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결전 (4)
“아아아악!”
콰앙! 콰아앙!
집채만 한 군마(軍馬)와 정면으로 충돌한 병사 하나가 말발굽에 짓밟히며 비명을 질렀다.
전장의 군마란 인간의 나약한 육신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힘과 덩치를 지닌 동물.
하여, 군마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전술 무기가 된다.
콰콰콰! 콰직!
말발굽에 짓이겨진 병사의 머리가 허연 뼛조각과 핏물을 토해낸다.
한두 명만 그렇게 당한 것이 아니다.
기사가 돌진하는 길에 놓인 모두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처참하게 뭉개진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거창!!! 대(對) 기병진을 펼쳐라!!!”
속절없이 돌파당하는 병사의 모습에 당황한 적의 지휘관 하나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은 피에 굶주린 사자들의 이목만 끌었을 뿐이다.
“건방지게 소리치는 걸 보니 제법 지위가 높은 놈인가 보구나, 흐랴아!!!”
히이이이이잉!!!
맹수들을 이끄는 우두머리, 사자기사단장 빌헬름 리벤트로프가 말머리를 돌려 방금 목소리를 높인 적 지휘관을 향해 돌격한다.
“어어어?! 으어, 막아! 막으라고!!!”
자신이 사자의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한 적 지휘관은 혼비백산하여 주변의 병사들의 등을 떠밀었으나...
“어딜 도망가느냐!!!”
슈웅! 푸확! 촤아악!!!
환상처럼 공간을 가르며 날아든 빌헬름의 검이 순식간에 병사 서넛의 머리통을 날려버린 후 도망치는 적 지휘관의 등판에 닿았다.
푸우욱- 촤악!
빌헬름의 검은 마치 잘 익은 과일을 찌르듯 아무런 저항 없이 상대의 등을 파고들었다가 빠져나왔다.
“끄아아악!!!”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비명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지는 적 지휘관.
뒤이어,
콰직! 콰콰콱!
빌헬름의 군마가 바닥에 쓰러진 적의 몸통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굳이 말에서 내려 확인해볼 것도 없는, 즉사였다.
“멈추지 말고 몰아쳐라!!! 조국을 배신한 자들에게 어떤 최후가 기다리고 있는지, 사자의 검으로 똑똑히 알려주어라!!!”
“하!!!”
적의 피를 뒤집어쓴 빌헬름의 명령에 짧은 외침으로 답하는 사자기사단.
그 이후로도 피에 굶주린 맹수들의 사냥은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나약한 적들의 주검이 성벽 아래 그득히 쌓일 때까지.
***
같은 시각, 카를리온 성벽 위_
“이건 뭐... 상대가 되질 않는군.”
성벽 아래 펼쳐진 광경을 지켜보던 바덴하임 군의 총사령관, 에리히 프라이슬러의 짧은 평가였다.
바덴하임 군이 전(前) 왕실근위대장이자 ‘왕국제일검’이라 불렸던 당대 최강의 기사 바이펠베르크 백작을 쓰러뜨리고 왕도를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온 불나방들.
그 불나방들이, ‘국왕의 검’이라 불리는 왕실친위대 사자기사단의 맹렬한 돌격 아래 힘없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에리히의 얼굴에선 한 줌의 아쉬움도, 걱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들과는 하등 상관없는 이들의 죽음을 보는 듯한 모습.
그 눈빛에서 느껴지는 냉정함에 주변의 공기마저 얼어붙는 듯했다.
“하긴 몰려든 놈들 자체가 어중이떠중이들 뿐이었으니...”
그의 말처럼, 친(親) 바덴하임을 표방하며 카를리온 성벽 아래 모여든 세력들은 대부분이 볼품없는 배경을 지닌 이들뿐이었다.
왕실로부터 귀족의 작위를 받지 못한, 혹은 있어봤자 다 말아먹고 입에 풀칠할 정도의 밭 몇 뙈기만을 지닌 자들.
