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이 터지고 깨져 후방으로 퍼져나가는 에리히의 검.
지난 십여 년간 수천에 달하는 바덴하임의 적들을 격살했던 그 검이 마침내 그 생(生)의 끝을 맞이한다.
검의 마지막 주인, 에리히 프라이슬러의 운명과 함께.
푸화아아아악!!!
잠시나마 새로운 왕국제일검의 칭호를 가졌던 바덴하임의 사자.
왕국을 떨어울린 위대한 기사의 목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왕국제일검(王國第一劍)
지난 20여 년간 펠리노어 왕국 최강의 기사라 불렸던 바이펠베르크 백작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를 꺾고 ‘왕국제일검’의 영광된 칭호를 이어받은 사나이.
‘바덴하임의 사자(獅子)’, 에리히 프라이슬러.
그의 목이 떨어졌다.
바로 나, 다닐렌츠 백작 데미언 카릴베르크의 손에 의해.
“적장이 죽었다!!! 바덴하임의 사자를 잡았다!!!”
에리히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 주변 국왕파의 병사들이 목이 터지도록 소리쳤다.
그들의 행동은 즉각적인 효과를 보았다.
“사, 사... 사령관님?!”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에리히의 죽음을 확인한 바덴하임의 기사들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전투를 중단했다.
“하, 항복! 항복하겠소!!!”
“죽이지 마시오! 난 싸울 생각이 없소!”
“무기를 놓아라! 두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어라!!!”
탱그렁! 탱겅!
병사들은 한술 더 떠 쥐고 있던 창검을 내던지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단 한 사람의 죽음이, 뜨거웠던 전장의 분위기를 단숨에 식혀버린 것이다.
두두두두두두!
“영주님! 영주니이이임!!!”
전의를 상실한 바덴하임 군을 뒤로하고 내게 말을 달려오는 사내.
휘잉- 터턱!
어찌나 다급했는지, 달리던 말에서 냅다 뛰어내린 그가 에리히 프라이슬러를 쓰러뜨린 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던 나의 어깨를 부축해 끌어올렸다.
“영주님, 괜찮으십니까!?”
“후우... 아, 겔베르트?”
“예! 접니다, 영주님!”
나를 바라보는 겔베르트의 눈빛에 걱정이 가득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지금의 나는 겔베르트의 양손에 붙들려 겨우 서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는 흔들렸다.
다행인 것은 내가 흡수한 여러 히든 피스들의 능력 덕분에 빠르게 체력이 회복되고 있다는 점.
조금씩 돌아오는 몸 상태를 느끼며, 나는 전무후무했던 에리히와의 대결을 복기해보았다.
‘정말... 어마어마한 상대였다.’
최후의 순간, 스킬 ‘창조주의 눈’을 통해 확인한 에리히의 레벨은 무려 97.
내 기억에 돌아가신 장인어른과 같은 수치였다.
그 정도의 강적(强敵)을 상대로 전력을 다해 싸웠으니, 지쳐 쓰러질 정도의 몸 상태가 된 것도 이해가 간다.
“영주님, 일어서실 수 있겠습니까?”
“... 어떻게든, 되게 해야겠지? 보는 눈이 저렇게 많으니...”
걱정하는 겔베르트에게 옅은 웃음을 보이며 겨우겨우 몸을 일으킨 나는 어느새 고요해진 전장을 둘러보았다.
한없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국왕파의 병사들.
멍한 눈빛, 패배감에 깃든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바덴하임의 병사들.
그들의 시선을 느끼며, 나는 바닥에 꽂아둔 도끼창 낙뢰의 창대를 손에 쥐었다.
평소엔 깃털처럼 가벼웠던 낙뢰가 ‘억’ 소리가 날 만큼 무겁게 느껴졌다.
“흐으읍!”
