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92화 (191/197)

최후의 결전 (6)

“성문을 열어라.”

나직한 목소리로 명령을 전하는 바덴하임 군사령관, 에리히 프라이슬러.

곧, 그가 타고 있는 군마와 반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옆에 서 있던 기사 한 명이 우렁찬 목소리로 상관의 명령을 전파한다.

“성문을 열어라아아아아아아!!!”

쿠쿵! 끼이이이이이이-

왕도 카를리온으로의 출입을 가로막고 있던 육중한 성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공성추로 한참을 후려쳐도 굳건히 버틸 수 있을 정도의 두께와 강도를 지닌 성문.

그 무게 역시 상상 이상으로 무거웠기에 열리는 속도가 무척이나 더뎠다.

끼이이이이- 쿠구궁!

처음 문이 열리기 시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둔중한 소음과 함께 멈춰선 성문.

훤히 열린 공간 너머에 왕도 카를리온을 포위 중인 국왕파의 진영이 보였다.

에리히의 입에서 다시 한번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전군, 진격하라.”

“진격하라아아아아아아아아!”

“하!!!”

두두두두두두두두두!!!

***

같은 시각, 국왕파 진영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국왕파의 최대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다닐렌츠 백작 데미언 카릴베르크가 진영 후방에 나타난 바덴하임 증원군을 요격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상황.

그는 전투에 나서며 진영에 남아 있는 아군 지휘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진영 후방에서 증원군과의 전투가 시작되면, 에리히는 분명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겁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온 에리히의 최우선 목표는 우리가 준비한 공성 무기들이겠죠.”

“화공에 대비하여 공성 무기에 물에 적신 천을 넉넉히 둘러두시고, 성문의 움직임을 감시하십시오.”

“에리히를 상대로 싸우려 하지 마십시오. 그는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합니다.”

“저는 후방의 적들을 처리하고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만 버텨주십시오.”

이상의 지시를 남기고, 그는 국왕파의 진영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문이 열립니다!!!”

“바덴하임 군이 보입니다! 기병 다수! 전방에 사령관 에리히 프라이슬러의 깃발이 확인됐습니다!!!”

“그래, 알았다.”

다급한 목소리로 적의 출현을 알리는 정탐병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자기사단장 빌헬름 리벤트로프가 자신의 말 위에 올랐다.

“리벤트로프 경! 함께 가시지요!”

“음, 좋습니다.”

그런 그의 곁으로 따라붙는 다닐렌츠의 기사, 에르발트 베링.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百戰)의 용사들인 두 사람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처음으로 전투에 나선 신참 병사처럼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후우...”

마음속 긴장을 조금이라도 털어내려 깊은 한숨을 내쉬어 보는 빌헬름.

그 어떤 상대 앞에서도 자신감이 넘쳤던 당대 사자들의 우두머리가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 에리히 선배.’

멀리 보이는 적의 문장기를 확인한 빌헬름이 마른 침을 삼킨다.

오늘 그가 상대해야 할 적은 다름 아닌 같은 사자기사단 출신의 전설적인 기사 에리히 프라이슬러.

유구한 사자기사단의 역사 안에서도 최고의 천재라 불렸던 사내였다.

더욱이...

‘함께 기사단에 있던 시절, 단 한 번도 에리히 선배의 검을 넘어선 적이 없었다.’

사자기사단이 어떤 곳인가.

왕국 내 난다긴다하는 무(武)의 재능들이 모두 모이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조차 에리히는 감히 비교를 불허하는 독보적인 사내였다.

동시대에 사자의 문장을 달았던 동료, 선후배들은 물론 역대 가장 위대한 사자들이라 불렸던 까마득한 선배 기사들까지 모두 소환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재능.

그의 후배였던 빌헬름은 그런 에리히를 동경했고, 언제나 본받고자 했다.

선배였던 에리히는 그런 빌헬름을 좋게 보았고, 언제나 가르침을 구하는 후배에게 흔쾌하게 도움을 주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왕국 내에 검을 든 자라면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의 거물이 된 두 사람.

허나 과거의 동료였던 두 사람은 이제 적이 되어 서로에게 검을 겨누게 되었다.

“적의 공성 무기를 파괴하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목표다. 자, 가자!”

“하!!!”

백작령 바덴하임을 대표하는 최강의 검, 황금방패 기사단을 이끌고 돌격해 들어오는 에리히 프라이슬러.

“무슨 일이 있어도 공성 무기를 지켜야 한다! 죽을 힘을 다해 적들의 공격을 막아라!”

“알겠습니다!!!”

촤촤촤촤촹!!!

일사불란하게 검을 뽑아 들며 점점 가까워지는 적을 응시하는 사자기사단의 수장 빌헬름 리벤트로프.

