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29 탑
사람들은 뭐든 순위를 매기길 좋아했다.
헌터들이 뭉쳐 만든 길드의 순위를 점치기 시작하고,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헌터의 순위를 매겨 보고, 그리고 마침내는 음지에서 살아가는 빌런들의 강함까지 재단했다.
탑은 그 빌런들 중에 제일 강하다 평가받는 10명을 꼽아 일컫는 말이다.
처음에는 탑 텐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이었지만, 어느새 ‘탑’이라는 이름 자체에 상위 10명이라는 의미까지 스며들게 되었다.
그리고 ‘탑’은 그 자체로 고유명사가 되었다.
‘탑’ 하면 누구든 음지에서 꿈틀거리는 거악을 떠올렸다. 그리고 두려워했다. 탑에 오를 만한 빌런이라면, 마주치는 순간 그들의 목숨은 그들 것이 아니게 될 테니까.
빌런이라면 누구든 탑에 오르는 것을 꿈꾸게 됐을 정도로 탑은 빌런들의 꿈이자, 목표이자, 종착역이 됐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이 말하는 탑.
탑에서도 허락된 이들만 발을 디딜 수 있는 검은 탑의 꼭대기에서는 간만의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피사의 사탑처럼 삐딱하게 선 그 탑의 꼭대기 층에는 흑요석으로 빚어 만든 둥근 원판이 존재했고, 그 원판의 주변으로는 역시 검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의자가 원판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 의자에는 총 다섯 명의 사람이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며 앉아 있었다.
탑의 창문으로 흘러 들어오는 빛을 등지는 자리에 앉아 있던 검은 로브, 혈마 추마걸이 입을 열었다.
“도살자는 확실히 급이 떨어졌지.”
몇 달은 제대로 입을 열지 않은 듯 거친 목소리였다. 그의 말을 받은 것은 그와는 정반대의 자리에 앉아 있던 제미니였다.
“하긴, 나도 같은 탑이라고 엮일 때마다 콱 죽여 버리고 싶었다니까.”
검은색과 흰색으로 나뉜 양쪽 머리를 아래로 땋아 내린 그녀는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입은 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야.”
“확실한 신고식이었지, 그거.”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트릭스터의 말에 제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에 섞인 트릭스터는 오늘도 제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제미니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구석에서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30대 중반의 남자, 큐브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오래간만에 재밌는 녀석이 나타났어.”
“그런데 말이야. 진짜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 누구도 걔가 누군지 모르는 거야?”
제미니는 원판 가까이에 붙어 서서 모두의 얼굴을 훑었다. 검은 로브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혈마 추마걸도, 그림자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트릭스터도, 평상시처럼 메마른 얼굴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큐브도. 그리고 구석에 앉아 오늘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인형사의 얼굴도.
그렇게 모두의 얼굴을 꼼꼼하게 훑었지만, 진짜 그 누구도 벨츠머츠를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정말 신기하단 말이지. 아무도 몰라, 정말 아무도? 솔직히 아는 사이인데 그놈의 신비주의를 지켜 주려고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니고?”
“그러는 나야말로 묻고 싶군. 그놈도 복합 재능 보유자일지 모른다는데, 너야말로 아는 게 없는지.”
“그놈도 쌍둥이냐고 묻는 거야? 그럴 리가! 우리처럼 사랑스러운 쌍둥이가 이 세상에 또 있을 리 없잖아!”
제미니의 말에 큐브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너 같은 경우가 흔한 건 아니겠지.”
각성자인 쌍둥이를 열 살에 잃었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제 쌍둥이까지 품어 버린 괴인. 제미니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인형들도 별말이 없어?”
제미니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구석에 앉아서 입을 닫고 있던 40대 여성에게로 향했다. 여자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없어.”
“흐음.”
인형사는 말이 극도로 적었지만, 이 탑에 있는 누구보다도 정보력이 뛰어났다. 그녀가 이 세상에 흩뿌려 놓은 모든 인형이 그녀의 귀이자 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도 모르는 일이라.