하지만, 나를 지켜보는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죽을 힘을 다해 보란 듯이 낙뢰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적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그 죄의 경중을 고려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전장 구석구석까지 내 목소리가 전해지도록 잔뜩 힘을 실어 외쳤기에 팔다리가 다 후들거릴 지경이었지만, 나는 끝까지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더불어, 이 말을 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이 전투, 우리가 승리했다! 펠리노어 왕국 만세!!! 요제프 국왕 폐하, 만세에에에!!!”
***
사실, 우리가 무찌른 적의 병력은 왕도 카를리온을 장악한 전체 바덴하임 군 병력의 3할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3할의 병력에 더해 바덴하임 군의 무력을 상징하는 인물 에리히 프라이슬러를 잡아냈으니, 사실상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늘, 우리는 왕도를 탈환한다.”
“총사령관이었던 에리히를 잃었으니, 왕도 안에 남아있는 바덴하임 군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을 터.”
“단숨에 성벽을 넘어 성문을 열고, 주제넘게 왕도를 차지했던 반역자들의 목을 칠 것이다.”
“선두에는 바로 나, 데미언 카릴베르크가 설 것이다!”
격렬했던 전날 전투의 후유증으로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다른 이들과 달리 히든 피스의 능력으로 완벽하게 몸 상태를 회복한 나는 보란 듯이 전투의 선봉에 서서 병사들을 이끌었다.
“전군, 나를 따르라!!!”
“와아아아아아아!”
내겐 공성탑 같은 으리으리한 공성 무기따윈 필요 없었다.
“백작 각하! 사다리를 걸쳤습니다!”
“오냐, 잘했다!”
그저 병사들이 손으로 붙잡아 성벽에 비스듬히 기댄 사다리 하나면 충분했다.
“하앗!”
타타타타탓!
날 듯이 땅을 박차고 사다리로 뛰어오른 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카를리온 성벽 위로 올라섰다.
“뭐, 뭐냐?!”
“적이다! 적이 성벽 위로 올라왔다!!!”
“찔러! 창으로 찔러서 성벽 아래로 떨어뜨려라!”
성벽 위에 모습을 드러낸 나를 본 바덴하임 병사들이 혼비백산하며 소란을 떨었다.
하지만 혼란한 와중에도 착실하게 들고 있던 창을 내지르며 적을 격살하려 드는 모습이 과연 왕국 남부를 대표하는 강군(强軍)다웠다.
하지만,
터터터터터터텅!
내가 도끼창 낙뢰를 대신해 들고 온 커다란 장검을 벼락같이 휘두르자, 나를 향해 뻗어졌던 적들의 창날이 수수깡처럼 모조리 잘려나갔다.
“으어, 어!?”
“이런 미친!”
졸지에 나무 막대기가 되어버린 창을 붙잡고 허우적거리는 바덴하임의 병사들.
“역도(逆徒)들에게 죽음만이 있을 지어니!!!”
나는 그런 그들에게 마치 양 떼를 습격하는 늑대처럼 달려들어 마음껏 검을 휘둘렀다.
푸확! 콰지직! 휭- 촤아악!!!
사방에 피 안개가 퍼져나가고, 나를 중심으로 빈자리 하나 없을 만큼 빼곡하게 몰려들었던 바덴하임 병사들의 잘려나간 팔다리가 수북이 쌓인다.
“아아악!”
“사, 살려! 살려줘!!!”
“기사! 기사를 불러! 우리로는 무리야!”
“어디냐!”
“여기! 여기요! 살려주십시오!”
눈 깜짝할 새에 수십의 병사들이 도륙당하고, 그들이 흘린 피로 성벽 위가 붉게 물들었다.
그 압도적인 학살을 멈추기 위해 뒤늦게 등장한 바덴하임의 기사 하나가 이름조차 밝힐 여유 없이 다급히 내게 검을 들이밀었다.
“죽어라! 국왕의 개새끼야!”
카캉! 스르릉- 촤앙!
하지만 그가 뻗어낸 검은 허망하리만큼 내게 쉽게 가로막혔다.
“가볍구나.”
