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73화 (73/352)

제73화

#25 모래 폭풍을 잠재우는 법 (4)

그 말도 안 되는 말에 순간 이성이 마비됐다. 뭐가 어쩌고 어째?

[예?]

[그쪽 실력 있어요.]

[제가요?]

막말로 여태까지 우리를 덮친 몬스터 중에 내가 손을 댄 건 소수다. 맨 처음의 코뿔소를 잡은 건 김재호고, 그다음으로는 정체를 드러낸 테이카가 죄다 짓이겨 죽였으니까.

중간에 끼어든 개떼를 처리하긴 했다만, 멀리에서 바람 칼날이나 조금 날린 정도다.

결과적으로 내가 한 거는 그냥 휴식처를 정한 거랑, 잡일 정도 아닌가. 생각해 보면 열심히 밥을 먹인 기억밖에 없는데.

[저 친구들을 훌륭하게 다루던데요.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지만, 리더십이 있다는 게 확실히 느껴졌어요. 거기에 내 능력을 제대로 쓰는 법을 가르쳐 줬잖아요.]

내 별거 아닌 충고를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해 줄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기뻤다.

어, 이상할 정도로 기뻤다.

아카데미에서는 내가 충고를 던지면 툭하면 무시당하고 조롱당하기 마련이었거든. 내 충고를 진지하게 생각해 주는 건 정호산 정도밖엔 없었다. 하지만 정호산은 내 친구였기에 객관적인 평가라고 할 수 없었다. 막말로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좋다고 말해 줬을 애니까.

한서현과 김재호도 내 말에 잘 따라오기는 했지만, 둘 다 아직은 미숙한 어린애들이었다.

제대로 된 헌터가 나를 인정해 주는 건 처음이었다.

어쩌면 이 헛고생을 할 필요도 없는 거 아닐까. 세계 최강이라고 불리는 헌터 곁이라면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순식간에 찾을 수 있을지도?

하지만 그 환상은 곧 이어진 테이카의 말에 깨지고 말았다.

[미스터 리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는 것도 불가능했을 거예요!]

미스터 리. 그 말에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뭘 고민하고 앉았냐. 어차피 저 제안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건데.

솔직히 세계 최강으로 꼽힐 테이카가 내 실력을 인정해 주는 것 같아 순간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미스터 리. 그래, 결국 가짜인 관계다.

그리고 머리를 식히고 생각하니, 내가 순간 했던 생각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알 수 있었다.

테이카가 대단하기는 하나 이제 겨우 스물하나인 꼬맹이였다. 이런 경험이 많지 않을 테니 뭐든 신기하고 좋게 보일 거다. 미래에 그의 곁에 따라붙을 최고의 지원 팀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닐 텐데도.

뭐, 그래도 기분 나쁘게 하지 않으려면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는 편이 낫겠지.

[이번 원정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죠.]

[와아! 진짜요? 너무 좋아요!]

테이카는 어린애처럼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러고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줄줄이 쏟아 내기 시작했다.

[마침 내 에이전시가 한국인이거든요. 아주 잘 맞을 것 같아요. 물론 미스터 리는 영어도 아주 잘하니까 누구든 상관없겠지만, 그래도 동향 사람이 함께한다는 건 좋은 일이잖아요?]

음, 알지. 국뽕 채널에 툭하면 나온 인사니. 이름도 얼굴도 안다. 내적친밀감이 다 생길 지경이라니까?

[이만 눈을 붙여요, 쉬어 두는 게 좋을 겁니다.]

나는 흥분에 들떠 말을 쏟아 내는 테이카를 진정시켰다. 테이카는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미안해요, 꼭 어릴 때 캠프를 온 것 같아서. 이 재능을 각성하고 나서부터는 그럴 수가 없었거든요. 친구도 제대로 사귈 수가 없어서…….]

그렇게 말한 테이카가 반쯤 눈을 감고 말했다.

[미스터 리는 왠지 편하게 느껴져요.]

내 정체를 알면 아주 뒤집히겠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눈을 감았다.

피곤했는지, 순식간에 잠이 몰려들었다.

* * *

한 네 시간쯤 눈을 붙였을까. 좁은 데에 쪼그려 앉아서 잔 터라 몸이 영 찌뿌둥했다. 어제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조금 더 넓은 곳으로 만들 걸 그랬다.

눈을 뜨니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잠든 한서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밤새 악몽을 꿨는지, 못난이 인형처럼 구겨진 얼굴이 안쓰러웠다. 구겨진 미간을 슬슬 풀어 주며 나는 레이에게 물었다.

‘바깥은 어떻습니까?’

━여전해. 여전히 모래 폭풍이 강하게 불고 있다.