“신기하네.”
제미니는 눈을 굴렸다.
“내가 여기에 오기도 전에 당신들은 나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었잖아. 큐브가 왔을 때도 그렇고.”
제미니의 말을 들은 큐브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지만, 제미니의 말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때 뉴스가 대단하게 났었지?”
큐브가 빌런이 된 것은 헌터 아카데미에서 동급생을 ‘실수로’ 죽게 했기 때문. 큐브의 손에 닿아 ‘안’과 ‘밖’이 뒤바뀌어 버린 동급생은 끔찍하게도 얼마간 살아 있었다고 한다.
그 모든 이야기를 제미니는 안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빌런이 된 추마걸과 인형사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안다.
이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으니까.
“근데 왜 그 녀석들에 대한 이야기는 없을까.”
이렇게까지 아무런 전조도 없이, 아무런 역사도 없이 하루아침에 이만큼의 빌런이 되는 일은 어렵다.
트릭스터가 말했다.
“한 명은 알잖아. 그 네크로맨서 꼬맹이.”
“꽤 재능이 있어 보이더군.”
혈마 추마걸의 말에 제미니가 낄낄 웃었다.
“같은 흑마력을 쓴다고 관심을 보이는 거야?”
“그래도 마음이 영 약해. 나 같았으면 그 꼬맹이들을 구해 주는 대신 재료로 삼았을 거야.”
“영감탱이랑은 달리 걔는 네크로맨서잖아. 조그만 스켈레톤은 영 쓸모가 없나 보지.”
“그런가?”
혈마 추마걸은 제미니를 향해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른 이가 자신을 영감탱이라고 불렀다간 한 줌의 피로 만들어 버렸겠지만, 제미니는 예외였다. 어린 나이에 탑에 들어온 그녀를, 혈마는 나름대로 아끼는 편이었다.
원판에 올라앉은 제미니가 말했다.
“어쨌거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그놈들은 셋이야. 그중 누구라고 밝혀진 건 하나뿐이고. 가면을 뒤집어쓴 놈이 리더인데 우린 그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렇게 말한 제미니가 눈을 가늘게 뜨고 속삭였다.
“혹시 모르잖아. 저번처럼 ‘가짜’들일지.”
가짜. 제미니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제미니가 제일 증오하는 건 헌터들이었다. 이 세상을 위해 자신들의 능력을 쓴다고 포장하는 것들. 자기들도 뒤로는 다 구린 짓을 하는 주제에, 자신들은 선이고 너희는 악이라 규정한 위선자들.
“그런 거면 내가 직접 태워 죽일래.”
제미니의 말에 혈마가 말했다.
“내가 한번 알아보지.”
“영감님이?”
제미니가 고개를 쭉 뺐다. 늘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추마걸은 이 탑에서도 제일 경력이 오래된 빌런이었다. 그만큼 작은 일에는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만의 혈마법을 완성하는 일만으로도 바쁘다고 늘 빼기 바쁜 그가 직접 나선다는 말에 제미니뿐만 아니라 원탁에 둘러앉은 모두가 약간은 놀란 기색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놈들도 나를 보면 고개를 숙이겠지.”
혈마 추마걸이 이 탑에 오른 것은 30년도 전의 일. 그때에는 이 탑도 없었고, 탑이 탑이라고 불리지도 않았을 때였다. 탑이 만들어진 후로 그는 단 한 번도 이 탑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런 만큼, 추마걸이라는 이름은 제법 빌런계에서는 잘 먹혔다.
“좋아, 그놈들도 영감님을 보면 아주 뒤로 넘어가겠지!”
제미니는 깔깔 웃었다. 하지만 웃음기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의 눈에서 작은 불꽃이 튀고, 그녀의 장난기 넘치던 어조가 점잖게 바뀌었다.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한 제미니가 추마걸에게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난 괜찮을 거다.”
