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54 기만의 시련 (5)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무것도 없었던 게이트 주변에는 임시 컨테이너들이 잔뜩 들어서 있었다.
유타주에 처음으로 나타난 S급 게이트에 대한 관심은 그만큼 폭발적이었다.
뭐, 아무리 S급 게이트라고 해도 평범한 게이트였더라면 이 정도의 관심을 받는 건 불가능했을 거다. 눈앞의 게이트가 이렇게 폭발적인 관심을 받는 것은, 첫 등장에선 C급에 불과했던 것이 며칠 만에 S급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흑마력을 내뿜으며 말이지.
어떻게 소식을 들은 건지, 미국에서 게이트에 관련된 현상을 연구하는 과학자란 과학자들은 죄다 여기로 몰려들었다.
저 컨테이너 중 몇 개에는 아예 임시 실험소 같은 게 세워지기도 했다.
급진적인 과학자 몇몇은 추가적인 실험을 위한 공략대를 투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차라리 S급 게이트에 눈이 먼 에이전시들이 끼어들었을 때는 사정이 나았다. 이 과학자들이란 족속들은 설득이 통하지 않는 벽창호들이었으니까.
골든데이의 에이전시는 피곤한 얼굴로 과학자들에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 게이트의 공략권은 ‘골든데이’가 소유하고 있다니까요.”
“그 골든데이가 저 안에서 사망했을 수도 있잖아요. 기껏해야 C급 용병대라면서요.”
“하지만 아직 이틀밖에 안 지났고…….”
“이미 이틀이나 지난 거지요! 상식적으로 C급 용병대가 S급 게이트를 공략할 수는 없어요! 저 게이트는 특수하단 말입니다. 지금 이러는 시간 동안에도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요. 하루아침에 SS급 게이트가 될 수도 있는 일이고! 브레이크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요.”
노먼을 설득하려던 과학자는 어느새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폭주했다. 노먼을 붙잡고 어째서 저 게이트를 연구해야 하는지 내뱉고 있는 과학자를 보며 에디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역시 과학자라는 족속들과는 말을 섞고 싶지 않다.
멀찍이서 이 대화를 엿듣는 에디마저 이렇게 지치는 기분인데, 그 과학자들에게 며칠이나 시달린 노먼이야 오죽하랴.
단 이틀 만에 골든데이의 에이전시는 낡을 대로 낡아 버렸다.
제대로 씻지도 못한 듯 머리에는 기름이 끼었고, 옷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잠도 못 잔 것인지 낯빛도 거무죽죽했고 눈에는 핏발이 섰다.
그만큼 저 죄 없는 에이전시를 달달 볶은 사람이 많다는 뜻이겠지.
이쯤 하면 솔직히 못 이기는 척 소유권을 다른 곳으로 넘겨도 될 텐데, 골든데이의 에이전시는 마치 집을 지키는 개처럼 충직한 모습으로 게이트를 지켰다.
‘그때 들었던 협박이 무서워서 저러는 것 같지는 않은데.’
에디는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은 내 에이전시잖아, 안 그래요? 그러니 내가 뒤지기 전까진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 그래, 일주일. 일주일 동안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소유권을 넘기지. 하지만 그전까지는 우리 거야.’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 골든데이의 리더가 내뱉은 말은 제법 살벌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미 게이트 안에 들어간 사람이다.
골든데이가 게이트에 들어간 지 이틀, 이곳에 있는 사람 대부분이 그들은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다.
시체와 덧없는 약속을 지킨다며 노먼을 비웃는 이도 많았다. 하지만 몇몇은, 노먼이 골든데이의 무언가를 본 게 아니냐는 말도 했다. 그들과 밀접하게 붙어 다녔던 에이전시인 만큼 다른 이들은 모르는 골든데이의 비밀이라도 아는 게 아니냐고.
타당한 의심이었다.
뭔가가 있지 않고서야, S급 게이트에 들어간 C급 용병대에게 이토록 충성할 수 없으니까.
‘믿을 만한 구석이 따로 있다거나?’
에디는 골든데이에 대한 정보를 캐냈다. 노먼을 이용해서 정보를 캐는 방법은 실패다. 노먼은 이해할 수 없는 충성심으로 굳게 입을 닫아걸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숨기려 해도 쿠키 주변에는 늘 부스러기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 일이 터지기 전에도 굉장한 속도로 C급 게이트를 처리했던 용병대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던 터라, 이미 여기저기 소문이 나 있었다.
에디 또한 그 소문을 듣고 그들의 컨테이너를 찾지 않았나.
이름 골든데이. 그곳의 구성원은 총 넷. 전원이 한국에서 온 5성급의 헌터. 아, 그중에는 4성급 헌터도 하나 있었다.
