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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56화 (156/352)

제156화

#49 내가 뿌린 씨 (6)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나는 옆구리부터 붙잡았다. 끄응, 공간을 접어 이동하는 건 은근히 몸에 부담이 됐다. 겨우 붙여 놓은 뼈마디가 다시 시큰거리는 기분이었다.

“손이 맵네, 그 자식.”

애초에 갈비뼈가 몇 대는 나갔으니. 이 짧은 시간 안에 회복하는 게 무리긴 했다.

그런 나를 보며 김재호가 왠지 자신의 주먹을 들었다 놨다 했다.

“한 대 때려야…….”

“뭐라고?”

대체 무슨 말을 하는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 말을 들으려 했는데, 김재호의 앞을 한서현이 막아섰다.

“조금 전에는 뭐예요! 왜 보스 친구가 거기에 있던 건데요.”

“음,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원래 길을 걷다가 원수도 만나고, 내가 빌런한테 세뇌당했다고 믿는 친구도 만나고 그런 거 아니겠냐. 지구는 둥그니까 뭐든 가능하잖아.”

“와!”

한서현은 어이가 없단 얼굴로 날 봤지만, 나는 뻔뻔하게 나갔다. 거기에 정호산이 올 줄은 정말로 몰랐던 데다가, 도망간 차송진을 잡으러 갔다가 그 꼴이 됐다고 하면 한서현이 차송진을 쥐어팰 수도 있으니까.

‘그냥 내가 욕먹고 끝내는 게 낫지.’

말도 돌릴 겸, 나는 입을 열었다.

“쑤어하오주는?”

“무사히 목적지까지 안내했어요.”

“그래, 누구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지?”

“재호 형이 안전하게 다 기절시켰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도 안 다쳤으니까.”

한서현의 까칠한 반응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말은 해도 일 처리는 깔끔하게 했을 거라 믿는다.

“그러고 보니 내 가면은?”

내 말에 한서현이 툭 하고 무언가를 꺼내 내게 던졌다.

“두고 올까 했는데, 두고 오면 또 다른 걸 만들까 봐…….”

“고맙다!”

그사이에 내 가면을 챙기다니. 역시 한서현이었다.

“좋아. 다들 잘했어. 박수!”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도 손뼉을 치지 않았다. 뒤늦게 김재호가 쩍쩍 손뼉을 치긴 했지만, 이미 내 기분은 상한 뒤였다.

“이제 다들 쉬어. 할 거 있으면 하고.”

내 말에 곧바로 한서현이 퉁명스레 말했다.

“그 친구 얘기하기 싫으니까 도망가는 거죠?”

속이 뜨끔했다. 하지만 나는 애써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야. 진짜 너희 할 거 많잖아. 재호는 숙제해야 하고, 너는 스켈레톤을 더 다듬어 본다고 했잖아. 뼈를 무기로 개조하는 방법을 알아본다며.”

“으, 그거야 그렇지만! 이렇게 이번 일을 얼렁뚱땅 넘길 수는……. 재호 형, 잠깐! 어디로 가는 건데.”

“숙제.”

내 말에 잠자코 숙제하러 떠난 김재호를 따라 한서현도 결국 자신의 방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잔소리쟁이를 떼어 냈군. 나는 거실에 어정쩡하게 남은 차송진을 향해 말했다.

“그쪽도 숙제하러 가. 내일 확인할 테니까.”

나는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럼 나도 이제 방으로 들어가서 회복에나 전념해 볼까나. 마침 정리해야 할 생각도 있었고 말이다.

그렇게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나를 누군가 붙잡았다.

차송진이었다.

“왜, 왜 말 안 했어요?”

“뭘.”

“내가 도망갔다는 거…….”

“아아, 그거.”

답은 간단하다.

“말할 필요가 없으니까.”

“예?”

“말해 봤자 그쪽이랑 서현이가 싸우기만 했을 텐데, 뭐 하러?”

가뜩이나 피곤한 상태에서 굳이 끼어들 이유는 없었다.

“화 안 났어요? 나, 나 때문에 그렇게 다쳤는데…….”

그 말에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화를 낼 필요가 있나.”

그렇다. 내가 화를 낼 필요가 있는 일인가.

어차피 차송진은 ‘우리’가 아니다. 언젠가 이곳을 떠날 사람이다.

“그쪽은 언제나 우리한테서 도망치고 싶어 했잖아. 빈틈을 노려 기회를 잡은 걸 욕할 순 없지.”

따지자면 차송진은 원치 않은 채 이곳에 머무는 셈이었고, 그 사실을 숨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계속해서 나에게 말하지 않았나.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고.

“그러니 화를 낼 필요가 없다는 거야. 애초에 잘못했다면 그건 빈틈을 준 나고……. 뭐, 어쨌거나 괜찮다고.”

이 일이 알려져 봤자 한서현이 터는 건 내가 되겠지. 음, 그것만은 사양이다. 그러니까 적당히 비밀로 두자는 거다.

“그래도 당신 말을 어긴 건 난데…….”