추마걸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것도 잠시, 눈안에서 푸른색 불꽃이 번쩍이고 그녀는 다시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만약에, 만약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지만 그놈들이 영감님을 괴롭히면 내가 복수해 줄게.”
순식간에 인격이 뒤바뀐 것 같은 이상한 모습이었지만, 그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제미니(Gemini), 쌍둥이자리라는 이름에서 따온 것처럼 그녀는 한 몸 속 안에 두 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혈마 추마걸은 그 걱정을 단번에 끊어 냈다. 초짜 빌런에게 당할 정도로 그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트릭스터가 물었다.
“그렇게 알아보고 난 다음에 어쩌게?”
그의 손에서는 어느샌가 나타난 동전이 반짝이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동전을 튕긴 그가 말했다.
“역시 영입인가?”
탑이었던 이를 죽였으니, 벨츠머츠가 탑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트릭스터가 말한 영입은 다른 의미였다.
“여기로 데리고 온다고?”
그렇게 물은 큐브가 덧붙였다.
“도살자, 그 친구는 죽을 때까지 여기 한 번을 못 밟아 봤는데 말이야.”
“그 자식은 더럽잖아.”
제미니가 덧붙였다.
“더럽고 시끄럽고 예의도 없고 무례하기나 하고!”
쉴 새 없이 그 작은 입에서는 도살자를 향한 험담이 튀어나왔다. 트릭스터가 동전을 위로 튕기며 말했다.
“저승에서 저 말을 들으면 꽤나 눈물이 나겠는데.”
“난 그놈이 싫었어.”
제미니의 말에 트릭스터도 고개를 끄덕였다. 도살자는 영 그들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벨츠머츠는?
“한번 보고 판단하도록 하지.”
혈마 추마걸의 말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탑에서 제일 오래된 인원인 만큼, 이곳에 있는 이들은 추마걸을 제법 믿었다.
“이야기가 끝났다면 이제 가도 될까?”
잔뜩 피곤한 음색이 원탁으로 날아들었다. 인형사였다. 그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제미니가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왜 그렇게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조는 건데.”
그 말에 인형사는 딱히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무시에 제미니는 팔짱을 끼고 토라진 체를 했지만, 그럼에도 대답은 없었다. 그 둘 사이에 맴도는 묘한 분위기를 포착한 트릭스터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안건이 하나 더 남았어.”
“뭔데?”
“설 의원이 연락을 해 왔거든.”
“그 인간이 또 왜?”
그렇게 물은 제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덧붙였다.
“또 저번처럼 눈먼 돈을 주워 먹을 기회라도 있대?”
탑을 이용해 한탕을 해 먹겠다고 접근하는 사람이 그 혼자만인 것은 아니지만, 설록진은 그중에서도 제법 특별한 축이었다.
외면하기에는 제법 먹음직스러운 먹잇감들을 던져 줬기 때문이다. 그림자 속에서 트릭스터가 말했다.
“벨츠머츠에 대해서 묻던데.”
그 말에 제미니는 실망했다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도 그 녀석들에 대한 건 잘 모르잖아. 이거 영 모양 빠지겠는데. 아는 게 없다고 말하기도 좀 그런데…….”
기가 죽었던 것도 잠시 제미니가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영감님이 여기로 그놈을 데리고 오면 되지!”
“그럼 그 대답은 그 이후로 미루는 걸로 하고.”
“이제 정말 끝인가?”
큐브는 인형사의 눈치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아까부터 인형사 쪽에서 영 칙칙한 기운이 흘러나와 더는 모르는 척을 하기 힘들었다.
트릭스터가 말했다.
“설록진 의원이 그러더라고…….”
“빨리빨리빨리!”
“S급 루키를 사냥하는 일에 관심 있냐고.”
그 말에 원탁에 둘러앉은 빌런들의 눈이 반짝였다. 제미니는 물론이고, 점잔을 빼고 있던 큐브, 그리고 힘없이 늘어져 있던 인형사마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주 관심이 많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