혹은 그마저도 다 까먹고 가문의 옛 허명에만 집착하는 이들.
방랑기사, 용병, 혹은 도적이나 탈영병처럼 신분 세탁이 필요한 자들.
애초에 그런 이들이기에 인생 역전을 노리고 이 위험한 전장에 몰려든 것이겠지.
“사자기사단의 검이 상상 이상으로 매섭군요. 옛 명성을 이어가기엔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아하니 과연 왕실친위대답습니다.”
에리히의 곁에 있던 바덴하임 군의 기사 하나가 상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에리히가 사자기사단 출신이라는 건 이미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애초에 ‘바덴하임의 사자’라는 칭호 자체가 사자기사단 출신이라는 그의 이력에 기대어 만들어진 것이었으니.
“맞는 말이다. 리벤트로프 경의 개인적 무용이야 흠잡을 데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는데, 후배들을 가르치는 것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모양이군. 제법이야.”
“엇, 사자기사단장에 대해 잘 아십니까?”
기사가 살짝 놀란 기색으로 묻자 에리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다마다. 내가 사자기사단에 있을 때 함께 복무했던 후배다.”
“아...”
“당시 사자기사단에 원체 탁월한 재능을 지닌 녀석들이 많아서 그게 눈에 띄는 친구는 아니었지. 하지만... 늘 성실하고, 꾀부리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인 녀석이었어. 결국, 저렇게 사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었군.”
짧게나마 젊은 날의 추억을 떠올린 에리히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가 금세 지워냈다.
이곳은 잠깐의 실수로 생(生)과 사(死)가 갈리는 전장.
옛 추억에 잠겨 있기엔 너무나 위험한 곳이었다.
“성벽 바깥 놈들의 죽음에 우리 병사들이 동요하지 않게 잘 챙기도록. 그리고 국왕파 놈들의 성벽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활을 쏘아 밀어내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특이사항이 발생하면 지체하지 말고 곧바로 보고해라. 알았나?”
“옙, 명심하겠습니다.”
***
국왕파 지휘 막사_
“각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카를리온 성벽 앞에 모여 있던 친(親) 바덴하임 세력들을 격퇴하고 돌아온 사자기사단장 빌헬름이 내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리벤트로프 경.”
“아닙니다, 각하.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파와의 내전을 겪으며 더할 나위 없이 끈끈해진 우리 사이를 증명하듯 빌헬름은 한참 나이 어린 나에게 고개 숙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내가 백작이 되면서 작위 상으로도 윗줄이 되었지만, 그걸 제외하고도 빌헬름이 한 명의 기사로서 나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모습이었다.
“일단 앉으시지요, 리벤트로프 경.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나의 물음에 빌헬름을 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그런 잡졸들 따위, 몇만 명이 몰려 있어도 터럭 하나 다칠 일이 없습니다.”
“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전투 중 특이사항은 없었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혹 전황이 안 좋아지면 도시 안쪽에서 증원군을 투입하지 않을까 싶어 계속 의식하며 싸웠는데, 그런 움직임은 보이질 않더군요. 애초부터 성 밖의 인원들은 버리는 패로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흐음...”
빌헬름의 말을 들은 나는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대충, 놈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
“이 새끼들 버티기네.”
“...?”
툭 하고 옆에서 튀어나온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려 방금 말을 꺼낸 사람을 바라보았다.
나에게 있어 스승이자 형제,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사람, 바로 겔베르트였다.
“버티기? 그게 무슨 뜻입니까, 로이터 경?”
“아, 예. 그럼 제가 설명을... 어, 괜찮겠습니까, 영주님?”
발언권을 구하는 겔베르트에게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허락해주었다.
“크흠! 제가 알기로, 왕도 카를리온의 성벽은 이름 좀 알려졌다 싶은 왕국의 모든 건축자들을 한데 끌어모아서 만들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그렇죠.”
