악, 그 사이 어디쯤에 위치한 목소리를 내지르는 루트비히 몸에 다시 한번 나의 발차기가 꽂힌다.
이번에는 옆구리가 아닌 복부를 강하게 걷어차인 루트비히.
바닥에 엎어져 있는 상태에서 새우처럼 몸을 구부린 그가 연신 위액을 토해낸다.
“우웨엑! 웩!!!”
“처먹은 게 없으니 나오는 것도 없군.”
당장이라도 죽을 듯 괴로워하는 루트비히의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태연하게 그리 말했다.
으직-
“컥!”
거기서 더 나아가, 나는 엎드린 루트비히의 등판을 밟아 그대로 내리눌렀다.
그리고 놈의 등을 밟은 발에 힘을 주어 당장 죽지는 않겠지만 숨쉬기가 어려운, 딱 그 정도의 압력을 가했다.
“허으어어! 허으억!”
내 발아래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괴로워하는 루트비히.
얼마 전까지 왕국의 주인이 되는 꿈을 꾸던 사나이의 모습치고는 지나치게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러자 루트비히의 부하들이 울부짖으며 내게 소리쳤다.
“으으으, 대공 전하께서... 전하께서!”
“이노옴! 전하에게 어찌 그런 모욕을 주느냐!!!”
“다닐렌츠 백작! 그만하시오! 그대가 이겼으니 대공 전하를 더는 모욕하지 마시오!”
“흐흑! 전하! 전하아아아!!!”
그런 그들에게 내가 말했다.
“모욕? 모욕이라고 했나?”
나는 루트비히를 밟고 있는 자세 그대로,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살기가 번뜩이는 진녹색의 눈빛과 함께였다.
“이런 건 모욕이 아니다. 모욕이란 가족이라 굳게 믿었던 숙부에게 목숨을 위협받아 어둡고 냄새나는 지하통로를 반나절이나 걸어 도망쳐야 했던 어린 조카가 느끼는 감정, 그것이 바로 진짜 모욕이다.”
“...!”
“왕국의 변방을 수호하라는 의미로 내려준 대공의 작위를 앞세워 키워낸 병사를 되레 왕위를 빼앗기 위해 동원한 불충, 불의한 작자가, 이까짓 일로 과연 모욕을 받았다 말할 자격이 있는가?”
“...”
뜨거운 분노가 넘실거리는 나의 목소리에 골짜기 전체가 죽음과도 같은 침묵에 빠져든다.
구구절절 옳았고, 그렇기에 뭐라 반박할 수 없는 나의 준엄한 호통에 대공의 부하들 모두가 고개를 떨구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을 자신들의 군주가 이끄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왕국을 머릿속에 그리며 하얀 산맥을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그저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온 간악한 침략자들일 뿐이라고.
왕위에 눈이 멀어 천륜까지 저버린 더러운 인간과 함께 구정물에 몸을 담근, 어리석고 죄 많은 자들일 뿐이라고.
그렇게, 파트르바흐 협곡의 분위기를 완전히 장악한 내가 슬슬 현장을 정리하려던 그때...
“내가... 내가 요제프보다 왕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다!”
“...?”
살짝 힘을 뺀 나의 발아래 깔려있던 루트비히가 피를 토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런 내가! 이 루트비히가 그 왕의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 도전을 한 것이다! 그게, 그게 어째서 뻔뻔한 짓이라는 것이냐! 어째서 불충하고 불의한 것이냐! 나는 사내로서, 나의 꿈을 위해, 내 야망을 위해 평생을 노력한 죄 밖에 없다!!!”
“...”
악에 받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루트비히.
어린 시절부터 눈앞에서 아른거렸던 왕좌의 꿈.
그 꿈을 위해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바쳤던 사내가 처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루트비히의 부하들은 물론이고 현장의 정리를 위해 모습을 드러낸 우리 측 병력, 사자기사단의 기사들조차 루트비히의 말에 숙연해지던 그때,
“아니.”
그의 꿈을 깨부수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넌 너의 꿈을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다.”
“...!?”
“존엄하신 국왕 폐하의 검 아래 맥없이 부서진 너의 꿈은 그저 불충(不忠)하고 불의(不義)하며, 또한 천륜까지 저버린 비열한 자의 찬탈 시도로 기억될 거다. 그러니, 그 더러운 입을 닥쳐라.”
“이, 이이... 다닐렌츠 백작, 이노오오오오옴! 아아아악!!!”
핏발선 눈으로 괴성을 지르는 루트비히의 머리에,
퍼억!
힘껏 뻗어낸 나의 발길질이 닿으며 골짜기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베겐스바흐 대공 루트비히가 꾸었던, 오랜 꿈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