비극적인 운명이 갈라놓은 두 사람의 격돌이 지금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퇴, 퇴각! 퇴각하라아아아아!!!”

투구는 어디다 떨구었는지, 흙먼지가 묻어 산발한 머리로 연신 소리를 지르는 한 기사.

자세히 살펴보니 전장에 나온 이가 당연히 들고 있어야 할 무기조차 보이지 않는 맨손이었고, 입고 있는 가죽 갑옷은 엉망으로 찢어져 이미 갑옷의 기능을 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빨리 튀어! 빨리!!!”

“으아아아아!!!”

“아, 악마다! 저건 악마야!!!”

“같이 가 이 새끼야, 같이 가자고오오오!!!”

그와 동시에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전장을 이탈하는 병사들.

그들 모두가 방금까진 세상 당당하게 기세를 올리며 쳐들어왔던 다닐렌츠의 증원군이었다.

“감히, 어딜 도망가느냐!!!”

휘우우우우웅-

그런 그들의 등 뒤로 밀어닥친 사신(死神)의 손짓.

잿빛의 커다란 도끼창이 만들어낸 돌풍이 허겁지겁 도망치는 적들의 후방을 집어삼킨다.

그리고,

콰지직! 푸확! 퍼퍼퍼퍼퍽!!!

어떤 이는 몸이 두 조각으로 갈라지고, 어떤 이는 머리통이 터졌으며, 어떤 이는 몸이 과하게 익은 과일처럼 으깨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도끼질 한 번에 대여섯 명의 적들이 한꺼번에 쓸려나가는 무시무시한 모습.

이와 비슷한 광경이 전투 시작 후 지금까지 끝도 없이 반복되었고, 그 연이은 공포는 병사들의 사기를 아귀처럼 갉아 먹었다.

그 결과,

“사령관님, 적들이 물러가고 있습니다! 우리 군의 승리입니다!!!”

“우리가 이겼다아!!!”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국왕파의 진영 후방에 펼쳐진 너른 벌판에서 펼쳐진 바덴하임 증원군과의 전투.

나는 약 3천 명에 이르는 적과 비교해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천여 명의 병력을 지휘해 기적적인 승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기뻐하기는 아직 일렀다.

“긴장을 풀지 마라!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나는 천둥 같은 목소리로 직전의 승리에 취해 있는 아군 병사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방금 우리가 깨부순 놈들은 적의 주력이 아니었다.

바덴하임 군의 진정한 주력은 왕도 카를리온 안에 웅크리고 있었고, 그들을 무너뜨려야만 이 전쟁의 끝을 볼 수 있었다.

“퇴각한 바덴하임의 증원군이 확실하게 전투를 포기하고 물러갔음이 확인되는 대로 우리는 진영으로 돌아간다. 승리를 기뻐하는 것은 그 이후에 할 일이다! 방심하여 경거망동하는 자는 내가 직접 처벌하겠다!”

나의 호통에 깜짝 놀란 몇몇 기사와 병사들이 시선을 내리깔며 움츠러들었다.

여기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직전까지 미친놈처럼 날뛰며 적을 쳐 죽이는 나의 모습을 보았을 터.

적 기사의 목을 베는 일을 땅에 떨어진 도토리 줍듯 하고, 병사 따위는 개미 밟아 죽이듯 하는 인간이 눈을 부릅뜨며 호통을 쳤으니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

“정렬! 정렬해!!! 앞에 선 놈 대가리 보고 확실하게 열 맞추라고 이 새끼들아!!!”

“부상자들은 열외한다! 빨리 밖으로 나왓!!!”

“곧바로 전투에 투입되어야 하니 들고 있는 무기나 갑옷에 문제 있는 새끼는 빨리 손들어! 수량 파악하게!”

“너 이 새끼, 피가 이렇게 나는데... 빨리 빠져! 열외하라고! 지금 뒤질려고 환장했냐?!”

나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잔뜩 독이 오른 휘하 기사들과 백인대장들이 병사들을 닦달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격렬했던 전투의 여파로 흐트러졌던 병사들의 분위기가 빠르게 정돈되기 시작한다.

때맞춰 퇴각한 적들의 움직임을 살펴보기 위해 달려나갔던 척후병들이 속속 복귀하여 보고를 올린다.

“퇴각한 적들은 재결집하는 모습 없이 완전히 와해되어 사방으로 도주 중입니다!”

“적의 지휘관들 대다수가 사망한 탓에 병력에 대한 장악력을 잃은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로선 도주한 적들이 다시 결집해 재공격을 감행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좋다, 모두 수고했다.”

짧은 시간 적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살피고 돌아온 척후병들의 노고를 치하한 후, 나는 곧장 대기 중인 병력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전군, 진영을 향해 회군 한다! 전속 전진!!!”

***

“늙어빠진 사자 새끼들아, 그만 발악하고 목을 내놔라!!!”

