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87화 (186/197)

최후의 결전 (1)

... 역사란 본디 승자(勝者)의 기록이다.

패자(敗者)가 품고 있던 꿈, 그들을 움직이게 했던 거대한 명분 따윈 아무도 기억해주는 이가 없다.

파르트바흐(Partbach) 협곡에서 국왕파의 병사들에게 사로잡힌 베겐스바흐 대공, 루트비히 베르너 이그나티우스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는 분명 왕재(王才)를 지닌 사람이었다.

물론 성품이 지나치게 독선적이고, 때때로 주변 사람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잔혹하게 굴 때가 있었으나 대영지 베겐스바흐를 다스리며 제국이라는 거대한 적에 맞서 오랜 시간 왕국의 변경을 수호해낸 그 능력만큼은 분명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 대단한 능력이 어디 하루아침에 생겨났겠는가?

분명 그는 어린 시절부터 왕좌에 대한 꿈을 품었을 것이고, 스스로 그 자리에 어울릴만한 그릇이 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객관적인 능력만 본다면, 당대의 국왕인 요제프에 비해 루트비히가 훨씬 왕의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본래 왕에게 가장 중요한 재능은 타고난 ‘핏줄’ 그 자체가 아니던가.

그런 면에서 소년 요제프는 선왕의 적통으로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정당한 명분과 자격을 지닌 사람이었다.

거기에 더해, 요제프는 숙부인 루트비히와 달리 아버지 하인리히의 모습을 쏙 빼닮은 자애롭고 선한 성품으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아직 나이가 어려 세상일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왕으로서의 ‘결격 사유’가 없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루트비히는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서는 절대 왕이 될 수가 없었다.

루트비히의 입장에선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역시도 왕족의 피를 타고난 사람이었고, 요제프에 비해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더 많았다.

하지만 왕실의 적통인 조카 요제프가 존재하는 한, 왕위를 향한 그의 꿈은 그저 꿈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루트비히는 난(亂)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자신의 꿈을 현실로 이뤄내기 위한 싸움이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대담한 도전.

내전의 초반까지만 해도 루트비히의 도전은 거의 성공하는 듯 보였다.

그가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키워낸 베겐스바흐의 정병들과 권력의 콩고물을 주워 먹기 위해 그의 곁으로 몰려든 귀족들의 힘으로, 루트비히는 단 하루 만에 왕국의 심장부라 불리는 도시 ‘왕도(王都)’ 카를리온을 장악했다.

그 과정에서 국왕 요제프를 사로잡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루트비히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곧 그의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도망친 어린 조카를 찾아낼 것이고, 다시 왕도로 끌고 와 자신의 앞에 무릎 꿇릴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착각이었다.

국왕을 잡기 위해 바삐 달려나갔던 부하들은 다시는 주군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루트비히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의 원인.

그것은 다름 아닌 신임 왕실근위대장의 존재였다.

‘왕국제일검’이라 불리며 이십 년간 펠린느 왕가(王家)의 곁을 지켜온 전임 왕실근위대장 바이펠베르크 백작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

신임 왕실근위대장은 그런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사위이자 왕국 변방의 가난한 땅을 고작 몇 년 만에 몰라볼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발전시켜 그 능력을 인정받은 다닐렌츠의 영주였다.

데미언 카릴베르크.

그는 감히 ‘전설적’이라는 표현을 써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삶의 궤적을 이어온 인물이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왕국 남부 텔마르크 영지의 주도 크라벤의 빈민가에서 나고 자란 고아 출신의 인물이었다.

미래에 대한 꿈을 꾸기는커녕 당장 오늘 먹고 살 일을 고민해야 했던 가난한 고아 소년은 우연한 기회에 용병대장의 눈에 띄어 용병이 되었고, 그 후 빠른 속도로 실력을 쌓았다.

