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51 미국, 기회의 땅 (2)
노먼이 우리를 안내한 호텔은 라스베이거스 외곽에 있는 곳이었다.
지어진 지 오래된 듯 낡은 티가 나는 호텔에서는 꿉꿉한 냄새가 났다.
그래도 이 정도면 꽤 괜찮은 편이었다.
우리에게 돌아온 노먼은 그리 반갑지 않은 소식을 알려 주었다.
[하필이면 한꺼번에 용병대가 몰려서 남은 방이 두 개뿐이라네요.]
흠, 유타주에 최근 일자리가 많다는 소리를 들은 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군.
[두 개 정도면 충분합니다.]
[음, 두 분은 같은 침대에서 주무셔야 하는데요.]
오, 이건 전혀 반가운 소식이 아닌데. 하지만 방이 이거밖에 없다는데, 뭐. 어쩔 수 없지. 다른 숙소를 달라 고집할 수도 있겠지만, 첫날부터 에이전시와 갈등을 빚고 싶지는 않았다.
내게 호텔 키 카드를 건넨 노먼이 말했다.
[지정된 숙소 바깥으로 나가기 전에는 꼭 연락을 주셔야 합니다. 웬만해서는 호텔에만 계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사고를 치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먼이 말한 대로 방은 총 두 개였다.
퀸 사이즈의 침대가 하나 놓인 작은 방과 두 개의 싱글 침대가 놓인 중간 크기의 방 하나였다. 퀸 사이즈의 침대가 놓인 방에는 소파도 따로 없어, 어쩔 수 없이 붙어 자는 수밖에 없었다.
집이었다면, 그냥 바닥에서 자라고 하겠지만 여기 사람들은 무려 실내에서도 신발을 신고 돌아다닌다고. 지저분한 카펫에서 자라고 하긴 좀 그렇지.
그러니까 두 사람은 같은 침대에서 자야 하고, 문제는 그 두 사람을 어떻게 정하냐 하는 거냐.
내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한서현이 치를 떨며 말했다.
“죽어도 싫어요.”
까칠하긴. 한서현을 골랐다간 제명에 못 살 것이다.
나는 슬쩍 김재호를 바라보았다. 김재호는 아무런 생각도 없어 보였지만, 김재호의 험한 잠버릇을 알고 있으니 차마 김재호랑 같이 자라고 하기 그랬다.
그렇다고 차송진더러 가라고 하자니, 저번부터 봤던 불쌍한 얼굴이 눈에 밟혔다.
역시 한 조직의 리더란 이런 엄청난 결정을 떠맡아야 하는 건가.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네가 갈 생각은 없는 거냐.
‘보스쯤 되면 그런 희생은 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닐까요?’
나는 레이의 말을 애써 무시했다.
그래, 결심했다. 역시 이런 중요한 일을 결정해야 제대로 된 리더라고 할 수 있겠지.
“흠, 사다리를 타자.”
━뭔가 대단한 말을 하기에 그럴싸한 해결책이라도 내놓을 줄 알았는데. 리더의 책임감은 무슨.
‘하지만 이보다 더 공정한 방법은 없잖습니까!’
누굴 붙여 놔도 원망을 받을 바에야, 차라리 그 원망을 사다리로 돌리겠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나는 상관없어, 전략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
“겨, 결과가 이, 이상한 것 같은데요?”
한서현의 서슬 퍼런 눈빛과 차송진의 다 죽어 가는 표정을 보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필 이렇게 붙다니.
하지만 결과를 되돌렸다간 공정한 사다리 신의 저주를 받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지, 결과가 이렇게 나와 버렸으니 말이야.”
나는 한서현을 끌어당겨 작게 속삭였다.
“너무 괴롭히지는 말고. 내일 보자.”
내 말을 들은 한서현이 이제는 나를 죽이고 싶다는 눈빛을 하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재빨리 도망가기로 했다.
“재호 형!”
“어허, 말했잖아. 공정하게 정한 결과라고. 우린 간다!”
나는 김재호를 이끌고 재빨리 우리 방으로 넘어왔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레이의 잔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쟤네 사이가 최악이라는 걸 알면서도 붙여 두냐! 그냥 적당히 바꿔 주지 그랬어?
‘그러면 영원히 사이가 엉망진창일 거 아닙니까. 이런 기회로라도 부딪치다 보면 사이가 좋아지지 않을까요?’