평균 나이는 28세.
리더를 맡은 이의 이름은 이산호.
C급 게이트를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공략한 용병대.
여기까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는 정보였다.
하지만 어째 에디는 이 정보가 모두 거짓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에디의 이 느낌은 제법 잘 맞아떨어지는 편이었다.
‘확실히 5성급에 머물 만한 인간은 아닌 것 같았지.’
그보다 몇 급은 더 높을 것 같았다. 6성급? 에이, 겨우 6성급 가지고는 S급 게이트에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들어가지 못하지. 7성급? 7성급도 좀 그런데.
설마 8성급?
자신이 한 생각이었지만, 곧바로 웃음이 나왔다. 그런 이가 C급 용병대의 일원으로 자신을 속이고 이곳에 왔을 리도 없었을뿐더러, 그렇다고 하더라도 겨우 C급 게이트나 전전하고 다녔을 리 없다.
‘하지만 정말 S급 게이트를 공략할 생각으로 저기에 들어갔다면, 그것도 아예 말이 안 되는 일이 아니긴 해.’
에디는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정말로 골든데이가 저 게이트를 공략할 수 있을지, 아니면 역시 객기로 그 아까운 생명을 날려 버린 것인지.
에디의 생각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과학자와 노먼의 설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골든데이인지 뭔지도 지금쯤 이 안에 들어간 걸 후회하고 있을 수도 있다니까! 욕심을 부려서 안으로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살아있기만 해도 기적 아닌가!”
“그래도 에이전시 계약상 저는 이 게이트를 보호해야 하고…….”
“지금 여기에 테이카 쿠퍼가 와 있다는 건 알지? 테이카 쿠퍼가 직접 이 게이트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는데 겨우 C급 용병대의 말을 지키려고 그 기회를 던져 버릴 셈인가?”
멀리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에디는 팔짱을 꼈다.
그래, 그게 문제다.
하필이면 그 테이카 쿠퍼가 여기에 와 있다는 것.
* * *
테이카 쿠퍼가 S급 게이트를 공략하고 나온 건 이틀 전의 일이었다.
공략이 끝난 직후인 만큼, 평소라면 휴식을 취했을 테지만 오승우에게 유타주의 게이트에 대해 전해 들은 테이카 쿠퍼는 기꺼이 전세기에 몸을 싣고 이곳으로 달려왔다.
“당신에게 여기 상황을 이야기한 건, 조금 늦을 수도 있겠다고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였지 날름 여기로 오라는 뜻이 아니었거든요?”
오승우의 말에 테이카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호텔 방에 처박혀만 있어요. C급 게이트가 S급 게이트가 된 것도 놀라운데 C급 용병대가 소유권을 주장하며 안으로 들어갔다면서요.”
이런 구경을 놓칠 수는 없지. 테이카의 중얼거림을 들은 오승우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그 귀한 휴가를 여기에 다 날려요?”
“내 휴간데, 내 마음대로 쓰는 게 뭐 어때서.”
테이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이 미국에서 제일가는 헌터인 그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여기에서 게이트 구경이나 하며 시간을 때우기엔 테이카 쿠퍼라는 인간의 시간은 너무나 귀했다.
하물며 테이카는 직전에 S급 게이트를 공략하고 온 길이었다. 최고의 의료팀과 몸을 회복하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재미난 구경이 있다고 여기로 대책도 없이 날아오다니.
말하면 말할수록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오승우는 테이카의 성격을 알았다. 테이카의 성격상,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무조건 해야 직성이 풀렸다. 괜한 잔소리를 했다간 서로 간의 감정만 상한다는 뜻이다.
오승우의 타는 속도 모르고 테이카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미스터 오는 궁금하지 않아요? 그 사람들이 정말로 저 게이트를 클리어할지.”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대도요.”
“그래도 만약 그 사람들이 살아 돌아오면 대박이잖아요.”
테이카의 말에 오승우는 잠자코 눈을 굴렸다.
“확실히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로 대박이지만…….”
만약 그 C급 용병대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그것만으로도 한 편의 영화요, 드라마다. 오승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정말로 그들이 살아서 돌아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친구들과 계약을 맺어야겠죠.”
“그래, 그러니까 여기에 있어야죠. 만에 하나라도 그 친구들이 살아 올 수도 있으니까.”
“하아…….”
오승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테이카에게 넘어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자신이 반대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고.
정말로 만약에, 그러니까 정말로 만에 하나 그들이 게이트를 공략하고 생환한다면 그만큼 대박이 없기도 했다.
“맞다, 계약하고 싶다던 그 친구는 어떻게 됐어요?”
테이카의 말에 오승우는 쓴 미소를 지었다.
“뭐, 여기에 혼자 있는 걸 보면 뻔하잖습니까.”
