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41 악당의 방법 (3)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보자마자 금 박사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여기에는 왜 또 온 거야!”
“거, 손님이 왔는데 이렇게 무안을 주깁니까?”
“손님도 손님 나름이지!”
치를 떨면서도 금 박사는 순순히 문을 열어 주었다. 소파에 앉아 있으니 물까지 내왔다.
“저번에는 비싼 차라도 내주더니, 나 혼자 왔다고 차도 안 주는 겁니까?”
“네놈한테는 물도 아까워!”
그 말에 나는 물잔을 바라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어, 농담인데. 차 갖다줄까?”
적당히 상처받은 체를 하니 쩔쩔매는 꼴이 웃겼다. 아무 말 없이 있자 금 박사는 재빨리 차와 케이크를 내놨다.
“프렌치 얼그레이랑 딸기 생크림 케이크.”
“예, 고맙습니다.”
케이크까지 내온 걸 보니 정말로 미안하긴 한 모양이다. 애초에 마음도 약하면서 쓸데없이 매정한 체를 하니까 저런 일이 생기지.
그나저나 30대 아저씨 집에 이런 케이크는 왜 있는 거야? 쓸데없이 찻잔도 예뻐서 더 느낌이 이상하다.
포크로 케이크를 크게 떠서 한 입 먹은 금 박사가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하암, 이 집 케이크 정말 맛있다니까. 매번 먹어도 질리지 않…….”
그렇게 말을 잇던 금 박사가 퍼뜩 하고 정신을 차렸다.
“잠깐, 그나저나 오늘은 왜 온 거냐?”
“이래저래 이야기해 둘 게 많아서요.”
“너랑 나랑?”
금 박사는 과장된 표정으로 나와 자신을 한 번씩 가리키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예.”
“얘, 얘기할 게 뭐가 있어. 너랑 내 사이에 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면서 순정 만화 속 여자 주인공처럼 손가락 부딪치지 마! 느낌이 이상해지잖냐! 나는 속으로 그렇게 외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저 인간한테 말려들면 안 된다.
“이번 일, 기사로 봤죠?”
“무, 무슨 기사.”
온 세상이 내가 저지른 일로 난리가 났는데, 여태까지 모르고 있다고? 지금 자기 손이 벌벌 떨리고 있다는 건 아는지, 모르는지.
정말로 금 박사는 최악의 거짓말쟁이였다.
나는 물었다.
“어땠습니까?”
“뭐에 대해서 말하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봤잖아요.”
내 말에 금 박사는 마시던 찻잔을 밑으로 내려놓았다. 동글뱅이 안경 속에 가려졌던 눈알이 반짝 빛났다. 푸욱, 한숨을 내 쉰 금 박사가 장난스러운 태도를 집어던지고 말했다.
“현직 국회의원을 그런 식으로 처형하다니. 진짜 미친 짓이었어.”
“아시잖아요, 그놈.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나쁜 놈이었다는 걸.”
“나쁜 놈이라는 이유만으로 국회의원들을 죽여 댔다간, 한국에 국회의원들이라는 족속들이 멸종되고야 말걸.”
그 말대로 지금 대한민국의 국회의원들 태반이 도둑놈이긴 하지. 확실히 나쁜 놈들이라고 다 죽여 댔다가는 나라가 무너질 거다.
“그래도 뭐, 조금은 속 시원했던 거 같기도 하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중2병 오타쿠한테는 먹힐 만한 연출이라고 생각했지.
기분 나쁠 정도로 붉게 달아오른 볼을 긁적거리며 말하는 금 박사의 꼴은 영 보기 거북했지만, 나에게 나쁜 반응은 아니다.
나는 금 박사에게 말했다.
“그 속 시원한 일, 앞으로도 몇 번인가 해 볼 생각인데 같이 해 볼 생각 없어요?”
“뭐?”
원래는 이 금 박사에게 이혜원과 남주현을 저번처럼 버리고, 아니, 맡기고 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냥 모르는 척을 할까 했다.
━유기가 점점 익숙해지는구나.
‘유기라니요. 위탁입니다, 위탁.’
그래도 나름 빌런을 표방하고 있는 우리 벨츠머츠의 기지 안에 외부자를 들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중에 우리 기지 위치를 다른 데에 불어 버리면 어떡해.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비밀을 지키는 방법은 죽여 입을 막는 것뿐이다.
겨우 우리 편으로 만들어 놨는데 그렇게 보내기엔 너무 아깝지 않나.
━네놈이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소름이 돋는단 말이지.
‘그래서 그 꼴 안 보려고 이 노력을 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벨츠머츠 기지 안에 누군가를 들이는 건 안 된다.
