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91화 (190/197)

최후의 결전 (5)

지휘 막사 내부에 숨 막히는 침묵이 내려앉는다.

바덴하임 백작이 왕국을 분열시킬 심산이란 나의 예상을 듣고 모두가 심각해진 탓이다.

잠시의 침묵이 지나간 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격한 음성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세상에, 아무리 바덴하임 백작이 야욕이 있는 인물이라고 하나 왕국을 토막 낼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니야, 백작 각하 말씀이 일리가 있어.”

“그럼, 그럼! 바덴하임 백작, 그 노물(老物)이라면 그런 생각을 하고도 남지!”

“그, 그 정도입니까? 바덴하임 백작이라는 인물이?”

“나도 일전에 왕도에서 열린 행사에서 한번 스쳐 가듯 본 것이 다였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인물이야.”

“아마 바덴하임 백작이라면 그보다 더한 짓도 저지를 수 있을걸?”

“더한 짓이라면...”

“뭐어, 제국 이교도 놈들을 끌어들인다거나...”

“미친?!”

“그,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난단 말입니까? 이교도 놈들을 끌어들인다고요?!”

“설마...”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무서운 가정에 모두가 충격에 빠진다.

제국 이교도는 왕국 내에선 악마(惡魔)와 같은 취급을 받는 이름.

바덴하임 백작이 그런 놈들과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말에 모두가 경악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설마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바덴하임 백작의 근본(根本)이 무엇인가?”

“근본이라고 하시면...”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단 한 사람, 겔베르트만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나의 질문에 맞는 답을 꺼내놓았다.

“뭐, 그 노인네야 뼛속까지 돈에 환장한 장사꾼 아닙니까.”

“...!?”

겔베르트가 꺼내놓은 지나치게 솔직한 표현에 지휘 막사의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하지만 나는 겔베르트를 나무라는 대신 그 말에 공감한다는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래, 로이터 경의 말대로다. 바덴하임 백작... 헤르만 바이츠제커는 장사꾼이지.”

“...!?”

“그리고 장사꾼은,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그게 뭐든지 일단 저지르고 보는 족속들이다. 조국에 대한 사랑, 왕실에 대한 충성심, 이런 건 그들의 삶에 별로 중요한 기준이 아니지.”

“그래서, 각하께선 바덴하임이 제국을 끌어들일 것이라 보시는 겁니까?”

“상황이 어려워진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헤르만 바이츠제커는 충분히 그런 선택을 하고도 남을 인물이다.”

“허어...”

이 자리에 모인 사람 중 어느 누구도 나의 말을 과한 걱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간 제국의 위협을 막아주었던 왕국의 방파제, 베겐스바흐 대공국이 수장을 잃고 혼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대륙 북부의 야만족 바인야르가 어지러운 왕국의 정세를 눈치채고 군사 도발을 감행해온 상황.

이 와중에 제국마저 국경을 넘어 진군해온다면 얼마나 큰 비극이 벌어질 것인가.

마치 그림으로 그려낸 듯 눈앞에 훤히 펼쳐져 보이는 끔찍한 미래에 모두가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바덴하임 측의 요구에 질질 끌려다닐 수밖에 없게 되겠지. 그게 뭐가 되었건, 적어도 야만족과 제국의 동시 침공을 받아 왕국이 멸망하는 최악의 상황보다는 나을 테니까 말이야.”

“...”

나의 말을 들은 지휘 막사의 모두가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고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상상조차 하기 힘든 끔찍한 가정이었지만,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불편한 침묵을 깨뜨린 것은, 아주 의외의 인물.

바로, 엔리케였다.

“에이, 막사 분위기가 왜 이럽니까?”

“?!”

“아직 아무것도 일어난 일이 없는데 벌써부터 죽상들을 해가지고... 지휘관들이 이러면 밑에 병사들이 싸울 힘이 나겠습니까? 예?”

지금껏 지휘 막사 내부에서 이렇게까지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었던 엔리케다.

