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25 모래 폭풍을 잠재우는 법 (6)
이제 완벽하다.
“한서현, 너는 저놈한테 접근해서 최대한 많은 모래를 물들여.”
잠재력 A라는 등급을 받을 만큼 한서현의 마력량은 엄청나다. 아직 제대로 사령술을 할 수 없는 게 문제일 뿐.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겠다 싶으면 갈아 버리고. 그걸 계속 반복하는 거야.”
내 말에 한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 나는 김재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재호는 서현이를 지켜. 아, 업고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어쨌거나 한서현이 다치지 않게 하면서 최대한 많은 모래에 접촉할 수 있게 해.”
김재호는 튼튼하다. 한서현의 몸 정도는 가볍게 업고 움직일 정도로. 한서현에게 부족한 기동력을 확보해 주는 거다.
이렇게 두 사람의 역할은 정해 줬고.
나는 시선을 뒤로 던졌다.
테이카는 아직까지도 일대일로 예브리카를 상대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화력이 달려 보였다. 아무리 마력이 많아도 소용없다.
아직 테이카는 중심점을 여러 개 만들어 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예브리카는 자신을 괴롭히는 놈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는 듯, 테이카를 직접적으로 노리고 있었다.
테이카는 자신의 앞으로 모래가 날아올 때마다 예브리카의 몸에 만들었던 중심점을 삭제하고 자신의 앞에 중심점을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공방을 교체하고 있었지만, 쉬워 보이지 않았다.
“어서 도와주러 가야겠어.”
내 말에 한서현이 말했다.
“잠깐, 보스는 뭘 하는데요?”
“나는 나대로 시선을 끌 생각이야.”
두 사람에 비해 부족한 내 화력으로는 예브리카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저 수많은 모래를 걷어 낼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놀고만 있을 수는 없다.
대충 계획은 머릿속에 세워졌다. 나는 한서현과 김재호를 예브리카의 오른쪽으로 보냈다.
이제부터는 시간과 체력 싸움이다.
일단 내게 시간을 벌어다 준 테이카의 곁으로 갔다.
[어, 오셨네요.]
[네, 고맙습니다. 덕분에 저놈을 어떻게 잡을지 감이 왔어요.]
[하하! 저도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면 힘들어질 거라 생각했어요.]
나는 간단하게 테이카에게 내가 알아낸 점을 말해 주었다. 내 설명에 테이카가 입을 벌렸다.
[그 짧은 시간으로 그 모든 걸 알아냈다고요? 아니, 애초에 시선을 끌어 달라는 게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예.]
처음 보는 몬스터를 상대할 때는 그 공략법을 떠올리는 게 제일 어려운 법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건 없다. 군집이라는 틀로 묶어 보면 놈도 뻔했다.
그냥 어마어마하게 큰 것뿐.
[저 많은 모래는 저놈의 위장 전술입니다. 놈의 본체는 안에 있겠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저 많은 모래를 깎고 깎아서 저 안에 숨어 있는 놈의 진짜 본체를 끄집어내는 거뿐입니다.]
내 말에 테이카는 활짝 웃었다.
[진짜 당신을 미국으로 데리고 가야겠어.]
그 말과 함께 테이카는 손을 뻗었다. 나를 향해 날아들던 모래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헉.”
죽을 뻔했다.
[대화도 좋지만, 일단은 저놈을 해치워야겠네요.]
[네.]
테이카의 마력이 움직였다. 여태까지의 시선 끌기와는 그 크기부터 달랐다.
[이제부터 힘 좀 제대로 써 볼게요.]
전까지 테이카가 만든 중심점이라는 놈이 주먹만 했다면, 이번에는 사람 하나를 집어삼킬 정도로 커다랬다. 예브리카의 왼쪽 날개, 그 한가운데에 만들어진 검은 점은 예브리카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래를 사정없이 끌어당겼다.
모래 새는 끌려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듯이 날개를 퍼덕였지만, 왼쪽 날개 끝에 생긴 검은색 점은 탐욕스럽게 모래를 빨아들였다.
그 밑으로 뿌옇게 가루가 흩날렸다.
그리고 반대쪽, 오른쪽 날개에서는 한서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재호의 등에 매달려 반쯤 울고 있는 한서현은 예브리카의 날개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으어어어, 너무 빠르다고오오오!”
저 울음만 아니라면 아주 멋있었을 텐데.
