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결전 (2)
두두두두두두두!!!
치솟는 흙먼지.
왕도 카를리온으로 향하는 가도를 가득 메우며 전력으로 말을 달리는 한 떼의 병력이 있었다.
그 병력에 선두에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다닐렌츠 백작, 데미언 카릴베르크.
그의 얼굴에서 평소의 여유로운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감정을 잃은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묵묵히 가도를 따라 전진하던 데미언.
한참을 그렇게 달려가던 그의 입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혼잣말처럼 튀어나왔다.
“... 에리히 프라이슬러.”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바덴하임의 사자(獅子)’라 불리던 사나이.
하지만 이제 세상은 그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왕국제일검(王國第一劍).
지난 수십 년간 왕국 최강이라 불렸던 바이펠베르크 백작에게만 허용되었던 그 영광된 이름을 빼앗아간 에리히다.
그리고 지금,
“속도를 더 높인다! 전군, 전속 전진!!!”
이제는 고인이 된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사위이자 그의 뒤를 이어 펠린느 왕실의 검(劍)이 된 사나이,
다닐렌츠 백작 데미언이 그 이름을 되찾으러 가는 중이다.
***
왕도 카를리온으로부터 하루 거리에 자리한 어느 너른 들판에 자리한 국왕파의 진영.
나는 그 한 가운데 세워진 지휘 막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백작 각하, 로이터 경이 찾아왔습니다.”
“음, 안으로 모셔라.”
나의 가장 든든한 동료이자 가신, 겔베르트가 지휘 막사를 찾아왔다는 소식에 나는 곧바로 접견을 허락했다.
곧, 막사의 입구로 모습을 드러내는 겔베르트.
지난 프롤린 전투에서 암흑기사단의 수장 리하르트를 상대로 싸우다 입은 부상이 아직 완쾌되지 않았음에도 나를 따라 종군 중인 그였다.
“... 영주님.”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걱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눈빛을 애써 모른 척하며 억지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어, 겔베르트. 이리 앉아요. 오신 김에 같이 저녁이나 들까요?”
“예, 그렇게 하시죠.”
잠시 후 우리 두 사람의 앞에 병사들이 가져다준 간단한 저녁 식사 음식들이 놓였다.
감자와 당근이 들어간 스튜에 밀빵 몇 개로 이루어진 단촐한 식사였지만, 전장에서 이 정도 식사면 훌륭한 편이다.
“...”
“...”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식사에만 집중하던 우리 두 사람.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나였다.
“걱정되어서 와 보신 겁니까?”
“아니, 뭐...”
정곡을 찌르는 나의 물음에 스튜에 적신 밀빵을 입에 가져가던 겔베르트가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저는 괜찮습니다. 사실, 저보단 부인이 더 걱정이죠.”
“아...”
내 말을 들은 겔베르트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닐렌츠 백작 부인, 아이린 그뢰네마이어.
아이린은 아버지인 바이펠베르크 백작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세상 하나뿐인 아버지이자 존경하는 무인(武人)이었고, 더 나아가 삶의 목표가 되어준 스승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탓이다.
“... 부인께선 잘 이겨내실 겁니다. 강한 분이시니까요.”
“그렇겠죠. 다만... 이런 상황에 제가 곁에 있어 주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지금 각하께선 폐하께서 내리신 막중한 임무를 수행 중이십니다. 부인께선 영민하신 분이니, 충분히 사정을 이해해주실 겁니다.”
나의 장인어른, 바이펠베르크 백작을 쓰러뜨린 에리히는 그대로 바덴하임 군을 이끌고 북진(北進)을 시작했다.
포나우 강 이남 지역에서 백작령 바덴하임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바이펠베르크가 그 수장을 잃고 주저앉았으니, 현실적으로 그 움직임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에리히와 그가 이끄는 바덴하임 군이 북쪽으로 향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바로, 주인이 없는 왕도 카를리온을 점령하겠다는 것.