전날 상대했던 에리히의 검과 비교하자면 바윗돌과 모래알갱이 무게 만큼의 차이.
가볍게 바덴하임 기사의 검을 걷어낸 나는 훤히 열린 그의 가슴에 발차기를 꽂아 넣었다.
퍼어억! 우드득-!
“으아아아아-!”
내 오른발에 걷어차여 뒤쪽으로 튕겨 나간 기사가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며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어지간한 대도시의 잘 쌓인 성벽들도 감히 명함을 내밀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높이를 자랑하는 왕도 카를리온의 성벽 위에서 가슴뼈가 박살 난 채로 추락했으니, 아마도 살아남기는 힘들겠지.
“누가 나를 막겠느냐! 있다면 어디 나서보아라!”
“으으!”
“사람이 아니야! 괴물이야!”
“도망쳐! 성벽 아래로 내려가라고!”
“으아아아아!”
누구도 나의 검을 막지 못했고, 그 누구의 검도 나에게 닿지 못했다.
나에게 겁도 없이 덤벼드는 적들, 내게 등을 보이며 도망치는 적들.
그들 모두, 나의 검 아래 공평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렇게 맹수처럼 포효하며 성벽 위의 적들을 도륙하기를 한동안.
마침내,
콰아앙- 끼이이이이이이!!!
굳게 닫혀 있던 왕도 카를리온의 성문이 열렸다.
“성문이 열렸다! 돌격하라!”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왕국의 문장기를 높이 치켜든 국왕파의 병사들이 파도처럼 왕도 내부로 쏟아져 들어왔고, 그 후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령관 각하! 바덴하임 군이 항복했습니다! 우리 군의 승리입니다!!!”
나는, 그리고 내가 이끄는 국왕파는 펠리노어 왕국의 심장부라 불리는 천 년의 도시, 왕도(王都) 카를리온을 탈환했다.
***
카를리온 공성전 이후 보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격렬했던 전투의 흔적이 아직 도시 곳곳에 남아있긴 했지만, 전체적인 왕도의 분위기는 과거의 활기를 되찾은 상태.
특히나 도시의 중심부에 자리한 카를리온 왕성은 전쟁의 화마(火魔)에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인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드디어...”
바로 그 카를리온 왕성의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한 소년.
요제프 레나투스 피오 카를 폰 펠린느.
몇 달 전, 왕위를 노린 간악한 숙부의 위협에 도망치듯 왕도를 빠져나가야 했던 펠리노어 왕국의 어린 군주가 마침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
“흐흑! 흐으으윽!”
“폐, 폐하!”
갑작스럽게 눈물을 터트리는 요제프의 모습에 곁에 있던 시종장이 크게 당황하며 그를 달래려 애썼다.
하지만 이 자리의 그 누구도 그런 국왕의 모습을 못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동안 국왕이라는 자리의 무게감에 짓눌려 겉으로 표현하지 못했던 수많은 감정들.
이제 고작 열두 살 소년에 불과한 이가, 반역도들에게 왕도를 빼앗긴 상황에서 국왕으로서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그 감정들을 가슴 속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담아만 두어야 했던 거다.
하지만...
“흑흑! 흐으으윽!”
다시 마주한 카를리온 왕성의 모습에, 요제프는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다.
그 모습을 본 주변의 가신들도 옷 소매로 눈가를 찍으며 끓어오르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애썼다.
“폐하,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 믿음직스러운 음성만으로도 모두의 표정을 밝게 만들어주는 인물이 등장했다.
새로이 ‘왕국제일검’ 칭호의 주인이 된 사나이.
백작령 다닐렌츠의 주인이자 왕실근위대장의 중임을 맡은 인물.
데미언 카릴베르크가, 사자의 갈기 같은 금빛의 머리를 휘날리며 자신의 어린 주군에게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근위대장!”
그를 본 국왕 요제프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아직 눈물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국왕의 모습에, 데미언 역시 마주 미소를 짓다 천천히 바닥에 엎드려 말했다.
