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99화 (99/352)

제99화

#33 세레나의 빙궁 (6)

공략 팀이 우리를 지나쳐 복도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본 나와 한서현은 숨을 죽였다.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지만, 다행히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그 뒤부터 우리는 천천히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들키지 않는 게 중요했기에 우리는 거리를 꽤 뒀다.

하지만 감시의 눈길을 놓치진 않았다. 내 눈은 지원 팀을 향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세 사람에게.

또 한 번 안전한 곳에 몸을 숨긴 나에게 한서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세 사람이 몰래 빠져나왔어요.”

공략대 사람들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이 빙궁 전체에는 한서현이 깔아 놓은 모래들이 구석구석 숨겨져 있었다. 그림자 사이에 숨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모래들이 완벽한 CCTV가 되어 주었다.

덕분에 나는 한서현을 통해 그들의 움직임과 대화를 실시간으로 전달받고 있었다.

공략대 사람들은 앞에 정신이 팔려 지원 팀 세 명이 빠져나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하긴, 순간적으로 마나를 써서 자신들의 부재를 감춘 모양이니. 모를 법도 했다.

눈으로 직접 그놈들을 보고 싶은데, 혹시나 들킬까 봐 나갈 수 없었다.

“나와서 뭘 하는데?”

“이제 시작한대요.”

대체 뭘 시작할 생각이지? 뭐가 됐든, 좋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든다. 언제든 튀어 나갈 수 있도록 몸에 마나를 끌어 올린 채 나는 한서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때 한서현이 눈을 붙잡고 갑자기 앞으로 쓰러졌다.

“헉!”

“왜 그래?”

내 말에 한서현은 몸을 부들부들 떨 뿐 말이 없었다. 나는 한서현의 몸을 잡아 끌었다. 검은색 불꽃이 타오르는 동공이 괴상할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서현아! 괜찮아?”

나는 한서현을 몇 번이고 불렀지만, 한서현의 대답은 없었다. 젠장, 나는 입술을 물어뜯으며 배낭을 뒤졌다.

외상은 없는데, 뭐지. 왜 갑자기 이러는 거지? 누군가 모래를 건드린 건가? 가방에서 포션을 꺼낸 나는 한서현의 입에 포션을 물려 주었다.

그때 레이가 내 머릿속에 말했다.

━이 주변에 환영이 깔렸다.

환영이라고?

나는 눈을 찌푸렸다. 내 눈에는 조금 전과 다를 게 전혀 없어 보였던 거다.

━네놈에게는 정신계 방어가 있지 않느냐.

아, 맞다. 불굴의 신념. 무려 S급의 패시브 스킬. 워낙 정신계 스킬에 당할 일이 적어서 까먹고 있었는데, 환영 또한 내 정신에 관여하는 것이니 나에게는 안 듣는 모양이다.

대체 무슨 환영을 보길래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는 건지. 포션을 다 먹였음에도 한서현은 여전히 정신을 차릴 기색이 아니었다.

하긴 포션은 외상에 관여하는 거니까.

번개를 모아 쏘자, 한서현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것도 꽝인가. 그렇게 생각할 무렵, 한서현의 눈동자가 서서히 내 얼굴로 향하기 시작했다.

“헉, 헉.”

“정신이 좀 들어?”

한서현은 덜덜 떨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보스, 보스는…….”

“뭐.”

“이, 이 주변에 있는 게 아, 안 보여요?”

“뭐가.”

“지금 우리 주변에 모, 몬스터가 가득하다고요!”

스태프를 쥔 한서현이 마나를 끌어 올렸다. 검은 모래가 우리 주변에 가득 찼다. 뾰족뾰족한 모래가 곧 주변을 부수기 시작했다.

아하.

나는 한선현의 얼굴을 잡아끌었다.

“정신 차려. 네가 뭘 보고 있든 그건 환영이야. 이 주변엔 아무것도 없어.”

“네? 하, 하지만…….”

“내 말 믿지? 아니, 차라리 눈을 감아. 그게 낫겠다.”

“흐으, 눈, 눈을 감으면, 어, 으으. 소리가…….”

덜덜 떨면서 한서현은 눈을 감았다. 차라리 몬스터들을 안 보는 게 낫겠다. 역시 중2병 애들이 멘탈이 약하다는 건 사실인가. 죽음이니 뭐니, 멋진 척은 다 하더니.

다행히 눈을 감은 한서현은 내 눈빛을 눈치채지 못했다.

모든 게 환영이라는 걸 겨우 받아들였는지, 한서현의 떨림은 점차 괜찮아졌다. 아직도 중간중간 ‘소리’가 난다면서 몸을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이 저택 전체가 되살아난 것 같아요. 제 눈앞에 나타난 몬스터는 아주 끔찍하게 생겼었고……. 어, 근데 이거 다 가짜라고 했잖아요? 그럼 그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것도 가짜인가?”