애초에 여기가 푸른 방패 용병대 출신들끼리 모여있는 것도 아니고, 엔리케 그 자신보다 실력과 경륜,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득시글거리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해서 뭐라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꾹꾹 참고 있었는데, 이번만큼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미 해답이 나온 문제 가지고 이렇게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영주님?”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지휘 막사의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뜨린 엔리케가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해답이라...”

엔리케의 이글거리는 그 눈빛을 바라보다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내 시선이 옮겨간 그곳엔 비슷한 눈빛을 한 채로 나를 바라보는 겔베르트가 있었다.

꼭 닮은 두 사람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역시 내 마음 알아주는 건 우리 푸른 방패 출신들뿐이지.’

꽤 유쾌해진 기분으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엔리케... 아니, 아르미엔토 경의 말이 맞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이렇게 고민할 필요가 뭐가 있겠나.”

드르륵, 앉아 있던 의자를 뒤로 밀쳐내며 벌떡 일어난 내가 번쩍이는 눈빛으로 좌중을 훑어보았다.

앞서 겔베르트와 엔리케가 보여준 것과 아주 닮아 있는, 자신감 넘치는 눈빛이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이건 어려울 것이 없는 문제다. 놈들이 원하는 게 저 성벽 너머에서 웅크리고 버티며 시간을 끄는 것이라면, 그것을 하지 못하게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

“며칠 안으로 다닐렌츠에서 공성 무기 기술자들이 도착할 것이다. 그들이 도착해 공성 무기의 제작과 설치가 끝나는 대로, 전력을 다해 성을 깨뜨린다. 그리고 그 선두엔...”

후우, 가볍게 한숨을 내쉰 내가 모두에게 선언했다.

“... 내가 설 것이다. 공성 개시 일주일 안에, 카를리온을 되찾을 것이다.”

***

그로부터 며칠 후.

푸른 하늘에 구름 한 점이 없이 맑은 날이었다.

“정오 즈음이면 공성탑의 조립이 완성될 것 같습니다. 공성추는 이미 전선 투입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음, 그래. 마지막까지 집중해서 작업을 마무리하도록 전해라.”

“옙, 각하!”

공성 무기 준비 진척상황을 보고를 끝낸 장교가 돌아간 후, 나는 멀리 보이는 카를리온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 싸우기 딱 좋은 날이군.”

뭔가 심상치 않은 우리 측의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성벽 위의 바덴하임 군도 바쁘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화살... 끓는 기름... 바윗돌... 뭐, 정석적인 준비군.”

히든 피스 능력의 흡수로 인간의 한계를 한껏 초월한 나의 시야에 성벽 위 바덴하임 군 병사들의 모습이 세밀하게 보였다.

“저건... 기름 주머니? 저게 카를리온 안에 저렇게 많았나?”

기름 주머니는 말 그대로 기름을 가득 채워 던지는 주머니로, 성벽에 접근하는 공성탑과 공성추에 집어던져 불을 붙이기 위한 용도로 쓰인다.

전쟁에서 수성(守城)을 준비하는 측에겐 필수적인 물품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바로 그 기름 주머니가 카를리온 성벽 곳곳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 측 공성 무기들이 접근하면, 손 닿는 곳에 놓여 있는 저 기름 주머니를 성벽 위의 병사들이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지겠지.

“하긴, 명색이 왕국의 심장부라 불리는 도시인데 저 정도 전쟁 물자 비축은 당연한 건가.”

그렇게 이곳저곳 자리를 옮겨가며 멀찍이서 적의 전투 준비 상황을 살피고 있는데...

“각하! 각하!”

“...?”

장교 한 명이 뒤쪽에서 달려와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이냐?”

“적입니다! 바덴하임의 깃발을 내건 일단의 병력이 우리 진영 후방에 나타났습니다!”

“적의 규모는?”

“대략 3천 정도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적의 규모가 3천이라.

“... 뭐, 적당하군.”

본격적인 공성을 앞두고 ‘몸풀기’에 적당한 놈들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나는 두려움 없이 미소 지었다.

***

“사령관님, 본령에서 보낸 증원군이 적들의 후방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증원군이라...”

밝은 얼굴로 달려와 증원군의 도착을 알리는 부하의 모습을 확인한 바덴하임 군의 사령관, 에리히 프라이슬러가 잠시 생각에 잠긴다.