그렇다고 아무 데나 데려다 놓기에는 적이 많다는 게 문제고.
금 박사야말로 완벽한 위탁 보호처였다. 다시 한번 말한다. 유기가 아니다. 위탁 보호다.
재력도 있는 데다가, 음지와 연이 닿아 있어 유사시에 물리적인 도움까지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흔한 줄 아냐고.
게다가 금 박사는 저래 보여도 마음이 약하다.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표방하는 주제에 직접적으로는 사람 한 번 죽여 본 적 없을걸.
━저쪽도 정상은 아니던데. 직접 죽이지만 않을 뿐, 친구를 통해서는 몇 번이든 사람을 정리했을 것 같다만.
‘뭐, 친구 좋다는 게 뭡니까. 그 정도 강단도 없어서야 여기저기 휘둘리기만 할 뿐이라고요.’
생각을 정리한 나는 금 박사를 향해 말했다.
“이대로 연을 끊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아까워서 말이죠. 금 박사님처럼 능력도 되는 데다가 나랑 취향도 딱딱 맞는 사람 찾기가 참 어렵거든.”
급할 때 사람들을 던져 놓고 갈 위탁 보호소라고 생각하기에는 암만 생각해도 금 박사라는 인물이 아까워서 말이지.
나는 슬쩍 금 박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랑 일하면 재미있는 일이 잔뜩일 거예요. 봤잖아요, 이번 일. 솔직히 말해서 이번 일은 좀 재미가 없었지. 왜냐? 나랑 같이 더 재밌게 일해 줄 사람이 없었거든.”
금 박사는 전형적인 쾌락주의자다. 주변에 늘 즐거운 일이 빵빵 터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일하고 있는 곳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야, 백도산이 운영하고 있는 흑표파, 검은 그림자는 이미 완전히 안정기에 들어서서 별다른 사건ㆍ사고가 일어나지 않거든. 사고가 일어나도 백도산이 알아서 처리할 테고.
거기에 백도산은 효율적인 사람이라서, 금 박사의 장난을 받아 줄 생각도 없을 거다.
하지만 나는 다르지. 괜히 금 박사가 내게 무조건적인 호의를 보낸 게 아니라는 뜻이다.
중간에 백도산이 끼어들어 경고를 날렸다지만, 여전히 내 쪽으로 회유할 건덕지는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나와 연을 끊을 생각이었다면 이혜원을 주저 없이 밖으로 내쫓았을 거다.
━이혜원으로 간을 본 거냐?
‘뭐, 어느 정도는요.’
집 안에 누군가를 들이는 걸 질색하면서도 이혜원을 받아 준 건 나 때문이다.
금 박사는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아하는 쪽이라고 생각한다.
친우의 충고까지 은근슬쩍 무시할 정도로 말이지.
그러니 이만하면 승산이 있지 않나?
“지금 삶이 무척이나 무료하고 지루하지 않아요?”
내 말에 금 박사의 어깨가 떨렸다.
그 반응에 나는 슬쩍 눈을 접어 웃었다.
금 박사를 유혹하는 건 무척이나 간단한 일이다. 왜냐?
저 인간은 지루한 삶에서 재미있는 걸 찾으려고 미친 인간이니까.
“우리랑 함께하면 재밌는 일이 잔뜩 있을 거라니까요?”
“예를 들면?”
“이번 일, 만약 금 박사님이 함께였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어, 어.”
그 말에 금 박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였다면, 조금 더 화려하게 했겠지. 메시지도 좀 더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주변에 시간이 지나면 터지는 폭죽 같은 것도 설치했을 거야. 짜-잔, 이 나쁜 놈의 최후를 보게! 하는 식으로.”
……정말 이 사람은 악취미다.
━그러는 너는 벨츠머츠 메이커라는 촌스러운 문장을 남겼잖냐.
‘저쪽은 폭죽이라잖아요!’
내 쪽이 훨씬 온건하지? 뭐, 그래도 금 박사의 취향은 존중한다. 어떻게든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그 어떤 괴악한 취향이라도 백만 번 존중해 줄 수 있었다.
“솔직히 저번에 금 박사님이 의뢰를 받아 주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우리 애들한테도 금 박사님이 만들어 준 가면을 다 씌워 주면 멋있을 것 같았거든요.”
━진심이냐? 너희가 무슨 파워X인저라도 되냐고.
‘……저 오타쿠를 꼬시려면 이런 말이라도 해야 한단 말입니다.’
“저, 전부가 다 내가 만든 가면을?”
아니나 다를까. 금 박사는 금세 걸려들었다.