━그래서 네 친구가 몇 명이라고?
‘……내일을 위해 오늘은 일찍 자야겠습니다.’
치사하게 팩트로 공격하다니.
* * *
한서현은 한숨을 쉬며 퀸 사이즈의 침대를 노려보았다.
망할 사다리 타기. 젠장맞을 보스! 저놈이랑 사이가 안 좋은 걸 뻔히 알면서도 바꿔 주지 않다니!
속으로 몇 번이나 욕을 중얼거려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아,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
한서현은 제 뒤에서 머뭇거리는 차송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를 비켜 준 한서현은 배낭에서 옷을 꺼내 카펫 바닥에 깔았다. 그 모습을 본 차송진이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한서현은 얼굴을 찌푸린 채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차송진을 노려보았다. 둘만 있다고 평소보다 더 졸아붙어서 자신을 보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저 어색한 존댓말은 또 뭔가. 빈정이 상한 한서현은 자기도 말을 높이기로 했다.
“그쪽이 침대에서 자요. 나는 여기에서 잘 테니까.”
“어, 그럴 수는 없죠?”
차송진의 말에 한서현은 얼굴을 구겼다.
“그럼 뭐요, 나랑 그 침대에서 같이 자자고요?”
한서현의 질색하는 표정에 차송진도 발끈했다.
“나도 같이 자기 싫거든요! 그렇다고 그, 그쪽이 그렇게 바닥에서 자는 걸 바라는 건 아니라고요. 그것도 이렇게 일방적으로요!”
내가 침대에서 잘 테니, 네가 바닥에 누우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이렇게 아무런 대화도 없이 바닥에 대뜸 누워 버리는 걸 바라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대화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냥 내가 자도 되고…….”
차송진의 말에 한서현이 대뜸 말했다.
“그럼 보스가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그쪽을 협박해서 침대를 내가 차지한 거라고 생각할걸요?”
“뭐?”
“아무런 말도 안 할 테니까 그냥 거기서 자기나 해요.”
그 말에 차송진은 억울해졌다.
‘너희 보스가 널 얼마나 예뻐하는 줄 아냐! 설마하니 그렇게 생각하겠냐고!’
“잘 거니까 말 시키지 마세요.”
말은 또 어찌나 예쁘게 하는지! 마음 같아서는 정말로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저 녀석은 올해 겨우 열여덟이었다.
“그럼 이불이라도 가지고 가든가.”
바닥에 누운 한서현은 그 말을 무시하며 누웠다. 차송진은 한숨을 쉬며 이불만 만지작거렸다. 저 위로 이불을 던져 줄까 싶었지만, 또 무슨 말을 들을까 두려워 그냥 포기했다.
‘날 왜 저렇게 싫어하는 거야? 말도 하기 싫을 정도라니…….’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 위에서 그렇게 몇 번이나 몸을 들썩거렸을까. 바로 한서현의 투덜거림이 날아들었다.
“좀 조용히 좀 하죠?”
“……미안.”
차송진의 사과에 대답은 없었다. 차송진은 숨을 삼켰다. 몸을 또 한 번 들썩거렸다간 바로 욕이 날아들 것 같아 맘대로 들썩거릴 수도 없었다.
‘무진장 불편하잖아!’
새삼 강이신이 원망스러워졌다. 가뜩이나 제일 불편한 이 녀석이랑 같은 방을 쓰게 하다니!
그렇게 얼마나 한참을 끙끙거리고 있었을까. 바닥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끄, 끄응, 끄…….”
누군가 끙끙거리는 소리. 한서현이었다. 차송진은 슬쩍 눈을 떠서 한서현을 바라보았다. 옆으로 누운 한서현이 두 주먹을 움켜쥐고 끙끙 앓고 있었다.
‘악몽이라도 꾸는 건가.’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흔들어 깨워 주거나 뭐라도 했겠지만 한서현만큼은 예외였다.
‘또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한서현은 자신이 차송진을 싫어한다는 걸 감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드러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아는 척 말자. 내가 뭐라든, 쟤는 싫어할 테고…….’
저 녀석이 화를 낸다면, 이길 자신도 없다.
한서현의 능력은 그동안 아주 잘 봤다. 죽은 자들을 마음대로 다룰 뿐만 아니라, 흑마력을 이용해 모래를 조종할 수 있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자.
저놈이 악몽을 꾸든 말든, 내가 깨울 필요는 없는 거잖아.
