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89화 (89/352)

제89화

#31 포장의 달인 (1)

다음 날, 나는 거실로 향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커피를 내려 먹는 나를 보며 한서현은 뒤로 넘어갔다.

“보, 보스! 파, 팔이!”

“어, 멀쩡해졌다.”

“왜 그렇게 새삼스럽지도 않은 얼굴인데요! 어젯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말에 나는 먼 산을 바라보았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어차피 재생될 테니까 상관없다고 마나 회로를 터트려 댄 건 확실히 미친 짓이었다.

━초재생이 제때 개방되지 않았으면 네놈은 죽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한 끗 차이였는걸. 그 한끝을 위해 시간을 내버리고 싶진 않았다.

한서현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해진 내 팔이 신기하다는 듯 바라봤다.

“정말 이제 안 아파요?”

“그래, 멀쩡해졌어.”

“오.”

어느샌가 옆에 나타난 김재호도 내 팔을 쿡쿡 찔러 보고 있었다. 나는 귀찮게 구는 두 놈을 떼어 놨다.

어쨌거나 내 회복도 마무리됐겠다, 이제는 수습이라는 것을 좀 할 때다. 그 전에 알아봐야 할 게 하나 있었다.

“도살자 시체는 어디에 있대?”

“그놈 시체요?”

“그래, 우리가 버리고 왔잖냐. 그걸 누가 수습했대?”

“그건 도대체 왜…….”

“당연히 너 때문이지. 고등급 각성자의 시체를 얻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게다가 그놈은 가족도 없는 빌런이잖아. 우리가 양도받기도 쉬울 거 아니야.”

한서현은 이번 일로 역량이 늘어 스켈레톤을 3기는 더 운용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그러면 제대로 된 걸로 구해다 줘야지.

내가 무슨 이유로 박상편의 시체를 찾는지 알게 된 한서현은 울상을 지었다.

“으으! 그 사람은 싫은데.”

“그래도 생전에 제법 잘나가던 놈이잖아. 스켈레톤으로 만들기 딱 좋을걸.”

한서현은 싫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알아볼게요.”

그렇게 말한 한서현의 곁으로 쥐들이 몰려들었다.

“워우.”

전에는 대여섯 마리가 고작이었던 것 같은데 못해도 서른 마리는 넘어 보였다. 그만큼 한서현의 기량이 상승했다는 거겠지.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거기에서 시체를 훔친다.”

“네!”

━시체를 훔치자는 소리에 저렇게 해맑은 얼굴을 하는 애는 없을 거다.

‘그동안 했던 걱정이 없어져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나는 한서현을 이해하기로 했다. 확실히 내 팔이 돌아오고 나서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니까.

“그만 주물러라.”

나는 아직까지도 내 팔을 툭툭 건드려 대는 김재호에게 말했다.

김재호는 멋쩍은 얼굴로 내게서 멀어졌다.

그날 밤, 우리는 한서현이 찾아낸 영안실로 향했다.

“생각보다 엄청 빠르네.”

“정보가 많이 샜더라고요. 아무래도 전국적으로 관심이 있는 사건이니까요.”

사람들 대화를 몇 번 듣다 보니 바로 위치가 나왔단다. 역시, 한군데에 처박힌 걸 찾아내는 데에 한서현의 능력보다 뛰어난 건 없다.

도살자 박상편은 가족이 없었다. 시체를 수습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함부로 없애 버리기도 그랬는지, 아니면 아직까지 조금 더 조사할 게 남아서 그랬는지 박상편의 시체는 아직까지 영안실에 안치돼 있었다.

영안실의 감시를 뚫고 안으로 습격하는 건 엄청나게 쉬웠다.

애초에 시체들만 두는 곳이라 감시가 허술하기도 했고 우리의 잠입 능력이 그동안 꽤 많이 발전했기도 했다.

영안실에 도착한 나는 바로 박상편의 시체가 들어 있는 곳의 문을 열었다. 염동력으로 박상편의 시체를 바닥으로 내린 나는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으.”

도살자의 시체는 딱 봐도 상태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수십 개의 얼음 창에 찔리고, 하운드에 물어뜯기고, 김재호에게 베이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심장을 스스로 찔렀지.