베겐스바흐 대공 루트비히의 곁에 붙어 새로이 열릴 왕국의 권력을 탐했던 바덴하임 백작 ‘황금백’ 헤르만 바이츠제커가 아예 왕국의 주인이 되겠다는 야망을 품게 된 것이다.
그 소식을 접한 국왕 요제프는 왕국의 오랜 충신,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죽음을 애도할 겨를도 없이 나를 비롯한 국왕파의 병력 대부분을 왕도 카를리온으로 급파했다.
하지만 왕도 도착을 하루 앞둔 오늘, 우리는 바덴하임 군이 카를리온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더는 빨리 말을 달려가는 게 의미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살다살다 왕도에서 공성전을 펼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낸 겔베르트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공감을 표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참, 일이 어쩌다 이렇게 꼬여버린 건지...”
“그나저나 영주님과 저, 에리히 프라이슬러 그 인간과는 참 악연인 것 같습니다.”
“흠...”
이번에도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악연(惡緣).
에리히와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단어 중 그보다 더 적절한 것을 찾을 수 있을까?
“진짜 그때 성에서 못 빠져나오고 다 죽는 줄 알았는데... 그게 벌써 7년이나 됐군요.”
담담한 목소리로 에리히와 우리의 첫 만남을 떠올리는 겔베르트였다.
“예, 그렇네요. 7년, 7년이라...”
한(恨)이 느껴지는 겔베르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 역시 처절했던 첫 패배의 기억을 떠올렸다.
리트베르크의 주도, 리트렌의 성벽 위에서 맞닥뜨렸던 나와 에리히.
수비 측인 리트베르크 영지와 용병 계약을 맺고 전투에 참여했던 나는 성벽 위로 뛰어오른 에리히의 검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 결국, 그러다 성벽 아래로 떨어져서 도망쳤었지.’
당시의 나로선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는 강적이었던 에리히.
그 후로부터 무려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 더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수준이, 장인어른을 넘어설 정도가 되었다고?’
장인어른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는 직접 그분과 검을 겨뤄본 내가 잘 알았다.
히든 피스를 여러 개가 주워 먹고(?) 진즉 인간의 경지를 초월해버린 나의 실력으로도 감히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유일한 사람.
나의 장인어른,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강함은 그 정도였다.
한데, 에리히가 그런 장인어른을 쓰러뜨렸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그 소식을 전한 전령을 붙잡고 여러 번 되물었을 정도였다.
“영주님.”
“예.”
“돌아가신 바이펠베르크 백작 각하... 크흠, 영주님의 장인어른 말입니다.”
이미 고인이 되신 나의 장인어른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웠는지, 슬쩍슬쩍 내 눈치를 보며 발언을 이어가는 겔베르트였다.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아, 예... 아무튼, 그 대단하신 분을... 대체 놈이 어떻게 이긴 걸까요? 물론 에리히도 어마어마한 실력자이긴 한데, 그래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그의 눈빛을 보며, 나도 한탄하듯 말했다.
“그러게요. 저도 그게 참 의문입니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
***
왕도(王都) 카를리온_
번쩍, 콰르르르릉!!!
하늘을 쪼갤 기세로 번개가 내리치고, 잠시 후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폭우.
벌써 이틀째 계속되는 궂은 날씨에 활기차야 할 왕도의 분위기는 어둡고 칙칙하기만 했다.
“...”
왕도 카를리온의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왕성의 창문가에 서서 냉막한 눈빛으로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는 중년의 사내.
에리히 프라이슬러.
“하아...”
얼마 전 왕국 남부 브렌도르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바이펠베르크 백작을 꺾고 ‘왕국제일검’이란 영광된 칭호의 새로운 주인이 된 그가 깊은 한숨을 토해내었다.
“... 살아남은 게 다행이군.”
그의 거친 손이 가슴 부근을 쓰다듬는다.
며칠 전,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검이 틀어박혔던 바로 그 자리였다.
“운이 좋았어.”
자신의 승리를 ‘운이 좋았다’는 한마디로 평가하는 에리히.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이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
며칠 전,
왕국 남부, 브렌도르프 영지의 한 평야_
“어디서 이런 쓰레기들을 잔뜩 데려온 것이냐!!!”