“그 입 닥쳐라, 더러운 반역자 놈아!”

“언제적 사자기사단이냐! 어린 국왕 놈이랑 함께 사라져라!!!”

“감히 네깟 놈들이 넘볼 수 있는 왕좌가 아니다! 남부의 무지한 촌놈아!”

카캉! 쉬이잉- 카앙!!!

펠리노어 왕국을 대표하는 최강의 기사단 중 하나인 국왕친위대 사자기사단.

왕국 남부의 패자(霸者)라 불리는 바덴하임 백작령 최강의 검인 황금 방패 기사단.

객관적 전력에서는 사자기사단이 월등히 앞선다지만,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전을 일으킨 베겐스바흐 대공 측과 싸우느라 본래의 전력이 반 이상 깎여나간 상태였다.

이런 와중에 사자기사단 내의 최고수라 할 수 있는 사자기사단장 빌헬름 리벤트로프를 완벽하게 압도하는 실력자, 에리히 프라이슬러까지 가세하니 전투의 양상은 빠르게 공격 측의 우세로 흘러가게 되었다.

카아아앙-!

“커흑!”

상대의 검을 가까스로 받아낸 빌헬름이 신음을 토하며 휘청거린다.

허벅지에 힘을 주고 버텨 간신히 말에서 떨어지는 것만큼은 피했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낙마(落馬)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크흑...!”

울컥, 가슴에서 올라오는 핏물을 억지로 삼키며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는 빌헬름.

덜덜 떨리는 그의 검 끝이 그가 지금 얼마나 좋지 못한 상태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예전보다 훨씬 단단하고 강인해졌구나, 빌헬름. 훌륭한 솜씨다.”

그리고, 빌헬름을 지금의 상황까지 몰아붙인 장본인.

바덴하임 군사령관, 에리히 프라이슬러가 웃음기를 지워낸 얼굴로 재차 입을 열었다.

“하지만, 변함없이 정직하고 순진한 검이다.”

“...!”

“이 에리히를 쓰러뜨리기엔, 여전히 부족하단 얘기지. 흐흡!”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쏟아지는 에리히의 공격.

검이 어찌나 빠른지, 이미 완숙한 상급 기사의 경지에 올라 있는 빌헬름의 눈에도 그 공격의 궤적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다.

“하아아아아!!!”

이대로 순순히 당할 수는 없기에, 빌헬름은 함성을 터트리며 본능대로 검을 움직였다.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다시 몸의 중심으로 검을 휘두르며 정신없이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휘이잉- 카아앙! 촤아아아악!!!

“큭!!!”

끝끝내 잡아내지 못한 에리히의 공격 하나가 빌헬름의 가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상흔을 만들어낸다.

빌헬름의 전신을 단단하게 감싸고 있던 강철제 플레이트 아머의 방어력마저도 뚫어내 버리는 검의 위력.

한차례 불꽃과 굉음이 지나고 난 뒤 훤히 드러난 가슴의 상처에서 댐이 무너지듯 붉은 핏물이 순식간에 쏟아져 내린다.

“큽!”

왼손을 들어 가슴의 상처를 감싼 빌헬름이 이를 악물며 급히 에리히와의 거리를 벌리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지막이다.”

“...!?”

슁- 콰직!!!

“커헉!!!”

어느새 빌헬름의 뒤를 점한 에리히의 검이 그의 등판 한 가운데 틀어박힌다.

“어흐, 으흐윽!”

등쪽에서 느껴지는 극렬한 통증에 몸을 부르르 떨며 고통스러워하는 빌헬름.

그 모습을 지켜본 에리히는 그대로 검을 찔러넣지 않고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빌헬름은 분명 소중한 그의 옛 인연.

하지만 전장에서 만난 이상 사사로운 감정은 묻어두어야 했다.

“... 멋진 싸움이었다, 빌헬름. 잘 가라.”

그렇게, 에리히가 비어 있던 왼손으로 비틀거리는 빌헬름의 어깨를 붙들고 그대로 오른손에 힘을 주어 검을 찔러넣으려는데...

휘웅- 휘웅- 휘웅-!!!

어디선가 들려오는 파공음.

그리고, 감히 경시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에리히의 전신을 위협했다.

“흐읍!!!”

휘웅- 휘웅- 휘웅-!!!

급하게 빌헬름에게서 떨어지며 몸을 뒤로 젖힌 에리히.

찰나의 시간을 두고 그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 날아드는 한 자루 손도끼가 있었다.

“...!”

손도끼에 실린 만만치 않은 기운에 놀란 에리히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엔,

“드디어 만났구나, 에리히 프라이슬러.”

집채만한 잿빛의 도끼창을 든 금발의 기사.

국왕파의 총사령관, 다닐렌츠 백작 데미언 카릴베르크가 신비로운 진녹색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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