“거절당했다는 뜻?”
오승우의 말에 테이카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승우는 무척이나 뛰어난 에이전시였으니까. 테이카가 이 미국에서 제일 뛰어난 헌터로 꼽힌다면, 오승우는 이 미국에서 제일 잘나간다고 말할 수 있는 에이전시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이런 벽지까지 와서 용병으로 뛰고 있는 헌터와 계약을 하러 온 것도 놀라운 일인데 심지어 그 계약에 실패했단다.
“대체 누가 미스터 오를 걷어찬 겁니까? 머리에 총을 맞지 않고서야, 미스터 오를 거절할 이유가 없을 텐데.”
오승우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도 사람입니다. 가끔씩은 실패할 수도 있죠.”
“하핫, 대체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지는데요.”
그렇게 말한 테이카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럼 이건 어때요? 미국 최강의 헌터 테이카 쿠퍼와 한 팀이 될 수 있는 영광을 주겠다고 하는 거죠. 미스터 오를 거절했다곤 해도, 내가 끼면 달라지지 않을까?”
테이카의 윙크에 오승우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한 팀은 무슨, 기껏해야 게이트 공략에 한 번 정도 끼워 주는 정도일 거면서. 게다가 그 친구는 당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허, 어째서?”
테이카의 표정에 오승우는 웃음을 터트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삐쭉거리는 테이카는 전세계에서 제일 강하다는 말을 듣는 남자답지 않게 어려 보였으니까.
“너무 잘나도 시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니까요.”
“날 시기하는 사람도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않던데요.”
그렇게 말한 테이카는 턱을 괴었다. 철없이 보이기는 해도 테이카는 이쪽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긋지긋할 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테이카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테이카를 거절할 사람은 없다. 왜냐? 테이카 쿠퍼라는 이름은 그만큼 대단하니까!
아, 딱 한 번 그도 걷어차인 적이 있긴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대로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쪽이 도망친 거지만.
“그러고 보니 다른 나라에서 범죄를 저지른 헌터라고 해도, 미국에서 헌터가 된다고 하면 그 죄를 사해 준다는 법이 있지 않았나요?”
테이카의 말에 오승우는 눈부터 찌푸리고 봤다. 법에는 영 관심이 없는 테이카가 저런 법 조항을 외우고 다닌다고? 어째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런 법이 있긴 하지만…… 갑자기 그 법은 왜 꺼내는 겁니까?”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서요.”
테이카의 말에도 오승우는 의심스럽다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자신을 찌를 듯이 쳐다보는 그 시선에 테이카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냥, 벨츠머츠라던 그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 방법은 없을까 한 번 생각해 봤던 것뿐이에요.”
테이카의 말에 오승우는 곧바로 외쳤다.
“그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잡범이라면서요.”
“그 친구들 최근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요? 국회의원을 고문한 뒤에 빌딩에 매달아 놨다고요.”
“오, 반정부 주의자인가? 아니면 아나키스트?”
“그놈들 생각이 뭐든 위험한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위험해 보이진 않았는데.”
태연한 테이카의 말에 오승우가 간만에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까지 제 말을 뭘로 들은 겁니까! 어쨌거나 그놈들은 안 돼요. 절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흙이 들어가도?”
“아니, 그건 관용 어구예요. 진짜로 내 눈에 흙을 넣으면 안 돼요.”
“하하, 제가 그러겠어요? 살짝 고민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말한 테이카가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그리고 난 누가 떠들어대는 소리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싶지 않아요. 사람들이 나에 대해 떠드는 소리를 듣자면, 나는 눈이 열 개쯤 달린 괴물처럼 느껴지거든요.”
오승우가 할 말을 고민하는 사이, 컨테이너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잠깐만.”
오승우와 테이카는 동시에 컨테이너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 바깥으로 게이트가 울렁거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 맙소사.”
오승우는 그 모습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테이카는 씩 미소를 지으며 오승우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쳤다.
“만에 하나. 그 친구들이 그 확률을 뚫은 것 같은데요.”
울렁거리던 게이트 사이로 검은 모래가 자욱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그 검은 모래를 본 테이카는 고개를 옆으로 갸웃거렸다.
저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오.”
테이카의 눈이 반짝 빛났다.
“나왔다!”
게이트 바깥으로 나온 남자는, 피투성이의 남자를 안고 있었다. 정신을 잃은 채 축 늘어진 남자를 본 순간 테이카가 말했다.
“저 사람들 우리가 도와주죠.”
“예?”
“놓칠 수 없는 인재잖아요, 그렇죠?”
테이카의 말에 오승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소리긴 한데, 뭐지 이 불안한 느낌은…….’
유난히 짙은 테이카의 미소가 오늘따라 미심쩍었다.