휘우우웅- 푸화아악!!!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열에 가까운 사람이 피를 뿌리며 쓰러진다.
마치 농부가 날이 잘 갈린 낫으로 풀을 베는 듯한 광경.
지금껏 수십, 아니 수백에 달하는 적들이 그에게 덤벼들었음에도 그 누구 하나 검을 휘두르는 사내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압도적인 강함.
압도적인 무용(武勇).
마치 전설 속 반인반신의 영웅이 현세에 강림한 듯한 광경에 모두가 혀를 내두르며 자신의 두 눈을 쓸어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아악!”
“커흑! 내 목... 내 목! 끄륵, 끄르르...”
“괴, 괴물이다!!!”
“씨발! 안 돼! 저런 거랑 어떻게 싸워?!”
“미, 밀지 마! 밀지 말라고!”
“도망쳐! 빨리 도망치라고 이 새끼들아!!!”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서는 적들.
“가소로운 것들, 누구 마음대로 도망치느냐!”
그런 적들의 모습을 비웃으며 날아든 사내의 검이 다시 한번 찬연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마치 맹금이 사냥감을 채듯 날렵하고 정확하며, 또한 무시무시한 기세가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하아아아아!!!”
슈아아앙! 슈아악!!!
사내가 휘두르는 검 끝에서 소름 끼치는 귀곡성이 쉴 새 없이 들린다.
그리고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어김없이 적들의 목이 떨어지고 심장이 두 조각 났다.
실로 전율적인 광경!
수백 명에 달하는 적들을 베어냈음에도 사내의 손에 들린 검은 지금 막 새로 벼려낸 검처럼 날이 시퍼렇게 살아있었다.
이까짓 나약한 놈들의 육신을 베어내는 일 따위, 조금의 부담도 없다는 듯이.
한편,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그 일방적인 살육의 광경을 지켜보던 한 사람.
“과연, 왕국제일검...!”
바덴하임 군의 총사령관, 에리히 프라이슬러가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바이펠베르크 백작,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
저 사내가 처음으로 왕국에서 검을 든 이들 중 ‘제일(第一)’이라 불린 것이 벌써 이십여 년 전이다.
허나 강산이 변해도 두 번은 변했을 그 오랜 세월 동안 사내의 검은 조금도 무뎌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 정면 승부는 무리겠군.”
쉽게 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길 수는 없다.
에리히는 그렇게 파악했다.
세상 누구와 일대일로 검을 겨뤄도 자신이 있을 그였지만, 저 사내의 앞에서만큼은 그럴 자신이 없었다.
“안타깝지만...”
진정으로 안타까웠다.
저런 사내와 정정당당히 검을 겨루다 죽는 것은 기사로서 비할 바 없는 영광일 터.
하지만 에리히는 개인의 영광을 위해 주군이 내린 명령을 어길 정도로 무모하고 이기적인 사내가 아니었다.
당대 최강의 기사를 잡기 위해 에리히와 바덴하임이 준비한 한 수.
그것은 다름 아닌 ‘인해전술’이었다.
“... 다음 조를 투입해라. 이번엔 두 개 조를 한꺼번에 투입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에리히의 목소리를 들은 휘하의 장교 하나가 명령 수행을 위해 곧장 말을 달려나간다.
“와아아아아아아아!!!”
“가자, 놈은 힘이 빠졌을 거다!!!”
“적장의 목을 가져오는 놈은 바덴하임 백작께서 남작의 자리를 약속하셨다!!!”
“적장에게 한칼 먹이는 놈에겐 백 골드다, 백 골드! 가자! 황금이 너희들을 기다린다!”
잠시 후, 출진 명령을 받은 바덴하임 측의 용병대 전력 2개 조, 총 2백 명의 병력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바덴하임 백작의 황금으로 왕국 각지에서 불러모은, 돈에 눈먼 수많은 불나방들이 브렌도르프의 평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