용병이 된 뒤로 고작 2년 만에 기사들을 압도할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고 하니, 그 발전 속도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이후로도 데미언은 남들은 감히 따라할 수 없을 정도의 출세가도를 달렸고, 마침내는 중앙 정계의 요직 중 하나로 꼽히는 왕실근위대장의 자리에 도전한다.

그는 장인인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존재 덕에 그 자리에 올랐다는 뒷말이 나올 것을 우려해 개최한 왕실근위대장 선발 무투회에 출전했고, 결승에 올라 암흑기사단의 부단장 사울 리카르도를 만난다.

모두가 알다시피 암흑기사단은 베겐스바흐 대공 루트비히의 친위기사단.

그런 곳의 부단장씩이나 되는 인물이 왕실근위대장 자리에 도전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훗날 벌어진 루트비히의 왕위 찬탈 시도를 생각한다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대공은 자신의 측근인 사울을 왕실근위대장의 자리에 앉혀 국왕의 신변을 수월하게 확보하려던 것이다.

하지만, 데미언의 존재로 인해 루트비히의 그 같은 계략은 실패로 돌아간다.

만약 그의 뜻대로 사울이 왕실근위대장이 되었다면 루트비히가 굳이 무리해서 군사를 일으키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울이 지휘하는 왕실근위대 병력을 이용해 국왕과 주요 왕족들의 신변을 확보한 후 왕위를 자신에게 넘겨준다는 그림을 그렸으면 될 일이니까.

하지만 결국 루트비히의 계획은 실패했고, 데미언의 초월적인 검술 실력에 제대로 당해버린 사울은 몇 달을 꼬박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하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그가 다시 자신의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는 몸 상태가 되었을 때, 그가 모시던 주군 루트비히는 카를리온 왕성 지하 감옥의 가장 깊은 곳에 유폐되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루트비히와 데미언, 이 두 걸물의 지독한 악연(惡緣)은 아마도 신임 왕실근위대장 선발 무투회의 결승전이 열렸던 그 날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역사학자 한스 코젤렉의 저서 <689년, 창검의 밤> 본문에서 발췌

***

“베겐스바흐 대공이 사로잡혔다!”

이 짧은 말 한마디로, 왕국 각지에서 들끓던 혼란은 대부분 잦아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왕국을 뒤흔든 이 혼란은 베겐스바흐 대공이라는 인물의 존재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왕국 내에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던 기존의 귀족 사회 구조를 뒤집고 권력의 중심에 다가가고픈 비주류 귀족들의 욕망을 교묘하게 이용했던 베겐스바흐 대공 루트비히.

그런 그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니 남아 있던 대공파의 인물들은 구심점을 잃은 오합지졸 신세가 되고 말았다.

“폐하, 이제 왕도로 돌아가시지요!”

반쯤 실성해버린 루트비히를 함거에 실어 프롤린으로 돌아온 날.

사자기사단장 빌헬름 리벤트로프는 눈물까지 흘려가며 어린 주군 앞에 나아가 그렇게 말했다.

본래는 작위에서 앞서는 내가 대표로 나서서 말을 전해야 하나, 나는 국왕과 더 오랜 시간을 보낸 그를 대표로 내세웠다.

“고생 많으셨소, 리벤트로프 경. 정말... 정말로 고생이 많으셨소! 왕국의 위엄을 지켜낸 모든 사자들에게 경의를 표하오!”

아버지뻘 되는 가신의 눈물에 마주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요제프.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도 뭔가 가슴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오는 것 같았지만, 간신히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아냈다.

한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국왕의 말을 듣고 있던 사자기사단장 빌헬름.

그는 연신 그에게 치하의 말을 늘어놓는 요제프의 작은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폐하, 오늘의 이 승리는 전적으로 다닐렌츠 백작의 공입니다. 그의 빛나는 혜안(慧眼)과 강철같은 용맹함이 쓰러져가던 왕국을 다시 바로 세웠습니다.”

“아...”

“백작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모두 대공의 악랄한 계략에 당해 전장의 진흙밭을 구르고 말았을 것입니다!”

