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결전 (3)
“후우, 후우, 후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적들의 피로 완전히 적셔진 한 사람.
거친 숨만큼이나 굵은 땀방울이 그의 턱을 타고 연신 흘러내린다.
이곳저곳에 찍히고 긁힌 흔적이 가득한 은빛의 플레이트 아머.
하지만 그곳 어디에도 관통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 얘기인즉, 치명상을 피했다는 뜻이다.
“... 고되구나, 정말로.”
피로한 표정으로 턱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쓸어내는 중년의 사내.
‘왕국제일검’ 바이펠베르크 백작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
그의 주변, 그가 걸어온 길을 따라 일일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시체의 산이 쌓여 있었다.
멀리 퍼져나간 시체의 냄새를 맡고 찾아온 것일까?
새까맣게 모여든 독수리와 까마귀 떼가 전장의 하늘을 빙빙 돌며 기회를 엿보고 있다.
하지만 아직 녀석들에게 포식의 기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내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놈들, 많이도 몰려왔구나.”
촤륵-
검에 묻은 피를 가볍게 털어내며 다시 걸음을 이어나가는 디트리히.
여전히 많은 적들이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으나, 디트리히는 그 원독(怨毒) 어린 시선의 폭포 속에서 털끝만큼의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제아무리 눈을 부라려봤자, 자신의 검 앞에선 모두 공평하게 무릎을 꿇을 것이기에.
“몸이 식는구나. 다시 한번 놀아보자!”
검을 쥔 손에 힘을 불어넣은 디트리히가 다시금 바닥을 박차며 돌진하려던 찰나,
“거기까지. 이만 걸음을 멈추시지요.”
“...!”
그런 디트리히의 앞을 가로막으며 등장한 건장한 체구의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디트리히가 고단했던 얼굴 위로 작은 미소를 띄워 올린다.
허세도, 기만도 아닌 순수한 기쁨의 감정.
드디어 만나고 싶었던 이를 만났다는 반가움만이 디트리히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의 전부였다.
“자네, 드디어 얼굴을 보는군. 너무 오래 기다렸잖는가.”
그 같은 디트리히의 말에, 앞을 가로막은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다.
“저 같은 일개 범부(凡夫) 따위가 감히 왕국제일검이신 백작 각하의 앞에 쉽게 나설 수 있겠습니까? 없는 용기를 쥐어 짜내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일개 범부라... 어느 누가 ‘바덴하임의 사자(獅子)’를 두고 그리 말할까. 농이 꽤 심하군, 자네. 허헛!”
시퍼렇게 날이 선 장검을 뽑아 들고 자신의 앞에 나타난 적의 기사를 보며 디트리히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바덴하임의 사자’ 에리히 프라이슬러.
디트리히와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과 달리 그의 얼굴을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가 그토록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
“대단하신 분이라는 건 익히 들어 알았지만...”
그것은 바로, 디트리히가 만들어낸 끔찍한 전장의 풍경 때문이었다.
“... 그게,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허헛, 그럴 만도 하지. 내가 이 정도 대규모 전투에 나서서 검을 휘두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으니...”
누가 보면 마을의 은퇴한 어르신이 동네 청년들 몇몇과 가벼운 대련이라도 치른 듯 여유로운 말투.
하지만 디트리히를 마주한 에리히는 그처럼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 사람이, 아니군.’
이번 바이펠베르크 영지와의 충돌을 위해 백작령 바덴하임이 왕국 각지에서 불러모은 용병의 숫자는 물경 1만에 달했다.
자타공인 왕국에서 가장 부유한 땅이라는 바덴하임의 저력을 보여주는 압도적인 병력 동원 능력.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황금백’이 사방으로 뿌린 황금의 광채에 이끌려 왕국 이곳저곳에서 꾸역꾸역 창칼을 든 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한데, 이곳 전장에 모여든 그 1만의 용병들 대다수가 고작 반나절 만에 사라져 버렸다.
그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바이펠베르크의 군사들과 충돌한 결과였다.
“실로 대단하더군요. 바이펠베르크의 저력, 정말 놀랐습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에리히는 정말로 놀라 가슴이 서늘해지는 감정을 느꼈다.