“무슨 소리야?”

한서현은 나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아까 공략 팀이 드디어 연회장에서 이 빙궁의 보스 몬스터라고 생각되는 인간형 몬스터를 마주쳤다는 것.

그래서 지금 전투 중이라는 것까지.

하지만 저택이 ‘깨어나는 것’ 자체가 환영이었다면, 그 전투도 가짜일 확률이 높았다.

나는 곧바로 놈들의 계획을 깨달았다.

“젠장, 지치게 만들려는 거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놈들, 어디에 있어?”

“모, 모르겠어요. 순간 저도 환영에 당해서 놓쳐서. 아, 모래로 찾아볼게요.”

“너는 그놈들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 나는 일단 그놈들을 멈출 테니까. 일단, 네가 보는 모든 건 환영이라는 걸 잊지 마. 사람들을 빼고는, 알겠어?”

나 혼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도, 탑에서 온 그 빌런들을 상대하는 것도 무리다.

유선제와 김대권이 지치면 끝장이라는 거다.

나는 복도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콰아앙!

퍼어엉!

요란한 소리가 나를 맞았다.

연회장에서 허공을 향해 온갖 공격을 퍼붓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저기요, 그건 환영입니다. 멈추세요! 그 앞엔 아무것도 없다고요.”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도 내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닿지도 않게 된 모양이다.

“아니, 거기에 힘 낭비를 하지 말라니까!”

나는 가까이에 가서 모두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내 말을 듣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환상이야! 머저리들아, 다 환상이라고!”

소리로는 이 사람들을 깨울 수 없는 모양이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유선제의 곁으로 걸어갔다. 그 누구도 내가 보이지 않는지, 나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선제의 멱살을 잡은 내가 소리쳤다.

“허공에 힘 빼지 말라고, 새끼야!”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유선제의 눈이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누구…….”

나는 유선제를 내팽개치고 곧바로 김대권에게 향했다. 김대권은 도저히 가까이 다가갈 자신이 없어 물세례를 퍼붓기로 했다.

촤아아악.

“헉!”

내 물세례에 김대권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입을 벌렸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나는 물을 흩뿌렸다.

“뭐지?”

“여러분들은 속은 겁니다. 저건 다 환영이라고요. 보세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유선제와 김대권은 금방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멘탈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환영이 보이는 모양이지만, 가장 강한 두 S급 헌터들이 멈추니 곧 상황을 이해한 듯 가만히 나를 보았다.

“뭐야, 이거.”

천장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작전에 없었는데.”

검은 그림자의 얼굴로 자신을 가린 남자. 환영을 쓴 걸 보니 확실하다.

“트릭스터.”

“날 아는 사람인가? 아, 곤란해.”

내 말에 트릭스터는 웃었다. 곤란하기는. 설마하니 이런 방식으로 김대권과 유선제의 힘을 빼놓고 접근할 줄이야.

“마나 얼마나 남았습니까?”

내 말에 사람들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유선제는 얼굴을 구긴 채 나를 노려봤다.

좋아, 저 표정을 보아하건대 힘이 전부 빠진 모양이로군. 어떻게 하지, 내가 그렇게 머리를 굴릴 때였다.

“헉!”

김대권이 심장을 움켜잡았다. 그의 뒤에 붙어 있던 검은 그림자.

“이, 이런?”

피부가 순식간에 몸 안으로 말려 들어가고 몸 안에 있던 장기들이 모두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큐브, 조립가의 짓이다.

김대권은 그렇게 절명했다. 환영에 당해 당황했던 사이 틈을 노리고 들어간 거다. 막을 새도 없었다.

김대권을 해치운 큐브는 나를 무시한 채 뒤에 있는 지원 팀들을 향해 움직였다.

나는 얼음 창을 꺼내 그를 노렸지만. 그가 앞에 있는 지원 팀의 몸을 잡아끄는 게 빨랐다.

또 한 번 ‘안’과 ‘밖’이 뒤바뀐 지원 팀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절명했다. 그의 앞에 서 있던 전투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트릭스터의 환영에 걸린 듯 또 한 번 공중을 바라보며 비명을 질렀다. 그 사이로 검을 든 트릭스터가 가볍게 몸을 휘저었다.

그때마다 생명이 꺼졌다.

콱, 콰악!

나는 그들을 피해 얼음 창을 연달아 내리꽂았지만, 큐브는 그때마다 사람들을 잡아끌거나 그 뒤로 숨거나 해서 얼음 창을 피했다. 오히려 내 얼음 창으로 사람들을 던져 버리기도 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혜원이 그에게 달라붙었지만, 이번에는 트릭스터가 나섰다. 트릭스터의 분신이 이혜원을 밀쳤다.