말을 하면서 점점 몸에 열이 오르는 것인지, 조금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빌헬름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직 다닐렌츠 백작만이 대공의 머릿속을 꿰뚫어 보고 그의 야망을 분쇄할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 덕분에, 이렇게 살아서 폐하의 존안을 다시 봬올 수 있었습니다! 이 빛나는 영웅의 전공을, 잊지 말고 치하해주소서!”

어디 시집이나 소설책 같은 곳에서 미리 문구를 발췌해다가 외우고 다니기라도 한 것일까?

실로 감탄스러운 빌헬름의 칭찬 세례를 듣고 있자니 부끄럽고 민망하여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 다닐렌츠 백작, 이리로. 어서 내 앞으로 오라.”

국왕이 직접 나의 이름을 부르는 상황이니, 움직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예, 폐하.”

“그대의 활약은 이곳 프롤린에서도 전해 듣고 있었다. 실로 자랑스럽고, 또한 감사할 따름이다.”

“아니옵니다, 폐하. 저는 그저 폐하의 신하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옵니다.”

“아니다, 아니야.”

내가 꺼내놓은 겸손의 말에 요제프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대는 전장에 나서 패배를 모르는 무적의 명장이다. 왕국의 깃발 아래 싸우는 모든 기사와 병사들을 기기묘묘한 기책(奇策)으로 이끌며 적들에게 두려움을 선사하고 주군에겐 잃었던 영광을 돌려주었도다! 그럼에도 이토록 겸손함을 잃지 않으니, 이야말로 참된 기사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감당할 수 없습니다.”

감격과 민망함이 다시 한번 폭풍처럼 몰려들었고, 나는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참, 이런 말을 줄줄 쏟아낼 수 있다니... 대단하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처음엔 행동부터 말투까지 모든 것이 어설퍼 보이기만 했던 요제프.

하지만 숙부의 왕위 찬탈 시도라는 전무후무한 고난을 겪으며 몸과 마음을 단련했는지, 승전하고 돌아온 장수를 치하하는 모습에 제법 위엄이 서려 있었다.

나는 확신했다.

요제프가 이번 일을 잘 마무리 짓고 왕도로 돌아간다면, 왕국은 앞으로 오랫동안 자랑할 수 있을 만한 훌륭한 군주를 얻게 될 것이라는 걸.

‘... 비 온 뒤에 땅이 굳는 법이지.’

전쟁을 치르며 왕권에 가장 큰 위협이었던 대공파 세력을 싹 쓸어냈다.

거기에 더해 국왕 본인은 큰일을 겪으며 눈에 띄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앞으로 그의 치세가 탄탄대로일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소설 속에선 그냥 유약하고 겁 많은 어린 애로 나왔었는데...’

어쩌면, 원작 소설 <로스트 킹덤>에서 가장 저평가되었던 것은 내 앞에서 흐뭇한 눈빛을 한 채 나를 바라보는 이 소년인지도 모르겠다.

“자, 우리 모두 집으로 돌아갑시다. 가서 왕국의 영광이 건재하다는 것을 왕국의 모든 신민들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예, 폐하!”

왕도로 돌아가자는 국왕의 말에 프롤린 성에 자리한 모든 이들이 기쁜 목소리로 대답하던 그때,

“폐, 폐, 폐하아!!!”

“...?”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모습을 드러낸 전령 하나.

모두가 그의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보고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무슨... 무슨 일이냐!”

모두를 대표해 앞으로 나선 사자기사단장 빌헬름이 전령에게 물었고,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쏟아냈다.

“나, 남부 전선에서의 급보입니다! 바덴하임 군의 갑작스러운 서진(西進)을 저지하기 위해 전선으로 나섰던 바이펠베르크 백작이...”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양쪽 주먹을 꽉 쥐었던 것 같다.

그 전령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슨 내용인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불길한 예감은, 안타깝게도 적중하고 말았다.

“... 적장과의 대결에서 패해, 저... 전사(戰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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