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피스로 전설 기사-172화 (197/197)

왕국의 깃발 아래 (2)

프롤린(Frolin).

한때 남작령 루테니아(Rutenia)의 주도(主都)로 불리며 영주가 기거하던 도시.

하지만 수년 전 왕국 북서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소금 전쟁’의 여파로 루테니아가 다닐렌츠의 영토로 병탄(倂呑)된 이후에는 남작령 다닐렌츠의 남동부 지역을 대표하는 하나의 대도시가 되어 있었다.

그 프롤린의 중심에 자리한 커다란 성.

과거 루테니아의 영주였던 라르스 제르펠트(Lars Zehrfeld) 남작이 살던 그 성엔, 이제 왕국의 주인인 요제프가 머무는 중이다.

“... 정말 예쁜 도시구나.”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도시 프롤린의 멋진 정경에 요제프가 감탄했다.

왕국 최대의 도시인 왕도 카를리온과 비교하면 규모 면에서 많이 부족하지만, 대신 프롤린엔 카를리온에서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움이 있었다.

“예, 폐하. 정말 그렇사옵니다.”

곁에 서 있던 사자기사단장 빌헬름 리벤트로프가 어린 주군의 말에 공감을 표했다.

“리벤트로프 경께선 프롤린에 와본 적이 있으십니까?”

“젊은 시절 연이 닿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었사옵니다.”

“연이 닿았다라... 아, 그러고 보니 경의 고향인 베를하임이 근처에 있었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와본 적이 있으셨군요. 그때도,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였습니까?”

요제프의 물음에, 빌헬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제가 젊었던 시절에도 프롤린은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다만...”

“다만...?”

“그때는 이렇게 도시 자체가 잘 정비되었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자연 풍광 자체가 아름다워서 도시도 함께 예뻐 보이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다르군요. 공을 많이 들인 느낌입니다.”

“음.”

빌헬름의 말을 들은 요제프가 조금 다른 느낌으로 도시의 모습을 바라본다.

과연 그의 말처럼 도시 곳곳에 공을 들인 흔적이 느껴졌다.

공을 들이다.

다른 말로, ‘돈’을 들였다는 뜻이다.

“다닐렌츠 영지의 부유함이 카를란트 이상이라더니... 과연.”

일개 봉신 영지가 왕실직할령보다 더 부유하다?

처음 들었을 땐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했지만, 요제프는 이제 그 말을 믿게 되었다.

“속령인 루테니아가 이 정도로 잘 꾸려져 있는데, 본령(本領)인 다닐렌츠는 어떨지...”

“하하하! 궁금하십니까, 폐하?”

“음...?”

뒤쪽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요제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닐렌츠와 루테니아, 그 모든 땅에 기적을 이뤄낸 사나이.

다닐렌츠 남작, 데미언 카릴베르크가 빙긋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근위대장, 오셨습니까?”

“예, 폐하. 간밤엔 평안하셨습니까?”

“덕분에 아주 잘 잤습니다. 아름다운 도시군요, 프롤린은.”

요제프의 극찬에 데미언이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모든 것이, 국왕 폐하의 은혜 덕입니다.”

“제가 무얼 했다고 그리 말씀하십니까. 그건 다 근위대장... 아니, 다닐렌츠 남작의 공인 것을.”

그렇게 서로에게 덕담을 건네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갖던 두 군신(君臣).

그러나 곧, 대화의 분위기가 바뀐다.

“... 하여, 폐하의 이름으로 봉신들에게 격문(檄文)을 보내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격문, 격문이라...”

“제 생각도 근위대장과 같습니다. 폐하께서 직접 대공의 참람된 행태에 대해 분노를 표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군사를 일으키길 주저하는 봉신들에게 확실한 명분을 쥐여주는 것입니다.”

국왕 요제프와 왕실근위대장 데미언 카릴베르크.

거기에 사자기사단장 빌헬름 리벤트로프까지 합세하여 앞으로의 대국(大局)을 논의했다.

왕좌에 대한 욕망을 참지 못하고 끝끝내 조카를 상대로 검을 겨눈 숙부, 베겐스바흐 대공을 쓰러뜨리기 위한 거대한 싸움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 하여, 현재 국왕과 사자기사단은 다닐렌츠의 속령인 루테니아의 주도 프롤린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프롤린이라... 쥐새끼들이 용케 그 시골까지 도망쳤군.”