그리고 그 위에 떨어진 천벌과도 같았던 번개.

이리저리 파헤쳐지고 타들어 간 시체에는 성한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이거 스켈레톤으로 만들 수 있겠냐?”

내 질문에 한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뼈는 상한 부분이 없으니까요. 어, 그리고 번개를 맞았던 게 오히려 좋게 풀린 것 같은데요. 시체에 남아 있는 잔존 마나가 가득해서 스켈레톤이 아니라 그 위 단계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네, 확실히 등급이 높은 시체가 좋네요.”

시체를 두고 하기에는 정말 비인간적인 대화지만, 눈앞의 놈은 죄 없는 사람들을 수없이 학살한 범죄자였다.

이왕 죽은 거 세상을 구하는 일에 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이보다 더 좋은 재활용 방식도 없을 거라고.

“근데 스켈레톤을 만들려면 동의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

문제는 계약을 하려면 이놈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건데.

아무래도 우리의 손에 죽었으니 순순히 동의해 주진 않겠지. 생전의 성질머리를 생각하니 아주 진절머리가 났다.

“아, 그건 그런데……. 어떻게든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설득이야 네 몫이지. 일단 담자.”

나는 경량화 주머니에 시체를 구겨 담았다. 시체를 옮기는 건 힘이 센 김재호의 몫이 되었다. 김재호는 영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게서 얌전히 시체를 받아 갔다.

영안실을 떠나기 전 나는 그곳에 우리의 문양을 남긴 뒤 메시지를 새겼다.

그동안의 침묵을 깨는 메시지였다.

* * *

“벨츠머츠가 나타났습니다!”

그 소식에 도채희는 하던 일도 때려치우고 곧바로 영안실로 향했다. 자세한 내용은 가면서 들어도 됐으니까. 현장에 도착한 도채희에게 아직은 어리바리한 팀원 김용원이 물었다.

“박상편의 시체를 대체 왜 훔쳐 간 걸까요?”

“벨츠머츠에는 네크로맨서가 있잖아.”

벨츠머츠는 도살자의 시체를 가지고 간 게 자신이라는 걸 알리고 싶었는지 친히 그동안 자신들의 현장에 남겼던 서명을 똑같이 남겼다. 다른 현장과 다른 것은 그 아래 영어로 된 짧은 메시지가 하나 더 남겨져 있었다는 것.

「You can't run away from Tod.」

“토드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그 영어를 해석하고 있는 도채희의 뒤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거. 아무래도 독일어 Tod 같단다. 죽음이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해석하자면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뜻이지. 실제로 맞는 말이야. 박상편은 죽었지만, 그나마도 언데드로 만들어서 시체까지 끌어갔잖냐.”

박철완은 현장에서 자신에게 인사하는 팀원들에게 대충 눈짓으로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니까 죽음으로부터도 도망칠 수 없다는 거에서, 이 죽음이라는 게 한서현을 말하는 거라고요?”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앞이 대문자잖아. 이름이라는 거야. 토트. 그게 한서현의 빌런명이 되겠지.”

그렇게 말한 박철완이 덧붙였다.

“박상편의 시체를 언데드로 만드는 거야, 현장에서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일부러 영안실을 덮친 것도 이 사실을 최대한 과시하고 싶기 때문이겠지.”

도살자와의 결투 이후 일주일 동안 침묵한 벨츠머츠에 대한 관심이 제일 높아졌을 때, 이런 사건을 터트린 거다.

도채희는 이채가 인 눈으로 박철완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박철완의 추리력은 대단했다. 그동안의 경력을 허투루 쌓았다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박철완은 순식간에 현장을 정리하고 결론을 내놓았다.

한숨을 내쉰 박철완이 말했다.

“그놈들 속이 뻔히 보여서 되도록 이야기가 퍼지는 걸 막고 싶지만…….”

벨츠머츠에 대한 전 국민의 관심은 막는다고 막아질 정도가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곧 퍼지겠지.

호사가들은 이 이야기를 퍼다 나를 거고, 거기에 멋대로 살을 붙일 거다.

“자극적으로 떠들어 대기에 이보다 더 좋은 소재는 없을 테니까.”