“왕국의 신하 된 도리로 응당 도시의 성벽 밖으로 나아가 폐하를 맞이하는 것이 도리이겠으나, 왕성 내의 정리가 아직 끝나지 않아 그 작업을 끝까지 마무리하느라 이리 늦게 되었습니다. 신 카릴베르크 가문의 데미언, 폐하께 엎드려 죄를 청합니다.”
“죄라, 본디 죄(罪)라는 것은 공(功)이 있으면 상쇄될 수 있는 법. 근위대장이 이 왕국과 어리석은 국왕을 위해 이뤄낸 공을 생각한다면 미리 나와 마중하지 못한 일 따위는 소의 몸에서 뽑아낸 터럭 한 가닥 정도에 불과할 것이오.”
“그리 말씀해주시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일어나시오, 근위대장. 아니, 아니지.”
말을 마친 국왕 요제프가 바닥에 엎드려 있던 데미언에게 직접 다가가 손을 잡고 일으킨다.
그 파격적인 행동에 담대하기로 이름 높은 데미언마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인다.
“폐하! 어찌 이런...!”
“근위대장, 아니 다닐렌츠 백작 데미언 카릴베르크.”
“...!”
자신의 직책이 아닌 작위를 부르는 국왕의 태도에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 데미언이 일어서려던 몸을 기울여 다시금 한쪽 무릎을 꿇는다.
“그대는 거듭된 역도(逆徒)들의 난으로 폭풍 앞에 놓인 등불의 신세와도 같던 왕국을 다시 단단한 반석 위에 올려두었다.”
“...!”
“이 땅의 온당한 주인인 왕실의 위엄을 짓밟고 이미 왕국이 제 것이 된 것처럼 위세를 부리던 모든 이들이 그대의 검 앞에 겁먹어 스러지고, 그대의 말발굽 아래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렸다. 그대는 정녕 하늘이 이 왕국을 위해 내린 축복이요, 주신(主神)께서 그의 어린 양들을 위해 준비하신 안배일지니...!”
감정이 끓어오른 듯, 잠시 말을 멈추었던 국왕 요제프가 천천히, 그러나 힘 있는 목소리로 자신의 발언을 마무리한다.
“이에, 본 국왕은 다닐렌츠 백작 데미언 카릴베르크에게 공(公)의 칭호를 작위를 내려 그 끝 모를 용맹과 빛나는 업적을 오랜 시간 칭송하고자 한다.”
“...!”
갑작스러운 국왕의 선언에 깜짝 놀란 데미언이 고개를 들어 자신의 어린 주군을 바라보았다.
그 놀란 눈빛을 바라본 요제프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고.
이번만큼은, 주군으로서 해야 할 일을 멋지게 해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요제프 국왕 폐하 만세! 다닐렌츠 공작 만세!”
“구국의 기사, 다닐렌츠 공작의 이름을 영원토록 칭송하라!!!”
“요제프 국왕 폐하 만세! 다닐렌츠 공작 만세! 펠리노어 왕국 만세에에에!!!”
“왕국제일검 다닐렌츠 공작 만세에에에!!!”
“만세에에에에!!!”
왕국에 새로운 공작이 탄생했음을 알리는 만세 소리가 퍼져나간다.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듯, 요제프를 따라온 근위병들의 손을 통해 형형색색의 꽃가루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가신들의 입에서, 병사들의 입에서, 곧 왕도의 거리를 가득 메운 왕국민들의 입에서 같은 이의 이름이 외쳐진다.
전례 없는 업적.
전례 없는 명성.
왕국을 위기에서 건져낸 ‘구국(救國)’의 기사이자 새로이 왕국 귀족의 정점에 선 자.
왕실을 지키는 가장 날카로운 검.
그리고, 왕국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
왕국제일검(王國第一劍).
다닐렌츠 공작, 데미언 카릴베르크의 이름이 왕도의 하늘 위에 하염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 완(完).