‘... 아주 적절한 때에 도착했군.’

에리히의 주군인 바덴하임 백작, 헤르만 바이츠제커는 이번 일에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걸었다.

실패한다면 그 자신의 목숨을 물론이고 수백 년간 왕국 남부의 패자(霸者)로 군림해온 바이츠제커 가문 자체가 멸문지화의 비극을 피할 수 없는 상황.

그런 만큼, 전쟁을 대하는 바덴하임 백작의 태도는 전에 없이 적극적이고 과감했다.

방금 바덴하임 본령(本領)에서 도착했다는 증원군만 해도 그러했다.

“증원군 규모는?”

“3천 정도로 파악됩니다.”

“3천이라...”

적 후방에 나타난 증원군 3천.

그 정도 군세라면, 충분히 성문을 열고 병력을 내어 호응할 정도의 규모였다.

“지휘관들을 소집해라. 증원군과 적의 교전이 시작되면, 적당한 때에 성문을 열고 나가 앞뒤로 놈들을 압박할 것이다.”

“예, 사령관님!”

명령을 받은 장교가 지휘관들을 소집하기 위해 부리나케 방을 빠져나갔다.

“... 놈들의 공성 무기 정도만 태워버려도 족히 일주일 정도의 시간은 벌 수 있겠지.”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여러 가지 전술들을 차분하게 정리하며, 에리히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멈춰라! 나는 바덴하임의...”

푸화아아악!!!

증원군을 이끌고 우리 군 진영의 후방을 습격했던 바덴하임의 기사는 이름조차 채 말하기 전에 두 조각이 나며 말 아래로 떨어졌다.

나의 독문무기인 도끼창 낙뢰(落雷)가 그 이름처럼 순식간의 적의 머리통 위로 내리꽂힌 탓이다.

휘잉- 콰악! 콰지직!

상대가 두 토막 나며 말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확인하기도 전에 말을 달려 돌진한 나는 연달아 서너 명의 적병을 도륙한 뒤 말고삐를 잡았다.

나를 중심으로 둥글게 형성된 공간.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적들의 모습을 나는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내가 바로 다닐렌츠 백작, 데미언 카릴베르크다! 누가 감히 나에게 맞서겠느냐!!!”

나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스스로의 정체를 밝혔다.

국왕파의 총사령관인 나의 신분을 고려하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행동.

하지만 내가 지닌 압도적인 무력이 그 위험천만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으으으! 죽어라, 이 새끼야!!!”

“다 똑같은 사람이야! 백작도 칼 맞으면 죽는다고!”

“어디 이것도 막을 수 있나 보자! 흐아아아아!!!”

내 정체를 확인한 후 몇몇 전공(戰功)에 눈먼 이들이 이를 악물며 달려들었지만,

콰직! 콰아악! 으직- 푸화악!

결과는 같았다.

적진의 그 누구도, 내가 펼쳐내는 단 한 번의 공격을 받아내지 못했다.

대부분은 나의 공격에 반응조차 못했고, 반응을 해봤자 무기와 함께 머리통이 쪼개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역겨운 반역자 놈들이 죽을 자리를 찾아왔구나! 소원대로 모조리 죽여주마!!!”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잔혹하게 적들을 사냥했다.

놈들의 기세를 꺾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최대한 빨리 이곳의 전투를 마무리 짓고 아군 진영으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증원군과의 전투가 시작되면, 에리히는 분명 협공을 위해 성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올 거다.’

그리고 그런 에리히의 첫 번째 목표는 우리 군이 준비한 공성 무기들일 터.

며칠 동안 공들여 준비한 그 공성 무기들을 잃는다면, 우리는 또다시 적들에게 시간적 여유를 주게 될 것이다.

“...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키히이이이이잉!!!

나와 생각이 통한 것일까?

나를 등위에 태우고 달리던 블리츠가 호쾌한 울음을 터트리며 속도를 더욱 높였다.

순간적으로 주변의 시야가 흐릿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낙뢰를 높이 치켜들었다.

휘우우우우웅- 콰직!

하늘 높이 치솟았던 죽음이, 반역자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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