“으윽!”

이혜원의 종아리에는 트릭스터의 분신이 어느새 꽂아 넣은 단검이 박혀 버렸다. 유선제는 번개를 끌어 올렸으나 번개는 저런 난전에는 좋지 않았다.

“꺄하하!”

그때 저택의 바깥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불길함을 느낀 나는 바깥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제미니…….

짐꾼들이 모두 살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들고 왔던 식량까지 모두 불타고 있었다. 설마하니 짐꾼들까지 노리다니.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너희도 이 게이트가 공략되지 않으면 나가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

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지르는지 모르겠다.

저 셋은 여기에서 유선제와 함께 목숨을 불사르기로 했단 말인가?

“누가 그래? 우리가 여기에서 죽는다고?”

그때 트릭스터의 분신이 한 남자를 붙잡는다. 지원 팀의 로브를 입고 있는 어린 낯의 남자였다.

“으아악!”

저 남자는 왜?

처음에는 트릭스터가 그 남자를 죽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다들 안녕!”

트릭스터는 그 남자를 데리고 자신의 ‘분신’이 있는 바깥쪽으로 순간 이동했다.

트릭스터의 재능은 환영. 다른 이들을 환영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지만, 환영으로 분신을 만들어 근거리 텔레포트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저 능력으로는 바깥으로 나갈 수 없을 텐데.’

트릭스터의 텔레포트는 분신과 분신끼리, 일정 거리 안에서만 가능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혜원 팀장이 소리쳤다.

“조금 전에 저 남자가 데리고 간 지원 팀! 그의 능력은 탈출입니다!”

그 말에 내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탈출.

언제 어디에 있든 자신이 지정한 안전한 곳으로 도주할 수 있는 재능.

트릭스터에게는 공략 따위는 필요 없었던 거다. 여기에서 공략을 망치기만 하고 ‘도망칠’ 계획이 그에겐 있었을 테니까.

설록진이 이 모든 걸 알려 줬겠지.

뒤늦게 이 모든 걸 깨달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탑의 인원들은 이미 탈출의 재능을 가진 남자와 함께 사라진 다음이었다.

“X발.”

욕이 절로 나왔다.

* * *

김대권은 죽었다.

짐꾼들은 모두 사망했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지원 팀 몇 명과 이혜원, 유선제뿐이었다.

이 인원으로 S급, 그것도 보스에게 모든 힘이 몰린 스테이지 공략이다.

차라리 소수의 개떼가 나오는 형식이면 공략이 쉬웠을 거다. 약한 이들과의 물량전이라는 키워드에서 한서현은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니까.

하지만 이렇게 강한 소수가 적이라면, 한서현은 물론이고 나 또한 그리 도움이 되지 못할 거다.

하지만 이렇게 있을 순 없다.

나는 정신을 차렸다.

“그, 그러고 보니 당신은 누구시죠?”

이혜원 팀장이 뒤늦게 나에게 물었다.

“그래, 네놈은 누구지?”

삐딱하게 선 유선제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일단 상황을 보시면 알겠지만, 여러분의 적은 아닙니다.”

“적이 아니래도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이지.”

원래는 몰래 이놈들을 구해 줄 생각이었는데. 나는 한숨을 쉬며 적당한 변명을 꺼냈다.

“전 각성자 협회에서 나왔습니다.”

몇 년만 지나도 타락해 버려 오물을 뒤집어쓰고 몰락하는 단체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각성자 협회의 평판은 그리 나쁘지 않다.

“각성자 협회?”

“예. 전 탑을 쫓는 요원입니다.”

“이름은요?”

“스미스입니다.”

“하! 그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나는 이혜원의 얼굴을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혜원은 내 얼굴을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상황에선 아무래도 상관없겠죠.”

거짓말이 완벽하게 먹혀들진 않았지만, 의심을 더는 데에는 성공했다.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탑의 빌런들이 이번 공략을 망치려고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잠입해서 들어와 있었습니다. 과연 그 첩보는 틀리지 않았군요.”

“틀리지 않으면 뭘 합니까! 이렇게, 이렇게 됐는데…….”

그렇게 말하는 이혜원의 목소리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겉으로 봐서는 엄청나게 든든해 보이는데 멘탈은 별로 안 좋은 모양이다.

━애초에 저게 정상이지! 여기에서 다 죽게 생겼는데, 네 쪽이 지나치게 침착한 거다!

“여기에서 죽을 순 없죠. 그러니 이 빙궁을 어떻게든 공략해 보도록 합시다.”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이 게이트를 어떻게든 공략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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