에필로그
왕도 카를리온 탈환 두 달 후_
콰앙-!!!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의 뒤를 단단하게 받치고 있던 빗장이 단번에 부서진다.
저벅- 저벅- 저벅-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당당하게 걸어들어오는 한 사람.
“으윽! 흐아아아아!!!”
그런 그에게 건물 안쪽을 지키고 있던 기사 몇 명이 기괴한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건장한 체구, 발걸음에 담긴 힘은 묵직하나 움직임은 날렵하다.
달려오는 그 모습만 보아도 해당 기사가 만만치 않은 실력을 지녔음을 알 수 있었다.
휘이이이잉-
기사의 손에 담긴 검이 날카로운 파공성을 흘리며 문을 부수고 들어온 침입자에게 향한다.
당장이라도 적의 머리통을 쪼개고, 피분수를 뿌릴 듯한 기세!
하지만,
휭!
“!?”
기사의 검은 기대와 달리 허공을 갈랐고, 그 바람에 중심을 잃은 기사가 순간적으로 삐끗하는데,
콰직!!!
“크헉!!!”
어느새 허리춤에서 뽑혀 나온 침입자의 검이 기사의 가슴 한복판에 박혀 등을 꿰뚫고 나와 있었다.
“음.”
으직- 촤아아아악!!!
기사의 가슴팍에서 검을 뽑은 침입자가 재빠른 움직임으로 뿜어지는 핏줄기를 피했다.
마치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부드럽고, 유려한 발놀림.
카캉!
뒤이어 그는 가슴을 꿰뚫려 쓰러진 기사의 동료로 보이는 다른 기사의 검을 자신의 검으로 가볍게 막아냈다.
“으윽!”
검을 타고 되돌아온 반탄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했던 것일까?
검을 찔렀던 기사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구기며 주춤했고, 그 순간 상대의 측면을 점한 침입자는 자신의 검을 들어,
촤아아악-!!!
“컥! 끄르륵...”
순식간에 기사의 목을 그어버렸다.
철퍼덕-!
철퍽!
기세 좋게 달려 나왔던 두 명의 기사가 차 한잔 마실 시간이 되기도 전에 차가운 주검이 되어 바닥에 누워버렸다.
“으으으...!”
“저런 인간을 어떻게... 우리가...?”
“도, 도망쳐! 난 못해!”
두 기사가 죽는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똑똑히 지켜본 방 안의 호위병들은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려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든 상태가 되었다.
그 모습을 본 침입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주인만 남아 있고, 개들은 모두 꺼져라. 얌전히 짖지 않고 나간다면, 죽이지 않겠다.”
“어흐윽!”
“가, 감사! 감사합니다!!!”
탱그렁! 태엥! 터엉- 텅!
공포에 질려 시퍼런 안색이 되었던 호위병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기를 집어 던지고 달려나갔다.
침입자는 약속대로 자신을 곁을 지나 건물 밖으로 뛰쳐나가는 그들에게 아무런 해도 가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 이 공간의 주인에게 향해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겁에 질린 호위병들이 모두 방 안에서 빠져나간 후에야 침입자는 입을 열었다.
“듣던 대로, 머무시는 거처가 아주 화려하시군. 카를리온 왕성도 이곳에 비하면 빈민촌처럼 보일 정도야.”
“...”
“그래, 이런 곳에서 오래 살다 보니 국왕이 우습게 보일만도 하겠지. 여기 와 보니 그대가 역심(逆心)을 품은 것이 이해가 돼.”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침입자.
다닐렌츠 공작(公爵) 데미언 카릴베르크가 방의 주인, 바덴하임 백작 헤르만 바이츠제커에게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놈의 그 노욕(老慾)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
“감히, 국왕 폐하를 상대로 검을 들이밀고도 멀쩡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더냐?”
“... 커흑!”
순식간에 변화한 실내의 기류에 호흡이 힘들어진 바덴하임 백작이 자신의 목을 감싸쥐며 힘겨워한다.
“어, 어떻게... 어떻게 이런...! 켁!”