부하의 보고를 들으며 불편한 표정으로 자신의 턱수염 쓸어내리는 중년의 사내.

베겐스바흐 대공, 루트비히 베르너 이그나티우스.

그는 현재 카를리온 왕성에 마련된 황금빛 왕좌에 앉아 자리 아래 늘어선 가신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왕국의 수많은 사람 중 단 한 사람만이 앉을 수 있도록 허락된 영광스러운 자리.

아주 오래전,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루트비히는 이 호화로운 자리의 주인이 되길 원했고, 마침내 그 꿈을 이뤘다.

하지만, 그도 알고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이들도 알았다.

아니, 세상 모두가 알았다.

지금의 루트비히는 문자 그대로 왕좌에 앉아만 있을 뿐, 진정으로 자리에 어울리는 자격을 갖추지는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자, 그럼... 귄터.”

“예, 전하.”

“앞으로의 일을 어찌해야 할지, 한번 얘기해 봐.”

한껏 나른한 목소리였지만, 그의 밑에서 오랜 시간을 일해온 귄터는 그 목소리에 숨겨진 날카로운 분노의 가시를 느낄 수 있었다.

‘...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군.’

대공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바짝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귄터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최대한 빨리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여 다닐렌츠를 쳐야 합니다.”

“다닐렌츠를 친다? 이 왕도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예.”

상당히 급진적인 전략을 내어놓은 대공파의 군사 귄터 에슬링이다.

그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의견을 개진하자 루트비히 역시 흥미가 동한 듯 왕좌의 등받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댔다.

귄터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였다.

“저는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이냐에 앞서, 상대인 국왕파가 어떤 전략을 쓸지에 대해 먼저 생각해 봤습니다.”

“음.”

“그들은 우선 왕국의 봉신들에게 연락을 돌려 봉신으로서의 군사적 의무를 다하라는 명을 전할 것입니다. 아마도 격문(檄文)의 형태가 되겠지요.”

“격문이라... 우리 어린 조카께서 그런 걸 쓸 재주가 있으신지 모르겠군. 엄마 품을 벗어나 밤새 울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을. 후후...”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이 자리에 없는 자신의 조카를 모욕하는 루트비히였다.

“국왕의 명령을 받은 봉신들이 군사를 일으켜 이른바 ‘근왕군(勤王軍)’이 조직되면, 그 병력을 앞세워 왕도를 탈환하고 대공 전하를... 음, 그러니까...”

어떤 표현을 써야 주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까 귄터가 고심하던 그때,

“놈들의 목적이야 이 루트비히의 머리통을 가지러 오는 게 아닌가? 편하게 말하면 될 것을 뭘 그렇게 어렵게 구나?”

“... 신이 어찌 감히 그런 참람된 말을 입에 올릴 수 있겠나이까.”

“뭘, 귄터 자네 정도면 그보다 더한 말도 할 수 있지. 하하핫!”

유쾌하게 웃는 루트비히였지만, 그를 제외한 장내의 누구도 미소를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괜히 눈치 없이 따라 웃었다가 돌변한 대공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

“... 크흠!”

어색한 분위기가 더 이어지기 전, 귄터가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끊어졌던 설명을 이어나갔다.

“국왕파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라이에른-팔츠 백작의 죽음으로 그들은 예전의 응집력을 잃은 지 오랩니다. 국왕의 소집 명령에 불응하거나, 응하더라도 차일피일 시일을 늦추며 미적거릴 가능성이 큽니다.”

“돌아가는 판을 보고 이기는 쪽에 판돈을 걸겠다는 속셈일 테지.”

“바로 그렇습니다. 이미 요제프 국왕은 집에서 쫓겨나 왕국의 변방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꼴을 보고도 봉신들의 충심이 그대로일 것이라 기대한다면, 그건 그야말로 어리석은 꼬마 아이의 소망에 불과합니다.”

국왕을 두고 ‘어리석은 꼬마 아이’라 표현하는 귄터의 말에 왕좌에 앉은 루트비히가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꼬맹이에게서 왕관을 빼앗는 것이 어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라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주인을 잃은 북부 놈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근왕의 명분이 아니라 라이에른-팔츠 백작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며 우르르 밀고 내려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귄터의 말을 듣던 대공의 휘하 귀족 한 명이 그렇게 의문을 표했다.