그래도 한서현의 손끝이 닿은 곳부터 퍼져 나가는 검은 물결의 모래는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검게 물들기 시작하는 오른쪽 날개를 확인한 나는 바람으로 몸을 띄웠다.
두 사람이 야금야금 모래를 걷어 내는 동안 나는 이 모래 속에 숨어 있을 본체를 찾을 생각이다. 몸통일까도 생각해 봤지만, 테이카가 몸통을 건드렸을 때에 놈의 본체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저 모래 속을 유영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양쪽 날개를 모두 공격당한 예브리카는 미친 듯이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고통이 아니다.
두려움이다.
나는 놈의 ‘머리’가 있는 부분까지 몸을 띄웠다. 공기 중의 마나가 짙은 곳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기예다. 고소공포증은 없지만, 수십 미터는 되는 높이는 가슴이 떨릴 만하다.
그래도 지금은 내 두려움을 드러낼 수 없다.
나를 본 놈이 곧장 내게 모래를 날렸다.
나는 모래를 피해 움직였다.
내 지금 가장 큰 장점은 기동력이다. 마나가 짙은 대기는 바람과 속성이 좋다. 평소보다 마력의 소모는 절반 이하고, 몸을 움직일 때의 저항도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공중에서 나를 쫓는 모래와 숨바꼭질을 할 셈이었다.
모래가 움직이는 만큼, 비는 부분이 생기기 마련. 지금은 곧장 다른 모래가 나타나 몸을 다시 채웠지만, 한서현과 테이카에 의해 갈려 나가는 모래는 상당한 양이다.
무한한 듯 보였던 모래도 바닥을 드러낼 때가 올 거다.
눈앞에서 잡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는 나를 따라 모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날개의 모래는 쓸 수 없다. 그러면 남는 곳은 몸통이다. 그렇게 나를 따라 모래가 움직일 때 나는 보았다.
목 부분에 다른 모래들과는 달리 유난히 반짝이는 덩어리가 있었다는 것을.
“이크!”
자신의 본체의 위치를 들키는 걸 감수하고 몰아친 공격이라 그런지, 유난히 매서웠다. 수천 개의 모래 깃털이 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나는 몸을 휘감고 있던 바람을 모두 보호막으로 돌렸다.
당연히 추진력을 잃은 내 몸은 추락하기 시작했지만, 일단 깃털을 막는 게 우선이다. 몸이 바닥에 닿기 직전, 나는 다시 바람을 부른다. 하지만 깃털이 남아 있었다.
반응할 새도 없었다. 남아 있던 깃털은 내가 서 있는 바닥으로 그대로 꽂혔다.
“크윽.”
피한다고 피했지만, 팔뚝이나 정강이 쪽에 모래 깃털이 꽂히는 걸 막을 순 없었다. 급소를 피했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 할 판이다. 순식간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다. 깃털을 뽑을 필요도 없이 모래는 그대로 흩어졌다.
“허어, 이거 좀 쫄리는데.”
나는 몸을 일으켰다. 몸이 덜그럭거리기는 해도 바람을 이용해 움직이면 되니 다행이다.
그때, 검은색 모래로 된 개가 거대한 새의 날개를 물어뜯는 것이 보였다. 감탄이 나올 정도의 응용력이다. 악에 받쳐 소리치는 한서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토할 것 같다고오오!”
안타깝게도 김재호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전혀 되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다행히 그 분노는 오로지 예브리카에게 향했다.
검은 개에게 물어뜯긴 부위에서 우수수 모래가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모래는 곧바로 한서현의 손끝에 닿아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을 만큼 거대한 상대였지만, 이런 식으로 야금야금 모래의 주도권을 빼오니 점차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몸을 일으킨 나는 김재호와 한서현에게로 향하던 모래 창을 바람으로 끊어 냈다.
“어딜 노리는 거야.”
나는 다시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아직 넌 나를 죽이지 못했다고.”
양동, 아니, 삼동작전이다.
이렇게 덩치가 큰 몬스터는 정신없게 몰아치는 게 최고다.
오른쪽 날개? 아니, 왼쪽 날개? 눈앞에 있는 이 버러지부터 치울까?
이렇게 놈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나는 그만큼 여유가 생긴다.
본체의 위치도 대충 파악했다. 문제는 아직 모래가 많아도 너무 많다는 거지. 지금 함부로 본체를 공격하려 했다간 놈이 다시 위치를 옮겨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럼 다시 이 지긋지긋한 숨바꼭질을 해야 한다.
그러니 조금만 더 시간을 벌자.