사람이 뿜어내는 살기만으로 숨통을 틀어쥐는 것이 가능한가?
일견 허황된 소리처럼 들리는 그 명제가 지금 이곳, 백작령 바덴하임의 주도(主都), 그라이츠(Greiz)의 중심에 세워진 영주성의 한가운데에서 현실로 펼쳐지고 있었다.
쿠당탕-!
“저... 전하! 다닐렌츠으... 큭! 공작... 공작 전하! 자, 자비를...!”
올해로 일흔하나, 말라 죽은 고목처럼 비쩍 마르고 초췌한 모습에 거칠어 쩍쩍 갈라진 피부를 지닌 강퍅한 인상의 노인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대리석 바닥을 기며 사정한다.
방금까지 기세 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며 데미언을 마주 쏘아보던 그 패기는 어디로 갔는지, 한없이 비굴하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저벅- 저벅-
바닥에 쓰러져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백작의 모습을 바라보던 데미언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백작이 앉아 있던 영주의 옥좌로 다가간다.
새하얀 대리석을 기반으로 만들어져 다량의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그야말로 왕좌보다도 훨씬 화려한 외관을 지닌 바덴하임 백작의 옥좌.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라 할 수 있는 그 옥좌를,
휘이이이잉- 콰아아앙!!!
자신의 주먹을 휘둘러 단숨에 때려 부수는 다닐렌츠 공작이었다.
콰앙, 후두두둑-!!!
부서진 옥좌의 돌조각들이 사방으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대리석이 상대적으로 무른 돌이라고는 하지만 옥좌는 기본적으로 사람의 무게를 버티어야 하는 물건.
그렇기에 바덴하임 백작의 옥좌는 손가락 서너 마디의 두께를 지닌 큼지막한 통짜 대리석을 가져다 만들었다.
그런 옥좌를, 주먹질 한 번으로 박살을 내버리는 다닐렌츠 공작의 괴력에 바닥에 쓰러져 있던 바덴하임 백작은 숨 못 쉬는 고통조차 잠시 잊은 채 비명을 질렀다.
“히이익! 아악!”
그 와중에 부서진 옥좌에서 튀어나온 주먹만 한 돌조각에 얻어맞아 찢어진 이마에선 시뻘건 피가 흘러나왔다.
호흡 곤란에 출혈까지, 이대로 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위기에 처해버린 바덴하임 백작.
“사, 살려... 히으윽! 살려 주...!”
바닥에서 허우적대는 백작의 눈이 허옇게 넘어가려는 순간,
“추하구나, 헤르만 바이츠제커.”
“허억!!!”
그 초라한 신세를 꾸짖는 듯한 공작의 목소리와 함께, 백작의 전신을 옥죄던 무시무시한 압력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허억! 허억! 컥! 쿨럭!!! 허으억!!!”
가까스로 되찾은 호흡에 바닥에 엎어진 채로 헐떡거리는 백작.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다닐렌츠 공작은 차갑게 말했다.
“이 자리에서 당장 네 놈의 몸뚱이를 찢어발기고 싶으나, 지엄한 왕국의 법도를 어길 수 없으니 함거에 태워 왕도로 호송할 것이다. 가서 국왕 폐하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너의 죄를 고하거라. 나와 달리 폐하께서는 자애로운 인덕(人德)을 타고 나신 분, 진심을 다해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너의 비루한 목숨을 살려주실지도 모를 일이다.”
“허억! 허어억!”
“허나, 네가 이끌던 바이츠제커 가는 멸문(滅門)의 화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너의 가문이 쌓아온 모든 재물과 부는 왕국으로 귀속될 것이며, 백작령으로 누렸던 모든 권리도 박탈된다. 이제 바덴하임과 그 모든 속령(屬領)들은 왕실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어 국왕 폐하의 통치를 받게 되리라.”
“...!”
가문의 선조들에게 이어받은, 그리고 자신이 이뤄낸 모든 영광을 송두리째 빼앗기게 될 것이란 말을 들은 바덴하임 백작.