내 설명에도 차송진은 여전히 우물쭈물하며 내 눈치를 봤다.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모르겠군. 조금 더 확실하게 말해 둬야 하나.

“기대와 믿음이 있어야 배신감이라는 것도 드는 법이야. 난 당신에게 아무런 기대도 안 했고, 그러니 아무런 유감도 없어. 이해했나?”

“어…….”

“애초에 나갈 수 있으면 언제든 이곳에서 나가도 좋다고 말한 건 나잖아.”

그러니 화를 낼 이유도 없지. 내가 한 말이 있으니까.

내 말에 차송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화를 내지 않으면 기뻐하는 게 맞지 않나?

나는 툭툭 차송진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다만 이번에 봤듯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여러모로 위험한 일이야. 나가고 싶으면 숙제부터 열심히 하라고. 모든 준비가 끝나면 나가기 싫다고 해도 내보내 줄 테니까.”

* * *

강이신이 방 안으로 들어간 뒤, 차송진은 혼자 거실에 남았다.

그렇게 떠들썩했던 것도 잠시, 거실은 금세 조용해졌다. 그 침묵 속에서 차송진은 가만히 강이신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기대가 있어야 배신감도 느끼는 거라고. 그러니 네 행동에 화를 낼 필요도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강이신의 얼굴에는 정말로 그 어떠한 유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차송진은 깨달았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얼렁뚱땅 강이신의 ‘선’ 안에 들어가 있어서 몰랐다. 뒤에 ‘벨츠머츠에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강이신은 그에게 친절했으므로.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차송진은 어느새 ‘선’ 바깥의 사람이 되었다.

한서현이 어떻게 된다면, 강이신과 김재호는 난리가 나겠지.

하지만 차송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 사람들은 그저 혀를 한 번 차고 말지 않을까.

왜냐하면 차송진은 이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니까.

저번에 화기애애하게 유니폼을 나눠 갖는 이들을 보면서도 느끼지 않았나.

‘그래, 이게 맞지. 난 이 사람들하고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밀어낸 건 분명 자신인데 뭘까. 이 이상한 기분은. 소파에 앉아 차송진은 이상하게 찌릿한 가슴께를 문질렀다.

이상하네, 저 사람이 화를 내지 않으면 좋은 건 나잖아. 그래,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무슨 짓을 당할까 걱정했는데 이대로 그냥 넘어가 준다니 완전 개이득이라고.

그렇게 중얼거려 보아도 여전히 차송진의 가슴은 울렁거렸다.

“그나저나 싸가지, 진짜.”

내가 형인데, 끝까지 반말이네.

“진짜, 뭐가, 기대도 안 해, 뭐가…….”

차송진은 재빨리 자신의 눈가를 훔쳤다.

그날 차송진의 눈가가 뜨거워진 이유는 모두 강이신이 싸가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었다.

* * *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레이가 슬쩍 말을 걸었다.

━그 녀석에게 한 말 진심이냐? 기대도 안 했다는 말.

“예, 뭐.”

처음에는 차송진에게 제법 많은 기대를 했다. 아니, 기대라기보다는 착각이다.

“사정이 저러니 서현이와 재호처럼 기꺼이 벨츠머츠가 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바보 같이 착각한 거죠.”

평범한 사람이라면 나를, 우리를 꺼리는 게 정상이지 않나. 갈 곳도 없다고, 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빌런이 되고 싶다는 사람이 흔할 리가.

“죽어도 빌런은 되기 싫다잖아요.”

그래, 보통은 갈 곳이 없다고 빌런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지.

차송진 쪽이 이상한 게 아니라, 한서현과 김재호가 특별한 거다.

어쨌거나 그 모든 게 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상, 차송진에게는 괜한 부담을 주지 않을 생각이다.

“그냥 적당히 우리 쪽에 머물다가 떠날 손님이라고 생각하려고요.”

어차피 이 일이 끝나면,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이 아닌가.

“이렇게 구는 게 저쪽도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요.”

━끄응, 뭐 그래라.

어쩐지 레이는 내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은 듯 보였지만 어쩔 수 없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잘 지내볼 수밖에.

━그나저나 쑤어하오주를 남 기자한테 맡긴 선택은 맞는 거냐.

“계획을 짤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름대로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다시 생각해 보니 최선이라는 말보다는 차악이라는 말이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그래도 기껏 구한 다음에 산 중턱에 버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쑤어하오주의 실제 나이가 어떻든, 겉모습으로 보이는 나이는 겨우 10대 중반이다.

이상한 놈이 꼬이면 어떡해.

“그랬다가는 얼마 지나지도 않아 공개 수배 명단에 쑤어하오주의 신상이 내걸릴걸요.”

━걱정하는 게 그쪽이었군.

“뭐, 약해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강하니까요. 민간인 쪽을 걱정해야죠.”

감정과 기억을 되찾았다고 해도, 끔찍한 성장 과정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기에 쑤어하오주는 여전히 위험인물이었다. 음, 걸어 다니는 살인 기계나 다름없을지도.

━이거, 남 기자를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래도 이혜원도 붙어 있고, 금 박사보다는 그쪽이 나을 것 같아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유기했다는 말로밖에는 안 들리는데.