‘차라리 낫네요. 폭풍의 눈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는 거니까.’

지금 바깥에서 몰아치는 모래 폭풍은 오히려 안전하다는 신호였다.

저 모래 폭풍이 사라진 순간이 진짜 위험해지는 순간이다.

폭풍의 중심점, 고요하기 짝이 없는 폭풍의 눈 한가운데에는 이 거대한 모래 폭풍을 만들어 낼 만큼 강력한 몬스터가 있을 테니까.

나는 잠이 든 사람들을 깨워 간단하게 먹을 걸 먹였다.

“으, 죽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한 한서현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좀 괜찮아?”

“아뇨, 전혀.”

얼굴을 쓸어내린 한서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

“으윽, 위에 올려 보냈던 애랑 연결이 끊겼어요.”

계약을 한 것도 아니고 임시로 되살린 거니 유효기간이 짧기도 했고, 모래 폭풍을 벗어나려고 계속 날갯짓을 한 결과 금방 마력이 끊어져 버렸단다.

“으음, 그거 안 좋은데.”

“그래도 마지막으로 본 방향은 기억해요. 예브게니였나, 그놈은 이동을 멈추고 가만히 있었으니 일단 그쪽 방향으로 가보죠.”

“그래. 그리고 예브게니가 아니라 예브리카다.”

“이, 이름은 틀릴 수도 있잖아요!”

이래서 사춘기를 맞은 애들은 다루기 어렵다는 건가. 괜히 짜증을 내는 한서현을 피해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토굴이다. 멀리 피할 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우리의 시야를 책임지던 새 몬스터가 사라졌다는 건 제법 뼈아픈 손실이었다. 중간에 비행형 몬스터를 또 잡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폭풍의 눈과 가까워지는 지금 주변엔 몬스터가 두 눈을 씻고도 보이지 않았다. 바깥도 비슷한 처지일 테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어제 테이카가 벌처를 짓이겨 죽이기 전에 좀 챙겨 두는 건데 그랬다.

이미 지난 일을 후회해서 뭐 하리. 일단 방향은 확인해 뒀다니, 여태까지처럼 우직하게 걸어 나가면 될 것이다.

“다들 체력은 괜찮아?”

내 질문에 김재호는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도 말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테이카가 등장하고 나서부터는 거의 입을 닫아건 수준이었다. 표정의 변화도 거의 없는 걸로 봐서 어지간히 낯을 가리는 모양이다.

흠, 애들은 좋아했는데.

테이카도 21살로 어린 편에 속했지만, 고생을 조금 해서 그런지 약간 겉늙어 보이는 게 없잖아 있어서…….

[하하! 미스터 리, 좋은 꿈 꿨나요?]

아니다, 저렇게 천진난만한 애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예, 이제 슬슬 식사하고 밖으로 나가 볼까 하는데 컨디션은 괜찮습니까?]

[네! 최상입니다.]

[그나저나 정찰해 주던 친구가 죽어 버려서 말이죠. 이제부터는 대충 감으로 방향을 잡아야겠습니다.]

[아.]

테이카의 얼굴에 걱정이 스쳤다.

[그래도 밤사이 몬스터가 이동한 것 같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방향을 맞추는 건 자신 있으니 제 뒤를 따라오시죠.]

[네, 믿어 보겠습니다.]

눈빛이 너무 초롱초롱하다.

으으, 저렇게까지 믿는다고 말하지 말라고!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타입한테는 약하단 말이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빨리 육포를 해치웠다.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다시 꼼꼼히 온몸을 감쌌다.

“으, 가면 싫은데.”

나는 가면은 물론이고 천 조각으로 한서현의 온몸을 꼭꼭 감싸 주었다.

“가만히 있어. 모래 폭풍이 더 거세지면 그 자체로 흉기나 다름없단 말이다.”

[포장 실력이 좋은데요.]

[쿠퍼 씨도 해 줄까요?]

[아! 저는 사양합니다. 전 미라가 되는 취향은 없어서.]

농담인가, 비꼬는 건가. 천진난만하게 저렇게 말하니 뭔지 감이 안 온단 말이야. 김재호도 내 손길을 거부했다. 하긴 저쪽의 살갗은 웬만한 몬스터 수준으로 튼튼할 테니.

나는 방수포를 걷었다. 다시 모래 폭풍 지옥을 뚫고 나갈 때가 됐다.

그리고서 우리는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이 모래 폭풍을 나아가는 방법에는 별 요령이 없다. 그저 내가 걷는 방향이 맞으리라 믿고 걷고 또 걸을 뿐. 그렇게 한 네 시간 정도를 걸었을 때였다.