자신들의 몇 배에 달하는 적을 상대로 싸우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던 바이펠베르크의 군사들.
기사들은 누구 하나 빠짐없이 용맹했고, 병사들은 투지에 불탔다.
그들은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 몰린 상황이었음에도 마치 자신들이 전술적 우위에 있는 사람들처럼 싸웠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자신들을 이끄는 사령관,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존재 때문이었다.
“영주님이 함께 계시는 한, 우리는 절대 지지 않는다!”
“덤벼라, 바덴하임의 개들아! 우리에겐 왕국제일검이 있다!”
“전군 돌격! 영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
이처럼, 디트리히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장병들의 사기를 최고로 이끄는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전장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적들의 사기를 깎아내릴 수 있는 막대한 존재감.
그런 그가 오랜만에 전장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 결과는?
“... 각하께서 홀로 저희가 준비한 용병대 20개 조를 쓰러뜨리셨더군요. 그건 알고 계십니까?”
“음? 그랬나? 허허, 자네도 알겠지만 누가 검을 휘두르며 그런 걸 일일이 세어보겠는가? 그저 앞을 가로막으면 베어내고, 덤벼들면 찌를 뿐이지.”
에리히의 딱딱한 말에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하는 디트리히.
참고로 바덴하임이 편성한 용병대 1개 조의 병력은 정확히 1백 명.
즉, 디트리히 혼자서 2천 명에 달하는 바덴하임의 병력을 쓸어버렸다는 얘기였다.
한 사람의 인간이 수천 명에 달하는 적을 홀로 상대해 모조리 쓰러뜨리는 그 전율적인 광경에, 에리히를 비롯한 바덴하임 군의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 큰 상처는 입지 않았더라도, 분명 체력은 떨어졌을 터.”
“...!”
휘이잉-
손에 쥔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에리히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한다.
위대한 무인(武人)이자 같은 기사의 길을 걸어가는 선배에 대한 존경과 예우의 태도를 완전히 걷어낸 그가 차갑게 일갈한다.
“각하가 오랫동안 지켜온 왕국제일검의 칭호... 여기서 이 에리히가 넘겨받겠습니다.”
말이 마침과 동시에,
“하아아아앗!!!”
검을 치켜들고 순식간에 육박해 들어오는 에리히.
그런 상대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디트리히는 생각했다.
‘... 이거, 어쩌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겠군.’
하지만,
“어디, 할 수 있다면 해보시게!”
이십여 년간 지켜온 왕국제일검의 칭호를 쉽게 넘겨줄 수야 없는 법.
“하아아아!!!”
곧, 지축을 뒤흔드는 위대한 검호(劍豪) 두 사람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콰아아아아아앙!!!
***
다시 현재,
왕도 카를리온 북동부,
국왕파 진영의 지휘 막사_
“... 어디 보자.”
지금 내 손에 들린 것은 다닐렌츠 정보부의 정보력을 총동원해 만들어진 그 날의 전투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에 나의 장인어른,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마지막이 담겨 있었다.
무려 2천 명에 달하는 적의 용병대를 쓰러뜨린 후, 적장인 에리히와 일기토를 벌이게 된 장인어른.
놀랍게도, 장인어른은 정상이 아닌 몸 상태 임에도 불구하고 에리히와 막상막하의 대결을 펼쳤다.
“이게 말이 되나...”
히든 피스의 영향으로 체력의 부담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나와 달리 장인어른은 2천 명이나 되는 적을 쓰러뜨린 후 어마어마한 체력적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인어른은 그 에리히 프라이슬러와 박빙의 승부를 겨뤘다.
단순히 정신력이 강하다는 설명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결과였다.
“... ‘바이펠베르크 백작은 에리히의 공격에 여러 치명상을 입었으나, 마지막 순간 결정적인 공격으로 에리히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었다’, 흐음...”
보고서에 쓰인 몇 줄의 설명만으로도 나는 그 순간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다.
장인어른과 수십 차례 검을 겨룬 경험이 있는 나이기에 떠올릴 수 있는 그 광경.