“하긴, 그렇겠죠.”

멤버 중 한 명이 공개 수배가 됐음에도 벨츠머츠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공개 수배된 한서현을 이용해서 이런 경고까지 남겼다.

오히려 공개 수배되고 한서현에 대한 정보가 퍼지길 기다리기까지 한 것 같은 대처다.

한서현에 대한 정보가 퍼지지 않았다면 시체가 사라져도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알게 됐지.

저 시체로 벨츠머츠가 무슨 짓을 할지.

“하아.”

도채희의 입에서 또 한 번 한숨이 나왔다.

“CCTV에 잡힌 건 없어. 깔끔하다.”

“정보가 샌 곳은요? 대체 여기는 어떻게 알아낸 거래?”

“그것도 모르겠단다. 옥션 때 같아.”

정말 감탄이 나올 정도로 깔끔한 일 처리였다. 기껏 현장으로 뛰어왔더니, 또 막힌 길이다. 도채희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이코메트리 능력자는 섭외가 아직도 안 됐어요?”

“내일 온단다, 내일. 지금 뻗어 있대.”

사이코메트리는 쓰는 본인에게 부담이 많은 능력이었다. 쓸 때마다 원치 않는 정보도 쏟아져 들어오는 탓에 두통을 늘 달고 살았고, 끔찍한 장면을 수도 없이 보는 터라 정신력도 깎여 나갔다.

그런 만큼 아무 현장이나 들어가지 않는 귀하디귀한 인재다.

온 국민의 관심이 이 사건에 쏠린 만큼, 사이코메트리를 배정받는 데에 성공했지만 무턱대고 모든 현장을 읽어 낼 수는 없단 뜻이다.

도채희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박철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기로 꼭 불러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말이지. 이런 데서 읽어 낼 거야 뻔하잖아. 그놈들이 얼굴을 남겼을 리도 없고.”

“그래서 놈들이 왔을 게 뻔한 이곳에 안 불러요?”

“누가 안 불렀대? 불렀으니까 그 입 좀 집어넣어라. 좀 있으면 아주 나를 찌르겠다.”

도채희는 그 말에 겨우 입을 집어넣었다.

“예.”

그래도 혹시 모르지. 그 사이코메트리가 그들을 체포하는 데에 결정적인 증거를 제보할지.

아직도 도채희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 * *

도채희와 박철완의 예상대로 이 뉴스는 곧장 세상으로 퍼졌다.

죽음으로도 도망칠 수 없다니!

네크로맨서가 있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이용할 줄이야!

몇몇은 역시 벨츠머츠는 지독한 빌런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몇몇은 어차피 빌런을 상대한 건데 뭐가 문제냐고 말했다.

어쨌거나 대중들은 이 사실을 퍽 끔찍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대중들과는 달리 이 사실을 기껍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확실히 미쳤다니까!”

탑에 오른 이들은 벨츠머츠의 행동을 반겼다. 특히 제미니는 벨츠머츠의 방식을 진심으로 천재적이라고 생각했다.

“아줌마랑도 비슷하지 않아? 아줌마가 인형을 만드는 것처럼 저쪽은 적으로 만든 자신만의 군대를 끌고 다니는 거지.”

제미니의 말에 인형사는 고개만을 끄덕였다. 이미 오래전 정염을 잃어버린 그녀의 눈동자는 이런 상황에서도 깊게 가라앉아 있기만 했다.

제미니는 그녀의 재미없는 반응에 저도 모르게 지금은 비어 버린 의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영감님이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 시각, 제미니가 애타게 기다리는 그 영감님은 벨츠머츠와 도살자가 맞붙었던 그곳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현장을 깨끗하게 치운다고 노력했지만, 사건이 일어난 지 열흘이 채 되지 않은 때였다. 아직 전투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검은 로브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땅에 스며들어 있던 혈액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오래전 말라붙은 것이 분명한데도 추마걸의 손끝에 모이는 핏방울들은 마치 조금 전에 흐른 것처럼 붉은빛이 선명했다.

추마걸의 손끝을 따라 핏방울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핏방울이 인도하는 방향을 따라 추마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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