여기서 말하는 ‘북부 놈들’이란 다름아닌 라이에른-팔츠 백작령과 그의 봉신 영주들을 뜻하는 말.

그들이 죽은 주군의 복수를 하겠다며 북부의 전사들을 대거 이끌고 내려온다면 상황은 무척 어려워질 것이다.

하지만, 그 질문을 들은 귄터의 얼굴엔 자신만만한 느낌만이 가득했다.

“북부 놈들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왜냐?”

슥, 뒤쪽을 향해 뻗어진 귄터의 손 위로 서류 한 장이 쥐어진다.

“바로 여기, 제 손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로텐바인 백작?”

“라이에른-팔츠 백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인야르 놈들이 겨울 장벽으로 군사도발을 시작했다는 소식입니다. 이 소식은 오늘 아침에 제게 도착했고, 놈들이 움직인 날짜는 지금으로부터 여드레 전입니다.”

“오! 그렇다면 북부 놈들, 지금쯤 한창 바쁘겠군요?”

“그렇지! 그 바인야르 놈들, 포악하기가 오크보다 더한 족속들 아닙니까? 그런 놈들 상대하려면 주인의 복수니 뭐니,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겠지요.”

“와하하! 이쯤 되면 주 아르닌의 보살핌을 받은 수준 아닙니까? 어찌 이토록 정확한 때에 바인야르 놈들이 움직여 준 것인지...”

“어허, 아니지 이 사람아! 바인야르 놈들을 부리는 신(神)은 이교의 신 아닌가?”

“그, 그런가? 그러면 이교의 신이 우리를 도와준 꼴인데...”

“아르닌이면 어떻고, 이교의 신이면 또 어떤가? 우리를 이끌어주실 분은 오로지 위대하신 대공 전하, 한 분뿐인 것을! 하하하하!”

귄터가 전한 소식에 모두의 표정이 밝아지며 불안감이 가신다.

대륙 북부를 지배하는 야만족 바인야르는 장장 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왕국의 국경을 위협해온 이들.

그들의 남하 소식은 그 자체로 노르트란트(Nordland), 즉 왕국 북부의 발을 묶는 거대한 족쇄였다.

바인야르의 준동은 곧 왕국 전체의 안전이 위협받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미 왕권 찬탈의 욕망에 눈이 멀어버린 대공과 그의 수하들에겐 그저 왕국 북부의 움직임을 억제할 호재(好材)로 느껴질 뿐이었다.

극적으로 좋아진 장내의 분위기에 한층 자신감이 붙은 귄터가 루트비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전하, 지금 즉시 림베르크와 하펜슈타인, 두 곳의 영주들에게 명하시어 북쪽 변경지대로 병력을 배치하도록 하십시오.”

“림베르크와 하펜슈타인?”

“예, 그렇습니다.”

림베르크(Rimberg)와 하펜슈타인(Hafenstein)의 영주들은 모두 베겐스바흐 대공에게 충성을 맹세한 봉신들로, 두 곳 모두 라이에른-팔츠 백작의 봉신이 다스리는 아른하임(Arnheim)과 맞닿아 있는 지역들이었다.

“림베르크와 하펜슈타인, 두 곳의 병력이 변경지대로 몰려들면 자연스럽게 아른하임과 그 주변 지역의 군사적 긴장감이 높아지겠지요.”

“바인야르 놈들이 위쪽을 두드리고 있으니, 그 반대편으로도 압박을 준다?”

“예, 그렇습니다. 위아래로 적을 맞게 된 노르트란트는 집을 잃고 쫓겨난 어린 소년을 챙길 겨를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 우리는 다닐렌츠로 북상해 요제프 국왕을 잡으면 됩니다.”

“흠...”

길었던 귄터의 설명을 들은 루트비히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그러다 문득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무릎을 내리치며 물었다.

“허나, 자네 말처럼 우리가 왕도를 버리고 북상하면 남쪽의 바이펠베르크 백작이 포나우 강을 건너 치고 들어올 것인데... 그것은 어찌 막을 생각인가?”

“그 또한 막을 방안이 있습니다.”

“방안이 있다?”

“예.”

“허어...”

마치 그 부분을 지적할 줄 알았다는 듯 곧바로 튀어나온 귄터의 대답.

뒤이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방안’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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