확실하게 본체를 공격할 수 있는 타이밍을 잡을 수 있을 때까지만.
그 시간을 버는 데에는 눈앞에 날아다니는 초파리만 한 게 없다. 알짱거리면서 놈의 신경을 나에게로 쏠리게 만드는 거다.
나를 본 놈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야말로 나를 죽여 없애겠다는 듯, 모래를 불러왔다. 나는 몸을 땅으로 내리꽂았다. 내 뒤로 모래가 수없이 터졌다. 날카로운 창을 이룬 모래가 내 몸을 집요하게 따라왔다.
나는 내 몸 뒤로 물을 뿌렸다.
일종의 플레어처럼, 물에 닿은 모래는 흩어졌다.
젠장, 이런 식으로 능력을 밝히고 싶진 않았는데. 바람만 사용하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모래 폭풍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크.”
자신의 몸을 흩어 내서라도 우리 모두를 떨쳐 내려는 거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모래 폭풍을 막았다. 한서현은 자신의 몸 주변으로 검은색 모래를 덮어 일종의 돔을 만들어 냈고, 테이카는 무식하게도 자신의 주변에 오는 모래를 모두 땅바닥으로 내리꽂고 있었다.
모래 폭풍에 닿은 내 옷자락이 해지는 게 눈에 보였다. 여태까지와는 달리 모래에 닿는 모든 게 갈려 나갔다.
━이건 위험하다!
레이가 경고한 대로 이 모래 속에 서 있다가는 믹서기에 들어간 꼴이 될 거다.
나는 마나를 끌어 올렸다. 내가 디디고 있는 땅을 순식간에 팠다.
“땅으로 숨기 전략이다.”
땅굴을 파서 안으로 숨어든 나는 마력 보조 팔찌를 확인했다.
팔찌의 마력이 아슬아슬했다. 나는 미리 준비했던 마나석 가루를 재빨리 팔찌에 털어 넣었다. 치이익, 팔에서 살점이 익는 소리가 났지만 무시했다.
바닥을 보였던 마력이 다시 차올랐다.
나는 눈에 마나를 모으고 모래를 살펴보았다.
이 모래 폭풍을 만드느라 놈의 몸뚱어리는 훤히 비어 있었다.
“저거다.”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는 놈이 보였다. 모래 속에 숨겨져 있던 놈의 본체는 아주 볼품없었다.
갓 태어난 콘도르 새끼같이 생겼네.
멋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꾸몄지만, 본체는 저렇게 형편없이 생겼다. 모래 폭풍은 금세 잠잠해졌다. 다시 놈이 본체로 모래를 불러들이는 거다.
지금을 놓치면 안 된다.
허벅지의 단검집에서 단검을 빼낸 나는 다리에 힘을 모았다. 새로 채운 마나석의 30%의 마력을 무식하게 쏟아붓고 그대로 터트린다.
“크으읏!”
몸에 가해지는 부하에 신음이 절로 샜다.
하지만 효과만큼은 확실했다. 발밑에서 터트린 폭발로 내 몸은 총알처럼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다음으로는 바람을 연계했다. 이미 추진력을 얻은 몸은 SS급의 몬스터가 순간적으로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온몸이 삐거덕거리는 게 느껴졌다. 정강이뼈가 부러지고, 척추도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상관없다.
놈을 노릴 잠시의 시간을 벌었으니 그걸로 됐다.
나는 온 힘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놈의 본체에 내 단검이 정확히 꽂혀 든 순간, 내가 외쳤다.
[테이카!]
내 부름을 알아들은 그가 시선을 올렸다.
[지금입니다.]
나는 다시 30%의 마력으로 번개를 불렀다.
잠시 잠깐이라도 좋았다.
모래 방어막을 다시 두르지 못할 정도로만 놈을 멈춰 두면 된다.
내가 꽂아 넣은 검을 전도체 삼아, 벼락이 내리꽂힌다.
쩌저정, 모래 폭풍 사이로 번뜩이는 번개는 내가 봐도 제법 멋졌다.
그리고 그 위로.
자그마한 점 하나가 나타난다.
테이카의 엄청난 마력이 그 공간을 지배한다.
작은 점을 향해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간다.
10년 뒤의 테이카의 초절기.
블랙홀.
아직 블랙홀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했지만, 그럼에도 최상급의 몬스터를 짓이기는 데에는 충분했다.
일순간 세상이 조용해진다.
끼야아악!
괴물의 비명이 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폭풍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