“처음 성벽을 만들 때도 그랬고, 이후 8백 년의 세월동안 증축을 거듭할 때도 그랬다고 들었습니다. 하여간, 더럽게 튼튼하고, 무진장 두꺼운 벽이란 얘기죠. 그런 성벽 안쪽에, 에리히 정도 되는 장수가 기대 마음먹고 주저앉아 버티기 시작한다면, 그 어느 누가 쉽게 성을 떨어뜨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로이터 경의 생각엔 에리히가 농성(籠城)을 택할 것이다?”
“예, 그렇습니다.”
겔베르트가 내어놓은 시나리오를 들은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한데, 굳이 에리히가 그럴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러게. 성안에 주둔한 바덴하임의 병력도 충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니, 일리가 있는 소리다.”
“...!”
겔베르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얹었다.
“하얀 산맥 너머 베겐스바흐에 본(本)을 두고 있던 대공과 달리 바덴하임은 거리상으로 훨씬 가까우니 비교적 빠르게 병력 충원이 가능하다. 거기에 바덴하임의 막강한 경제력까지 생각하면...”
나의 말을 들은 겔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첨언한다.
“놈들이라면, 단시일 내에 대군을 휘몰아 전장에 투입하는 것이 가능할 겁니다. 영주성에 황금을 쌓아놓고 산다는 말을 듣는 놈들이니까요.”
“거기에 더해, 왕도 카를리온은 명색이 왕국의 심장부라 불리는 도시다. 비축된 식량과 식수, 그 외 자원들이 아주 풍부하지. 버티려고 들면, 몇 년이고 버틸 수 있을 거다.”
“아니, 대체 뭘 얻기 위해 그렇게 버티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누군가의 외침에,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얻는 게 뭐냐고? 바로, 왕실의 위엄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거다.”
“...!”
“이미 베겐스바흐 대공이 벌인 난(亂)으로 왕실은 그 정통성에 큰 타격을 입은 상태다. 겨우겨우 대공을 잡아 그 혼란을 진정시켰더니, 이번엔 왕국 남부의 대귀족이 또다시 반역의 기치를 들었다. 이걸 본 왕국의 신민들이 어떤 생각을 할까?”
“...”
“반역자 놈들을 욕하며 펠린느 왕가가 잃어버린 왕실의 위엄을 되찾고 다시금 강력한 왕권을 갖기를 바랄까? 아니, 절대 그렇지 않을 거다.”
아주 냉정한 목소리로 이야기의 결론을 내린 내가 좌중을 돌아보며 설명을 이어나간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전쟁이 길어져 6개월, 1년까지 간다면? 그때도 지금과 같은 마음일까?”
“...!”
“평범한 왕국의 백성들은 누가 이기든 그저 전쟁이 빠르게 끝나기만을 바랄 것이다. 조국에 대한 충성? 왕실에 대한 신의? 그들은 우리가 내세우는 으리으리한 명분 따위엔 관심이 없다. 자신과 가족들의 안위가 더 중요하니까.”
“아...”
이제야 내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가 간다는 표정이 된 사람들.
나는 조금 가라앉은 말투로 하던 말을 마무리 지었다.
“에리히와 바덴하임이 바라는 것은 이 전쟁을 길게 끌고 감으로서 현 왕실이 무능하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거다. 빼앗긴 왕도조차 되찾지 못하고 왕국의 외곽을 떠도는 어린 국왕, 멋 모르는 백성들의 시선엔 무기력하고 겁쟁이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 세상에.”
“왕국 내에 그런 분위기, 그런 공감대가 생겨난다면 앞장서서 바덴하임 백작 세력과 화친을 주장하는 이들이 나올 것이다. 돌아가는 판을 읽을 능력이 되지 않아 섣부르게 달려왔다가 방금 사자기사단에게 도륙당한 멍청이들과는 애초부터 다른, 진짜 권력자들이 나서는 것이지. 바덴하임 백작은, 그 순간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흔들리는 왕국을 쪼개어 자신이 가장 큰 조각의 주인이 될 기회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