일순간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아.”

폭풍의 눈에 닿았다.

하늘은 맑았고 사방은 고요했다. 그리고 저 멀리 이 모래 폭풍을 만들어 낸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 자리에서도 그 몬스터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황금빛 물결이 반짝였다. 이 모래 폭풍을 만들어 낸 몬스터, 예브리카는 모래로 이루어진 거대한 새였다.

새라고는 해도, 우리가 잡아 죽였던 볼품없는 대머리수리 같은 것과는 감히 같은 종이라고도 말할 수 없을 만큼 기품 있는 모습이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몸을 타고 흐르는 모래는 마치 황금빛 파도처럼 우아하게 빛났고 섬세한 조각처럼 빛나는 외형은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몇 km는 떨어진 이곳에서도 그 모습이 선명히 보일 정도로 거대하기까지 했다.

저것이 최상급 몬스터.

아니, 감히 몬스터라는, 괴물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저건 그보다는 오히려 신이라는 이름이 걸맞은 생명체인 것이다.

━그래, 다른 차원에서는 사막의 신이라고도 불렸던 놈이지. 여기에서 다시 보게 되다니.

레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막의 신이라니.

확실히 그러한 이명이 걸맞은 모습이다.

문제는 우리가 저것을 ‘사냥’하기 위해 왔다는 거였다.

그래, 사냥.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아름다워도, 신성을 지닌 것처럼 기품을 지니고 우아하게 생겼다고 해도. 저건 우리의 땅을 침략한 몬스터다. 가만히 두고 있으면 이 호주를 능히 멸망케 만들 수 있는 존재였다.

[다들 뒤로 빠져 계시죠.]

테이카는 의기양양하게 앞으로 나섰다. 나는 테이카를 뒤로 물렸다.

[아뇨, 쿠퍼 씨는 뒤로 물러나요.]

우리 중에 분명 제일 강한 사람은 테이카였지만, 전위를 테이카에게 맡기는 건 좋지 못한 선택이다.

[전위는 제가 맡겠습니다.]

저놈의 공격이 어떤 타입일지는 모르겠지만, 유사시에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그리고 나 또한 막무가내로 박을 생각은 없다.

“서현아, 정찰을 부탁해.”

내 말에 한서현은 하운드를 꺼냈다. 하운드가 황금빛 들판을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예브리카와 우리 사이는 꽤나 멀었다. 대충 어림잡아 4km 정도. 한서현의 하운드는 예브리카와의 거리를 빠르게 좁혔다.

처음, 그 거대한 새는 조각상처럼 가만히 있었다. 그 거대한 새에 비하면 그 앞을 달리는 하운드의 몸체는 너무나도 작았다. 마치 좁쌀처럼.

그러니 무시하는 걸까.

하지만 그건 순간의 착각이었다.

하운드가 제 날개에 닿는 곳에 닿자마자 거대한 새는 순식간에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날개로 하운드를 짓밟았다.

“윽!”

한서현은 신음을 흘렸다.

“괜찮아요, 밟히기 전에 소환 해제했어요.”

그동안 내가 들들 볶으며 소환 해제 시간을 줄이게 한 게 도움이 됐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가까이에 다가가기만 해도 모래가 덮친다.

거대한 몸체를 이루고 있는 건 모래다. 모래의 움직임은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그러니 둔할 거라는 건 착각이다.

조금 전에도 하운드를 짓밟으려는 움직임은 그야말로 찰나간에 이루어졌다.

단순 물리력만 봐도 쉬운 상대는 아니다.

자세한 건 더 알아봐야겠지만.

당장 저걸 상대할 우리 측의 전력은 어떤가.

글쎄, 일단 한서현은 저렇게 덩치가 큰 적을 상대할 때 그리 좋은 선택지가 아니다. 스켈레톤 하나를 보내 봤자 뚝딱거리다가 부서지기나 하겠지. 마수야, 방금 반강제로 소환 해제가 된 참이니 다시 꺼내기까지 시간이 걸릴 거다.

그렇다면 김재호는 어떤가.

일단 접근전을 펼쳐 볼 수 있다.

하지만 본체가 모래인 이상 ‘독’은 통하지 않을 거고, 김재호의 물리력은 역시 모래라 상쇄된다는 게 문제다.

당장 유효한 타격을 먹일 수 있는 건 여러 가지 속성을 늘어놓을 수 있는 나나, 중력을 사용하는 테이카 정도인가.

아니, 정보가 너무나도 부족하다.

나는 눈앞의 예브리카를 바라봤다.

어쩔 수 없지, 일단은 몸으로 부딪쳐 가며 정보를 캐낼 수밖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