“장인어른의 반격기... 정말 무섭지.”
나 역시도 몇 번이나 그 반격기에 당해 가슴을 꿰뚫릴 뻔했던 경험이 있었다.
물론, 그때마다 장인어른이 힘을 빼셨기 때문에 난 가슴에 검이 틀어박히는 비극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에리히에겐 그런 자비를 베풀 이유가 없으니...”
내가 궁금한 것은, 대체 가슴에 검이 박힌 에리히가 어떻게 장인어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냐는 거였다.
그런 나의 의문을 풀어줄 답이, 바로 그 아랫줄에 적혀 있었다.
“... 바이펠베르크 백작의 검이 에리히의 가슴을 파고들던 순간, 마주 뻗어낸 에리히의 검이 백작의 목에 틀어박혔다... 라...”
이른바 ‘반격기에 대한 반격’이 들어가 버린 상황이었던 것.
목에 검을 찔린 장인어른과 가슴을 찔린 에리히.
그 둘 중 누가 더 치명상이었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살아서 왕도 카를리온으로 향한 에리히의 존재 자체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되어주고 있었으니까.
“... 에리히 놈, 심장을 찔리지 않은 모양이군.”
나의 예측대로, 에리히는 심장을 꿰뚫리지 않았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만약 그대로 심장을 찔렸다면 아무리 값비싼 힐링 포션을 수십 병 쏟아부었다고 해도 결코 살아나지 못했을 터였다.
“...”
꾸깃-
내 손에 들린 전투 보고서가 천천히 구겨진다.
으직-
구겨지다 못해 조금씩 비틀리고 찢어지기 시작하는 보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보고서는 처음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후우...”
장인어른의 최후를 확인한 뒤, 가슴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겨우겨우 달랜 내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 차라리 장인어른과의 대결에서 죽는 게 나았으리라, 그렇게 믿게 만들어 주마.”
***
이틀 후,
왕도 카를리온 외곽의 평야 지대_
“... 많기도 하군.”
어디서 본 듯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왕도 카를리온의 두꺼운 성벽 아래 집결한 수많은 병력들.
각양각색의 문장기(文章旗)를 휘날리며 세를 과시하고 있는 그들은 새로이 바덴하임 백작에게 줄을 댄 귀족들의 병력이었다.
“대체 언제 저렇게 모여든... 아니, 그보단 아직도 저렇게 하루살이처럼 몰려들 이들이 남아있다는 게 놀랍군요.”
예상치 못한 병력의 출현을 목격한 사자기사단장 빌헬름 리벤트로프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권력에 기생하는 불나방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법 아니겠습니까.”
“하긴, 그도 그렇군요.”
“저놈들은 우리 국왕파와 대공파와 서로 싸워 상잔(相殘)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바덴하임 백작이 그 틈을 노려 영리하게 권력을 탈취했다고 믿을 거고요. 거기에 더해 에리히가 새로운 ‘왕국제일검’의 자리에 올랐으니... 왕국 권력의 추가 바덴하임 백작에게로 기울었으리라 오판했을 겁니다.”
“음...”
“저놈들은 우리가 베겐스바흐 대공을 어떻게 무너뜨렸는지, 그 과정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헐레벌떡 달려온 멍청이들인 셈이지요.”
“그럼, 지금 적잖이 당황했겠군요. 우리를 보고.”
“그럴 테지요.”
내 말처럼 성벽 아래 모여든 이들은상상 이상으로 잘 갖춰진 우리의 군세를 보고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아마도 저들은 우리가 대공파와의 전투로 만신창이가 된 모습을 상상했겠지.
하지만 그 예상은 완벽히 빗나갔고, 이제 저들은 잘못된 판단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선봉은 사자기사단에게 맡기겠습니다. 가서, 저 멍청한 놈들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돌아오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나의 말에 힘차게 대답하며 뒤쪽으로 돌아서는 사자기사단장 빌헬름.
“사자기사단! 출진이다! 무기를 들어라아아아!!!”
“하!!!”
곧 그의 힘찬 출진 명령과 함께 왕국의 명운(命運)을 건 최후의 결전, ‘카를리온 공성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