“유기라니요. 위탁 보호입니다. 게다가 그쪽 활동비를 대 주고 있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건 정당한 부탁입니다, 부탁.”

━명령을 가장한 협박이겠지.

끄응. 뭐, 이번 일을 꼭 도와줬으면 해서 조금 간절한 말투로 부탁하긴 했다만…….

“그래도 부탁이었는데요.”

━협박이었다. 네놈이 쓴 메시지를 그대로 읊어 주랴? ‘이번 달 활동비를 받고 싶다면 순순히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것이다.’, ‘당신의 정보를 내가 모두 알고 있다는 걸 잊지 말도록…….’.

그 뒤로 이어지는 말들은 내가 들어도 너무했다.

“알겠습니다, 협박이었네요.”

결국 나는 레이에게 백기를 들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맡겨서 어찌할 생각이냐?

“되도록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해 달라고 했습니다만…….”

내가 한국에 있다는 걸 안 이상은, 쉽게 돌아가지 않겠지.

“뭐, 일단은 살해당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 보라고 해야겠습니다.”

나는 슬쩍 남 기자에게 문자를 남겼다.

「파이팅 ^^」

* * *

남주현은 자신을 노려보는 쑤어하오주에게 벨츠머츠의 리더가 제게 주었던 편지를 낼름 전했다.

쑤어하오주는 그 편지에 무언가를 기대했지만, 별 내용은 없었다. 기껏해야 대충 ‘눈앞에 있는 여자가 네 한국 생활을 도울 거다’라는 말로 요약되는 내용이었다.

자신을 농락하고 또다시 사라졌다는 분노가 반, 그리고 감히 눈앞의 여자에게 자신을 맡겼다는 분노가 반. 하지만 쑤어하오주는 분노를 억눌렀다. 눈앞의 여자를 죽여 버리면, 션과의 연결 고리가 끊길 것 같았으니까.

[션이랑은 무슨 사이인데, 당신.]

그렇게 말하는 쑤어하오주의 얼굴은 그야말로 야차 같았다. 살기가 가득한 눈빛에 잔뜩 쫄아 붙은 남주현이 덜덜 떨며 말했다.

“이럴 수가! 당연한 말이지만 중국어로 말하네요.”

문제는 이 두 사람의 언어가 서로 달랐다는 거였다.

[뭐라는 거야, 중국말 못해? 션은 도대체 이 여자의 뭘 믿고 날 맡긴 거야?]

“하하, 이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네요. 니취팔러마?”

[뭐라는 거야, 그거 욕이지?]

남주현 기자는 자신이 아는 중국어를 꺼내 놨지만, 안타깝게도 허접한 성조의 중국어는 통하지 않았다. 그때 이혜원이 남주현 기자의 구원 투수로 나섰다.

[욕이 아닙니다. 식사는 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려고 한 거예요.]

매끄럽게 이어지는 중국어에 남주현은 입을 벌렸다.

“희, 희원 씨! 중국어 할 줄 알았습니까?”

“예. 그나저나 그 말은 중국 사람들에게 무례할 수 있으니 안 하는 게 낫겠습니다. 욕이랑 발음이 비슷해서 외워 둔 거죠?”

그 말에 찔린 남주현은 입을 다물었다. 정곡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남주현이 할 수 있는 러시아어는 스바씨바밖에 없었다.

“통역은 제가 할 테니 편하게 말씀하시면 될 것 같아요.”

“고, 고맙습니다.”

이혜원의 도움으로 남주현은 쑤어하오주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자신은 벨츠머츠와 전혀 아는 사이가 아니고, 자신 또한 협박을 받아 여기까지 온 거라는 거라고 박박 우기자 쑤어하오주의 얼굴에서도 살기가 사라졌다.

그쪽에서 부탁한 건 쑤어하오주의 한국 정착, 혹은 중국 귀국이라는 말까지 전하자 쑤어하오주는 욕설을 내뱉으며 절대로 중국으로 돌아가지는 않겠다고 외쳤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국에 있을 거야!]

그 말에 남주현 기자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남주현은 쑤어하오주를 숙소까지 데려다주었다.

잠자코 그녀에게 모든 걸 내준 남주현은 쑤어하오주가 잠이 들고 나서야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나저나 엄청 대단하네요. 중국어를 잘하는 줄은 몰랐어요. 뭐 더 숨기고 있는 거 아니에요?”

무려 시리우스 부길드장의 수족이었던 이혜원이다. 단순히 헌터로만 뛰어난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중국어, 일본어, 영어 정도가 특기예요. 스페인어도 간단한 회화 정도라면 할 수 있고요.”

그 말에 남주현의 입이 벌어졌다.

“마, 맙소사!”

생각보다 엄청난 인재였다.

“그, 그걸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어요? 제가 만약 5개 국어가 가능했다면, 누가 물어보지 않아도 맨날 5개 국어로 자기소개를 하고 다녔을 텐데요.”

“예? 굳이 왜…….”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혜원을 보며 남주현은 이마를 딱 쳤다.

“이래서 천재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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