“예, 아시잖아요. 최고의 빌런에게는 그만큼 최고의 장비가 필요하다는 거. 박사님이 준 가면 늘 잘 써먹고 있거든요. 이젠 가면만 봐도 다들 덜덜 떤다니까요.”
그 말에 금 박사는 입을 틀어막았다. 귀 끝까지 달아오른 걸로 봐서 저 반응은 ‘찐’이다.
“내가 만든 가면이 공포의 상징이 된다, 그 말인가.”
“예, 그럼요. 죄를 지은 인간들이라면 보기만 해도 덜덜 떠는, 그런 상징이 될 겁니다.”
금 박사는 딱히 정의로운 인간이 아니었지만, 자신이 만든 물건이 그런 상징이 된다는 걸 참을 수 없을 거다.
“젠장, 너희와는 진짜 이제 엮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다 넘어왔다.
“그래도 말이야, 젠장. 참을 수 없네, 이거. 아무도 내 꿈을 이뤄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한참이나 중얼거리던 금 박사가 들뜬 얼굴로 말했다.
“컬러는?”
“컬러요?”
“그래, 레드는 아무래도 너겠지? 아직 셋밖에 없으니까 나머지는 그린, 블루로 할까.”
“……저희는 일단 빌런이니까 검정색으로 갈까 하는데요.”
누굴 유치 뽕짝 전대물로 만들 셈이냐!
━그러는 너는 심각할 정도의 검정 집착증이다!
여느 때처럼 나는 레이의 투덜거림을 뒤로 넘겼다.
“그보다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말입니다.”
드디어 집 나간 엔지니어가 돌아왔다.
필요한 게 잔뜩이었다.
* * *
“무슨 일이야?”
[어엉, 아무래도 말이다. 나 걔네들 좀 도와줄까 하고.]
백도산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금 박사가 말하는 걔네들이 누구인지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했지만, 이어지는 말에 백도산은 그제야 금 박사의 말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벨츠머츠, 그놈들이랑 한배를 탈 생각이냐?”
[한배까지는 아니고! 그냥 그놈들 하는 꼴이 재밌어서 말이지.]
지루한 걸 싫어하고 재미를 좇는 놈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놈들과 또 만났을 줄은 몰랐다. 아니, 금 박사를 꼬여낸 건 그놈이겠지.
[네 말도 일리가 있는데 말이야, 그래도 그놈들을 지켜보자니 너무 재밌어서. 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달까.]
백도산의 생각이 이어지는 중에도 금 박사의 말은 길게 이어졌다. 잔뜩 흥분한 채로 나불대는 걸 보니, 이미 말리는 건 늦었다.
조금은 서운할지도.
하지만 원래 이런 녀석이라는 걸 알지 않았나.
백도산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말을 잘 따르는 듯해도 이런 일에 있어서는 고집을 꺾지 않는 금 박사를 알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취향이 이상하더라니.
오랜 친구 사이여도 도통 이해할 수 없던 괴악한 취향을 떠올린 백도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벨츠머츠라. 솔직히 제 친구의 곁에 두고 싶지 않은 놈들이었다.
그놈들은 위험했다. 온몸에 불을 붙인 짚을 두르고 화약고로 돌진할 것 같은 놈들이랄까.
차라리 온전한 빌런이라도 되면 모르되, 어설프게 이 세상을 위해 움직이는 꼴이 특히 그래 보였다.
하지만 금 박사, 그의 친우가 행복한 일이라면야.
“뭐가 됐든 좋으니까, 다치지 마. 금찬명, 네가 다치면 네가 뭐라든 그 녀석들 내 손으로 찢어 죽이러 갈 테니까.”
오랜만에 들은 제 이름에 금 박사, 금찬명은 어색하다는 듯이 웃었다.
[웬일이냐, 네가 내 이름까지 부르고.]
“약속해. 몸조심하겠다고.”
[내 걱정은 말라니까.]
전화를 끊고 백도산은 생각에 빠졌다.
그나저나 이놈이나, 그놈이나.
슬쩍 백도산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놈은 내가 직접 찾을 거니까
괜히 끼어들지 말고
댁 일이나 잘해.」
귀엽지도 않은 동생 놈은 제 돈을 떼먹은 사람이 누구인지도 전혀 모르고 이런 큰소리나 치고 말이지.
강이신.
벨츠머츠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놈이 제 이복동생의 돈을 떼먹은 사람이란 걸 알았을 때 얼마나 우스웠던지.
‘찬명이더러 그놈한테 빚이나 갚으라는 말이라도 전해 주라고 할까 했는데.’
백도산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충고를 무시하는 두 사람의 일에 끼어드는 건 이만하기로 했다.
삐친 건 절대 아니었다.
음,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