“혀엉…….”
형이라고? 차송진은 기억을 더듬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김재호에게 간식을 주고 빌린 태블릿 PC로 차송진은 뒤늦게 벨츠머츠에 대해 알아보았다.
벨츠머츠에 대한 건 루머가 대부분이었지만, 한서현에 대한 건 달랐다. 벨츠머츠 중에서 유일하게 신분이 제대로 밝혀진 것 때문에 온갖 정보가 올라와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저 녀석 형이, 아주 비참하게 죽었었지.’
불법 게이트 사건의 피해자로, 살해당한 채 발견되었다는 말을 봤다. 그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건 강이신이었지만……. 여기에서 잘 지내고 있는 걸 보니 그것 또한 누명이었겠지.
못돼 먹은 놈인데도 완전히 미워할 수만은 없는 건, 그 사정을 대충일지라도 알아 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흐, 흑…… 미, 미안, 형…….”
계속 형을 부르면서 우는 애를 그냥 내버려 두기도 뭐해, 차송진은 눈을 떴다. 악몽을 꾸게 두느니 슬쩍 몸이라도 흔들어서 깨워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눈을 뜬 차송진은 눈앞의 장면에 기겁해야 했다.
“흡!”
하얀 뼈다귀. 하얀 뼈다귀가 한서현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역시 그날 본 건 잘못 본 게 아니었어.
차송진은 곧바로 고개를 돌리고 이불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는다고 괜찮아지진 않았다. 오히려 눈을 감고 있으니 뼈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너무 잘 들려 소름이 돋았다.
젠장, 젠장, 젠장!
‘저, 저건 도대체 뭔데!’
살이 떨리게 무서웠다.
당연히 그날, 잠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 * *
“내가 어제 푹 자 두라고 하지 않았어?”
누가 봐도 푹 잔 것 같아 보이는 한서현과 달리 차송진의 얼굴은 칙칙하기 그지없었다.
“설마, 어제 괴롭힘이라도 당한 거야?”
“아니거든요! 진짜! 하나도 안 괴롭혔거든요?”
내 말에 한서현은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러면서 차송진을 노려보는데, 눈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바로 알 수 있는 시선이었다.
농담이었는데……. 농담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사이가 괜찮아지길 기대했는데 오히려 사이가 더 나빠진 것 같았다.
━그냥 사이가 안 좋은 애들을 몰아넣고 사이가 좋아지길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 아니냐?
‘하긴, 통장에 잔고를 넣어 놓는다고 절로 잔고가 불어나진 않으니까요.’
뭐든 공으로 되는 건 없다는 뜻이다.
━그래, 인마!
‘조만간 얘기를 좀 해 봐야겠는데요.’
━네가 나선다고 뭐가 되려나 모르겠다.
‘그래도 이대로 두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차송진이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피곤해 보이지만, 일정을 미룰 순 없었다.
내 연락에 노먼은 곧바로 밴을 끌고 왔다. 오늘 우리는 유타주로 향한다.
“유타주까지는 다섯 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니까, 차에서라도 좀 자 둬.”
“예에.”
의자에 앉은 차송진은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그 모습이 영 못마땅한 듯 한서현은 혀를 찼다. 나는 한서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서현아.”
“내가 어제 편하게 자라고 자리 양보도 해 줬는데, 왜 저러는지 진짜 모르겠다니까요. 진짜로 난 하나도 안 괴롭혔어요.”
아까 내가 했던 농담이 영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여기에 그냥 두고 다닐 순 없잖아.”
“그냥 방 안에 넣고 가둬 버리면…….”
“한서현.”
“알겠어요.”
거듭 눈치를 주자 그제야 입을 닫았다.
‘둘 사이를 도대체 어떻게 풀어야 할까.’
레이가 말했던 대로 내 쪽도 인간관계가 엉망진창이었던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지금 이런 상황을 어떻게 풀어 가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대충, 그, 뭐냐, 손잡고 화해해! 이런 말이나 하고 싶은데……. 전혀 안 통하겠지.
음,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점점 더 사이가 나빠질 것만 같고.
모르겠다! 일단은 유타주로 가서 어떻게 게이트를 공략할지나 생각해 볼까나.
━해결이고 나발이고, 그냥 도망치는 거잖냐!
‘때로는 도망치는 것도 답이 될 수가 있다는 거 모릅니까?’
━그래, 답은 답이겠지. 그게 오답이라서 문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