“흐으, 으으으! 으아아아아아아악!”
직전까지 숨을 헐떡거리며 다 죽어가는 듯 보였던 늙고 초라한 육신으로, 그가 믿기지 않는 괴성을 내질렀다.
평생토록 인간의 도리(道理)가 아닌 짐승의 욕망(欲望)을 따르며 살았던 이의 비루하고 처참한 최후였다.
***
“... 백작은, 처형이 결정됐다. 국왕 폐하께서 단호하게 명령을 내리셨어. 2주 뒤에 왕도 카를리온 시내의 대광장에서 참수(斬首)될 거다.”
“...”
“내 손으로 직접 놈의 목을 쳐서 바일 아르펜 남작님의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왕국의 법도가 지엄해 그리 하지 못했다. 미안하구나.”
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나는 그렇게 말했다.
“... 아니에요, 오빠. 미안해하실 필요 전혀 없으세요.”
그런 나에게 살짝 고개를 저어 보이며 따뜻한 목소리를 전하는 한 사람.
나의 여동생, 니나 카릴베르크(Nina Karilberg).
한때, 니나 아르펜(Nina Arfe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그녀다.
“바덴하임 백작이 완전히 몰락했으니, 그걸로 되었어요. 굳이 오라버니의 손에 그 사악한 인간의 더러운 피를 묻힐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이만하면 되었다고 말씀하실 거에요. 그리고 저, 지금 되게 잘살고 있잖아요? 안 그래요?”
마지막으로 내게 건넨 니나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 말처럼, 그녀는 정말 잘살고 있었다.
바덴하임 백작령의 리트베르크 남작령 침공으로 인해 벌어진 전쟁.
그로 인해 니나는 아버지 바일 아르펜 남작을 잃고, 고향인 리트베르크 영지에서 도망쳐야 했다.
이후 아버지의 벗인 구스타브 카릴베르크 남작을 찾아 왕국 북서부 변경에 자리한 다닐렌츠 영지까지 머나먼 여정을 떠났다.
매일 같이 반복된 바덴하임 추격자들과의 전투, 도망치는 길에 만나야 했던 무수히 많은 몬스터와 도적들.
아버지의 복수는 고사하고 제 한 몸 건사하기에도 힘겨웠던 나날들.
허나, 지금은 어떠한가?
“저, 이제 귀족이에요. 아버지랑 같은 남작!”
자기 입으로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부끄러웠는지, 슬쩍 내 시선을 피하는 니나.
그랬다.
나에게 남작의 작위를 수여받은 니나는, 왕실근위대장 임무 수행으로 왕도에 머무는 나를 대신해 다닐렌츠 공국을 다스리고 있었다.
나의 부인인 아이린을 비롯해 무수히 많은 인재가 공국에 존재했지만, 그중에서도 영지 운영에 관해 가장 독보적인 재능을 보여준 니나.
왕국 전역 귀족들이 그런 니나에게 잘 보이려 때마다 선물을 보내고, 서신을 전하는 모습은 이제 별반 특이할 것도 없는 그림이었다.
“저, 귀족이 되어서 왕국에서 제일가는 영지를 운영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이쯤이면 엄청 잘 살고 있는 거잖아요?”
“...”
“분명, 아버지도 이런 저의 모습을 보시면 자랑스러워하실 거예요. 제가 아는 아버지라면 바덴하임 백작을 무너뜨린 것보다 이쪽을 더 자랑스러워하실 테죠.”
“니나...”
“그러니까 저한테 미안한 표정 짓지 마세요, 오라버니. 저는 지금 행복하고, 삶에 만족하고 있어요.”
거기까지 말한 니나가 조심스럽게 나의 손을 잡는다.
“너무 늦게 말씀드리는 것 같지만... 오라버니가 제게 해주신 모든 것에 감사해요. 이젠 오라버니를 만나지 않은 제 삶을 상상할 수가 없어요. 오라버니, 정말 감사합니다.”
“...”
니나의 말을 듣고 목이 메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글쎄,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니나는 나의 여동생이자 마음으로 낳은 딸.
그리고, 이제는 거의 사라져 가는 지난 생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사람.
처음 이곳 <로스트 킹덤>의 세계에 떨어졌을 때, 니나의 존재는 나에게 어둠을 헤쳐 가는 등대의 불빛과 같았다.
그런 이가 나에게 진심 어린 눈빛과 목소리로 자신을 위해 해준 모든 것에 감사한다고 말하니 마음이 크게 움직일 수밖에.
“어? 오라버니? 지금... 우시는 거에요?”
“응? 아, 아니... 울긴 누가 운다고 그래!”
“어, 아닌데? 지금 분명 눈에 눈물 맺히는 걸 봤는데...?”
“어허, 쓸데없는 소릴! 그건 그렇고, 너는 아드리안이랑 언제 결혼할 셈이냐? 그렇게 서로 좋아 죽으면서...”
갑작스러운 나의 반격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니나가 허둥거린다.
“아잇! 저희가 또 언제 좋아 죽었다고 그러세요? 오라버니도 참...”
“이거 봐라, 아드리안 그 녀석 생각만 해도 얼굴이 이렇게 붉어지는데... 긴말할 것 없다. 올해가 가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도록 해. 준비는, 이 오라버니가 다 알아서 하마.”
“오, 오라버니...”
“혹시 아드리안 그 녀석이 아직 결혼하자는 얘기도 안 꺼낸 거냐? 어? 얼굴 보니 그런 것 같은데? 내 이놈을 당장!”
“아앗! 오라버니! 어디 가세요!”
***
[... 왕국에 벌어진 두 차례의 반란을 모두 평정하고 ‘구국(救國)의 기사’라 불리게 된 다닐렌츠 공작 데미언 카릴베르크.
그가 누린 영광만큼이나 그를 따르는 가신들의 영광도 만만치 않았다.
기사 겔베르트 로이터는 다닐렌츠 공국의 속령(屬領)인 바렌부르크의 남작이 되었고, 기사 메이슨 아르히펠트 역시 공국의 속령인 루테니아의 남작이 되었다.
일백 명의 특급 궁수들로 구성된 ‘슈탈 레겐’의 지휘관 엔리케 아르미엔토 역시 공작으로부터 남작위를 받았으나, 자신은 군인으로서의 일에 더 어울린다며 그 자리를 사양하였다.
이후 기사 에르발트 베링은 공국의 무력을 상징하는 ‘늑대기사단’의 초대 단장이 되어 왕국 전역의 전장을 돌아다니며 눈부신 전공을 세웠고, 공작의 여동생인 니나 카릴베르크의 부군(夫君)인 기사 아드리안 쉬라흐는 공작의 가족들을 지키는 근위기사단의 단장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과거 바덴하임 백작령의 침략으로 무너졌던 남작령 리트베르크 출신의 기사 데론 베르켈은 자신이 몸담았던 리트베르크 영지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 왕국 남부로 향했다.
그밖에도 다닐렌츠 공작의 지휘를 받아 전쟁에서 활약했던 여러 공신이 각기 활약에 어울리는 정당한 포상을 받았다.
이처럼 왕국력 789년은 연달아 벌어진 역도들의 난으로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국의 39대 군주, 요제프 3세의 지위가 크게 흔들린 해였다.
하지만 앞서 서술했듯 다닐렌츠 공작을 비롯한 여러 충신의 활약으로 요제프 3세는 왕위를 지켜내는 것에 성공하였고, 오히려 그 이후로 그들의 든든한 지지를 받아 그 어느 때보다 공고한 왕권을 확립하게 되었으니, 이는 그가 추후 ‘성현왕(聖賢王) 요제프’라 불리게 되는 밑거름이 된다...
- 역사학자 한스 코젤렉의 저서 <요제프와 왕국의 충신들> 본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